67. 엘븐 글로리아
“용사 블랑카 님, 제 술을 받아 주세요.”
“에헤이, 뭘 또 이런 걸……!”
“블랑카 님, 제 술도 받아 주세요.”
“아이고, 이거 손이 두 개라서 참 어쩔 수가 없네. 으헤헤!”
마을 처녀들에게 술시중을 받는 블랑카의 입이 귀에 걸려 내려올 줄을 몰랐다.
마을로 돌아와 바울산 산적들의 궤멸 소식을 전해 준 그날 밤. 요한과 블랑카는 그야말로 마을 최고의 귀빈 대접을 받았다.
귀빈 대접이라고 해 봤자 감자와 고구마에 닭 몇 마리가 추가된 것뿐이었지만 마을 축제는 개국 연회 이상의 분위기로 타올랐던 것이다.
다음 날.
“용사 블랑카! 용사님의 이름을 비석에 새겨 대대손손 용사님의 용기와 업적을 기릴 것입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죽어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용사님의 앞날에 영광 있으라!”
마을 사람들의 성대한 작별을 받으며 넉넉한 식량과 함께 마을을 떠난 요한과 블랑카.
화이트가 달리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그제야 블랑카가 요한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진짜 괜찮으세요?”
“뭐가?”
“아뇨, 사실 저 사람들을 구해 준 것이나 산적들을 무찔러 준 것도…… 진짜 용사는 제가 아니라 알파 경이잖아요. 근데 제가 이렇게 모든 공을 가로채도 되는 건지…….”
요한은 괜히 자신에게 미안해하는 녀석의 의외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의외다? 난 되게 뿌듯해할 줄 알았는데.”
“에이, 설마요. 저도 염치란 게 있는데…….”
“퍽이나. 아무튼 명성을 원하는 놈이 가면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겠냐? 오히려 그 타이밍에 네가 있어서 나에겐 도움이 됐으니까 신경 쓰지 마. 그리고…….”
요한은 따뜻하게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영 그 사람들이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고.”
“네? 그게 무슨…….”
“목숨 걸고 그 사람들을, 그리고 아이들을 지키고 싶었으니까 나선 거잖아. 그 마음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용사 맞지. 난 거기에 능력을 조금 빌려줬을 뿐이고.”
“…….”
블랑카는 크게 놀란 눈빛으로 요한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사실 지금까지 블랑카는 요한이 다른 빚쟁이들이나 도박꾼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자신을 이용해 먹는 것에만 목적이 있는 사람들 말이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 그 누구도 요한처럼 자신의 진심을 헤아려 주는 사람은 없었다. 요한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 그런 거 아니거든요! 흥!”
“……여기서 뛰어내릴래?”
“죄송합니다…….”
블랑카는 몰랐지만 그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는 요한에 대한 신뢰의 싹이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 * *
루지나 왕국 북쪽, 루지나 초원 지대는 몬스터들의 천국이었다.
그 때문에 왕국에서도 정기적으로 성벽 근처에 몰린 몬스터들만 용병들을 소집하여 청소할 뿐, 초원을 장악한다는 건 감히 꿈도 꾸지 못했다.
요한의 목적지인 엘븐 글로리아는 바로 이 루지나 초원 지대 너머에 있었다. 즉, 몬스터들의 천국을 지나지 않고서는 그곳에 도착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쿵쾅쿵쾅쿵쾅쿵쾅!
“으아아아! 무슨 사이클롭스가 고블린처럼 몰려 다니냐고, 이 미친 초원은!”
“그러니까 납작 엎드려서 꽉 붙들고 있어. 떨어지면 죽는다.”
지축을 뒤흔들며 정면에서 무리 지어 몰려오는 사이클롭스들.
녀석들은 대형 몬스터에 속하는 괴물로 보통 무리 지어 생활하지는 않지만 그건 개체수가 적기 때문이었다.
지금처럼 개체수가 많을 때는 무리 지어 생활하는데, 안 그래도 개개인이 강력한 놈들이었기에 무리 지어 습격할 경우 그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막말로 기사단 몇 개 정도는 삽시간에 박살 내 버릴 정도로 말이다.
[마스터, 블랙을 호출하시겠습니까?]
“아니. 저건 내가 처리한다. 오랫동안 땅을 밟지 않았더니 몸이 뻐근해서 말이야.”
휙.
나노의 제안을 거부한 요한이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리더니 바람보다 빠르게 질주하던 화이트의 등 위에서 가볍게 뛰어 내렸다.
파지직, 파직!
그 순간, 요한의 몸에서 뇌전의 마나가 방출되며 그의 몸을 휘감더니 그의 신형이 마치 빛살처럼 앞으로 쏘아져 날아갔다.
파지직…… 콰릉! 콰릉!
녀석들에게 접근하면서 요한은 잔뜩 끌어 올린 마나를 두 주먹에 집중하였다.
이내 요한의 주먹을 감싸고 돌던 뇌전이 압축되면서 천둥번개를 터트리기 시작했는데 이 천둥번개야말로 완벽한 뇌전의 마스터 오러라는 증거였다.
고오오오오……!
그 순간, 요한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뇌전의 마스터 오러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가 살벌했다.
소모되는 마나, 육체에 대한 부담, 그리고 위력.
하지만 소모되는 마나는 제반의 팔찌가 실시간으로 빠르게 주변 마나를 끌어모아 충전해 주었고 육체에 대한 부담은 코팅된 나노 크리에이터가 분담해 주었다.
처음이었다, 뇌전의 마스터 오러를 맨몸에 펼치고도 이렇게 편했던 적은.
단연 즐거울 수밖에 없으리라.
그리고 그 모든 페널티를 압도할 정도로 강력한 위력은…….
콰아앙!
말 그대로 달려들던 사이클롭스들을 학살하기에 충분했다.
후우웅!
강철보다 단단한 뼈 몽둥이가 요한의 주먹에 수수깡처럼 부러져 나갔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요한의 주변에 접근하는 것만으로 주먹에 압축된 뇌전이 자동으로 접근한 사이클롭스의 생체 전기를 추적하여 감전시켰다.
그것만으로도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숯덩이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대형 몬스터에다 특유의 높은 원소 저항력을 가지고 있는 사이클롭스에게는 그리 치명적이지 못했다.
물론 그게 끝이었다면 말이다.
쩌엉! 콰릉!
요한이 뇌전의 마스터 오러가 압축된 두 주먹을 부딪치자 강력한 펄스가 돔 형태로 펼쳐지며 순식간에 폭발을 일으켰다.
이전에도 보여 준 적이 있었지만 그때의 펄스와는 위력이나 규모가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그리고 펄스에 노출된 사이클롭스들은 감전이 중첩되었는지 입가에 게거품을 문 채로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경직되어 있을 뿐이었다.
몸이 완전히 마비된 사이클롭스들의 뚝배기를 깨부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열댓 개의 기사단 전력과 맞먹는 사이클롭스 무리는 순식간에 대가리가 박살이 나며 최후를 맞이했다.
“세상에…….”
블랑카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요한이 뛰어내리고 나서 화이트가 속도를 줄인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화이트가 요한의 앞에 도착하고 보니 이미 사이클롭스들은 전멸해 있었던 것이다.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죄송한데 혹시 ‘신’이세요?”
“그걸 눈치챘으면 당장 내려와서 무릎 꿇어야 되는 거 아니냐?”
“지, 진짜로요?”
“진짜겠냐? 뻘소리 하지 말고 가자.”
파지직! 휘우웅!
요한은 화이트와 함께 나란히 달리면서 덮쳐오는 몬스터 무리를 간단히 처리했다. 물론 요한의 입장에서야 간단히 처리했다곤 하지만 지켜보는 블랑카 입장에서는 아니었다.
콰르릉! 콰콰쾅! 파지직…… 번쩍!
뇌성벽력이 몰아치고 섬광이 번쩍거리면서 요한하게 천둥이 터져 나오는데 그걸 인간의 싸움이라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
“아니, 그렇다고 쫓아갈 필요는…….”
이제는 도망치는 몬스터들까지 쫓아가 학살하는 요한 덕분에 블랑카는 안전하게 루지나 초원을 벗어날 수 있었다.
* * *
“와…….”
루지나 초원의 북쪽 끝자락에 도착한 블랑카는 입을 벌리고 눈앞의 광경을 쳐다보았다.
“입 다물어라. 침 떨어진다.”
“알파 경은 이걸 보고도 입이 다물어집니까? 무슨 세상 끝의 경계선도 아니고…….”
“세상 끝의 경계선이라…… 그럴듯하네.”
요한은 피식 웃으며 오랜만에 블랑카의 말에 공감했다. 지금 두 사람이 보고 있는 것. 그것은 엘븐 글로리아를 수호하는 장성이었다.
말이 장성이지, 그냥 인공적으로 만든 산맥이나 다름없었다. 높이 100미터에 달하는 장성은 고개를 들어도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매끈하고 단단한 벽은 갈고리를 걸 수도 없고, 박을 수도 없어서 기어 올라간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숲의 요람. 인간들과 아인종의 영역을 구분하는 경계선이라고 들었는데 제작은 드워프들이 했다지. 엘븐 글로리아보다 더 지난 북쪽이 드워프들의 영토거든. 아무튼 무너지지 않은 멀쩡한 장성은 나도 처음 보네.”
“네? 이게 언제 무너졌다고요? 아니, 이런 걸 무너트린다는 게 가능은 한 겁니까?”
“그 불가능해 보이는 걸 간단하게 해 버리더라고. 그 악마들은…….”
그 악마들 속에 한 때 자신도 속해 있었고 자신 또한 그들과 같은 악마였다는 사실에 요한은 자조 섞인 비소를 띠었다.
요한과 블랑카는 화이트를 타고 입구를 찾기 위해 장성을 쭉 내달렸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슉!
“응? 헉!”
블랑카는 살벌한 바람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기함을 삼켰다. 자신의 머리 수 센티미터 앞에서 날카로운 화살촉이 스산하게 번뜩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요한이 화살을 잡아 주지 않았다면 블랑카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반대로 가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아무래도 제대로 도착한 것 같네.”
“으아아아악!”
블랑카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누구라도 머리 위로 화살이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걸 직접 목격한다면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요한은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화이트를 불렀다.
“화이트.”
“예, 마스터.”
“돌파한다.”
화이트는 대답 대신 스피드를 더 끌어 올렸다. 지금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속의 스피드를…….
마치 꼬리에 꼬리를 물듯이 화살은 아슬아슬하게 그들의 뒤로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엘프들의 화살로도 화이트의 속도를 따라잡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녀석들이 예측해서 앞을 겨눠 조준하면 그보다 더 빠르게 돌파하였으니까.
게다가 설령 명중하더라도 요한이 즉각 쳐 냈으니 결국 그들이 성문에 도착하는 건 필연이었으리라.
“잠깐!”
성문 앞에 도착한 요한이 마나를 담아 우렁차게 소리쳤다. 그의 말은 나노 크리에이터를 통해 엘프어로 번역되어 엘프들에게 전해졌다.
“나는 알파라고 한다! 먼저 그대들의 적이 아님을 밝히는 바! 그 증거로 엘라임의 수호자, 하이 엘프 루비리드의 추천장을 가지고 왔다! 믿기 힘들다면 와서 직접 확인해 보길 바란다!”
요한의 자기소개에 엘프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알파? 그러고 보니 엘라임의 동포들을 구해 준 인간의 이름도 그와 비슷하지 않나요?”
“하지만 그자는 뇌전의 마나를 쓰는 아바타라고……. 잠깐, 그러고 보니 방금 초원에서 마른하늘에 벼락이 치던 게 설마?”
“아무래도 직접 가서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군.”
철컥, 철컥!
그 순간, 벽 한쪽에서 기계 장치가 조작되는 소리가 들리더니 매끄러운 벽이 양쪽으로 열리며 상상도 못 했던 출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입구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드워프제 무구로 완벽히 무장한 엘프 전사들이었다.
“요람의 수비대장인 프렌들이라 하오. 귀공이 엘라임의 동포를 구해 주었다는 아바타가 맞는지 확인하러 왔소.”
“내가 백 마디 하는 것보다 이게 더 빠르겠지.”
요한은 품속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프렌들에게 던져 주었다.
두루마리를 펼쳐 내용을 확인한 프렌들은 그것이 루비리드의 친필 서한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요한에게 돌려주었다.
“하면 방금 초원에서 번개가 내리치던 이상 현상도…….”
“쉽게 찾아올 수 있는 곳은 아니더라고, 여기가.”
서신을 품속에 갈무리한 요한은 손바닥 위로 뇌전을 살짝 방전하였다. 뇌전의 마나야말로 아바타를 증명하는 무엇보다 확실한 증표였으니까.
“그렇구려. 미안하오. 자칫 잘못하면 은인들을 우리 손으로 해할 뻔했소.”
“상관없어. 너희들의 사정을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내가 또 속 좁은 사람은 아니거든.”
“고맙소. 하면 이제부터 당신을 인간이 아니라 우리 동포들의 은인이라 생각하고 대접하겠소. 우리 엘븐 글로리아를 찾아온 귀인을 진심으로 환영하오.”
프렌들이 엘프의 예법으로 요한을 맞이하자 뒤따른 병사들도 그를 환대해 주었다.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