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69화 (69/150)

69. 릴리안의 고민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죽여 버릴 거라고.”

“이상하군. 내가 알기로 너는 인간과 아인종의 구분 없이 노예를 해방하는 걸로 유명해진 녀석인데 말이야. 이 정도로 인간을 증오하는 녀석이 인간 노예는 왜 해방시켜 준 거지?”

“착각하지 마. 그걸 구분해서 해방시켜 줄 만큼 여유가 없었을 뿐이니까. 너희 인간 놈들은 똑같아. 선한 척, 착한 척, 지금의 너처럼 가면을 쓰고 있지만 결국 본심은 욕망과 탐욕뿐이지. 언제나 그랬어.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네가 상대했던 자들이 그런 자들뿐이었겠지. 수많은 단풍나무가 있어도 네가 보는 게 죽은 나무뿐이라면 그 숲은 너에게 죽은 숲으로 보이는 것처럼 말이야. 아니면 네가 그런 부분만 보고 싶어 할 수도 있고. 너에게 있어 인간은 언제나 악한 존재여야지만 스스로 죄책감을 갖지 않고 싸울 수 있을 테니까.”

편견으로 치우친 사상은 왜곡된 진실을 낳는다. 그들은 본질의 단면만 보고 본질을 곡해하며 자신들의 주장과 다른 주장을 거짓과 날조일 뿐이라고 선동한다.

심지어 그 편견마저 틀릴 경우엔 존재하지 않는 허상을 진짜라 믿으며 편견으로 가득 찬 사상을 믿고 추종한다.

인간도 엘프도 자신들이 정의며 상대가 악이길 바라는 마음은 똑같았기 때문이다.

“닥쳐! 너 같은 위선자가 뭘 안다고……!”

“맞아. 나도 몰랐어. 처음에는 너처럼 아인종들은 모두 더러운 죄인이라고만 생각했거든. 하지만 딱 한 걸음만 물러서서 바라보니까 그게 아니더라고. 너는 나 같은 위선자보다 대단한 하이 엘프 공주님이니까 나보다 더 쉽게 그 한 걸음을 물러설 수 있지 않을까?”

으득……!

그녀는 요한을 씹어 먹을 기세로 노려보다가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대로 회의장을 나가 버렸다.

“죄송합니다. 저 아이 대신 사과드릴게요. 바깥 세상에 너무 오래 있다 보니 인간들에게 진절머리가 난 모양이에요. 결코 알파 경에게 원한이 있어서 저러는 건 아니니 이해해 주세요.”

“이해합니다. 저도 가끔은 저와 같은 종족임에도 인간의 욕심에 진절머리가 나니까요. 물론 저 역시 그 욕심 때문에 이곳을 찾은 거지만요.”

“고대 유적 때문이라면 저희는 신경 쓰지 마세요. 애초에 저희의 것도 아니었을 뿐더러 성소라는 것도 허울뿐인 저희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는 장소니까요. 애초에 저희는 들어갈 수도 없고요.”

엘프들에게 세계수나 정령수보다 소중한 건 없다. 심지어 출입조차 불가능한 고대 유적은 그곳에 존재할 뿐인 옛 유적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릴리안 공의 태도를 보니 전혀 허울뿐인 성소는 아닌 것 같던데…….”

“저 아이는 그냥 알파 경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아요. 죄송해요. 저 아이는 저를 비롯해서 동포들 중에 그 누구도 말릴 수가 없어요. 다른 게 아니라 저 아이보다 강한 전사는 없거든요.”

“알겠습니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하죠.”

대 회의장을 떠난 요한은 블랑카과 화이트가 기다리고 있던 숙소로 돌아왔다.

“얘기는 끝나신 겁니까?”

“어.”

“그럼 또 바빠지시겠네요?”

“그렇겠지. 근데 넌 왜 남 일처럼 말하냐?”

요한의 질문에 블랑카가 어깨를 으쓱이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저번에 보니까 입고 계신 그 나노 뭐시긴가 하는 유물께서 저보다 성능이 더 좋더구먼요. 그러니까 저는 여기서 알파 경의 무사 귀환을 기도하도록…….”

“지랄 말고 대기해라. 거기는 마도 문명 시대가 아니라 그보다 더 오래된 유적이라서 나노도 큰 도움이 안 되니까.”

“마도 문명 시대보다 더 오래된 유적이라고요? 그럼 도대체 언젯적 유적이란 건데요?”

경악하는 블랑카에게 요한은 씨익 웃으며 한마디로 대답했다.

“신마(神魔) 시대.”

* * *

“이곳입…… 릴리안 님?”

감시 겸 동행한 엘프의 안내로 유적지를 찾아간 요한은 예상했던 대로 유적의 입구 앞에는 릴리안이 수문장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곳에서 죽일 듯이 요한을 째려보는 모습에 동행인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둥지둥했다. 그에 요한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동행인의 어깨를 토닥였다.

“멀리 떨어져 계세요. 여기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하,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누구도 다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오히려 여기 계시면 당신이 크게 다칠 수도 있어요. 그러니 제 말대로 해 주세요.”

요한의 부탁에 안내인은 하는 수 없이 멀찍이 도망쳤다. 그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릴리안이 활을 빼어 들며 요한에게 말을 씹어 뱉었다.

“어쩌지? 나는 너를 곱게 보내 줄 생각이 전혀 없는데.”

“이 싸움은 노 대미지로 끝날 거야. 미안하지만 네가 전력을 다 하더라도 결과가 바뀌진 않아.”

“개소리 집어치워!”

퓽!

릴리안의 활에서 한 줄기 질풍이 무서운 속도로 요한을 향해 쇄도했다.

그녀가 화살을 시위에 거는 모습도 보지 못했는데 어느새 화살은 요한의 코앞까지 가까워져 있었다.

하지만…….

턱.

요한은 보란 듯이 릴리안이 쏜 화살을 한 손으로 낚아챘다. 릴리안은 속으로 요한의 행동을 비웃었다. 화살을 한 손으로 낚아챈 건 확실히 대단하지만 그건 최악의 실수였기 때문이다.

‘차라리 화살을 피했어야 했어. 그 오만이 네 손을 뺏어 갈 거다, 인간!’

그녀의 확신을 현실로 만들려는 듯, 그녀의 화살에 압축된 바람의 마나가 날카롭게 폭발했다. 그것은 마치 압축된 명도 수십 자루가 한꺼번에 튀어나와 손을 베어 버리는 듯 보였다.

‘확실히…… 죠나단 같은 놈이랑은 차원이 다른 위력이네. 맨손이었다면 뇌전의 마나로 무장했어도 위험했겠어.’

아무것도 없는 요한이라면 뇌전의 마나만으로 이 공격을 무사히 막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손일 잃지는 않더라도 엄청난 대미지는 피할 수 없었을 터.

하지만 그의 손을 보호하고 있는 건 비단 뇌전의 마나뿐만이 아니었다.

카카카카칵!

“……!”

릴리안의 눈이 커졌다. 마치 톱으로 쇠를 켜는 듯한 소름 돋는 소성이 이어진 직후에도 요한의 손은 멀쩡했기 때문이다.

“설마 이 정도로 큰소리친 건 아닐 테고…….”

“…….”

요한의 도발에 뿔 난 황소처럼 달려들 줄 알았던 릴리안의 표정이 대번에 차가워졌다. 오히려 열이 받을수록 냉정해지는 타입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점이 그녀가 가진 진짜 무서운 점이었다.

콰우우우우!

이번에는 두 발의 화살이 요한을 노리고 쇄도했다.

그런데 방금 전과 달리 회오리가 휘감은 화살의 위력은 더욱 강해져 있었고, 직선이 아닌 곡선을 그리며 마치 뱀처럼 요한을 노렸다.

‘이건 좀 빡세겠는데?’

파지직, 콰릉!

어느새 요한의 두 손에 무장된 뇌전의 퍼펙트 오러가 벽력을 터트리며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요한은 날아오는 화살들을 향해 두 주먹을 힘껏 휘둘렀다.

콰앙! 콰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폭발이 일어나며 돌풍을 동반한 뇌전이 사방에 휘몰아쳤다. 어지간한 기사들조차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 휘말려 목숨이 위험할 정도의 충격파였다.

한데 그런 공격들이 릴리안의 손에서 쉬지 않고 쏟아져 나왔다.

‘아무리 바람의 마나가 원소의 마나 중에서 위력 대비 마나 소모가 가장 적은 마나라고는 하지만 이 정도로 무식한 기술을 펑펑 쏴 댈 정도는 아닌데 말이야…….’

과연이라고 해야 할까? 역시 릴리안은 괴물이 맞았다.

상대가 요한이었으니 이렇게 간단히 막아 내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오러 마스터라도 진즉에 결판이 났을 터였다.

그렇기 때문에 릴리안의 경악은 극에 달했다.

상대가 오러 마스터였더라도 진즉에 결판이 났을 공세를 퍼부었는데 상대는 그 자리에 서서 고작 두 주먹만으로 자신의 공격들을 모조리 막아 냈기 때문이다.

‘괴물……!’

릴리안의 적들이 느꼈을 그 심정을, 이번에는 릴리안 자신이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럼 이건 어때?’

고오오오오오……!

그 순간, 릴리안이 당긴 화살촉에 거대한 폭풍이 압축되기 시작했다. 자신의 남은 마나를 전부 쏟아부어 만든 압축 폭풍이다.

압축된 폭풍이 폭발하면서 터져 나올 위력은 반경 수십 미터 이내에 모든 것을 날려 버릴 수 있을 터였다.

“이거나 먹어라!”

콰우우우우우우!

준비를 마친 릴리안이 시위를 놓는 순간, 폭풍을 머금은 화살이 굉음과 함께 요한을 향해서 쇄도하기 시작했다.

“하아, 어쩔 수 없구먼…….”

요한은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더니 손을 펼쳤다. 그러자 그의 손에 나노 크리에이터가 모여들며 한 자루의 활을 형성하였다.

요한은 방금 전에 릴리안이 선물한 화살 한 발을 시위에 걸어 당겼다. 그러고는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폭풍의 화살을 향해서 시위를 가볍게 놓자…….

번쩍! 콰르릉! 콰쾅!

“……!”

파지직…….

부릅뜬 릴리안의 두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간 섬광은 지금도 허공에 남아서 전류를 방전하고 있었다.

자신이 날린 폭풍의 화살은 이미 섬광에 소멸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만약 섬광의 궤적이 조금만 더 옆으로 틀어졌더라면 흩날리는 것은 머리카락이 아니라 뇌수였을 거라는 걸 그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털썩…….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인지 자리에 주저앉아 넋이 나간 그녀에게 요한이 다가왔다.

“내가 말했지, 네가 아무리 노력해 봤자 결과가 변할 일은 없을 거라고.”

“너…….”

“하나만 물어보자. 너, 자신이랑 비슷한 실력을 가진 적과 싸워 본 적 없지?”

“……!”

릴리안의 표정을 확인한 요한이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아무래도 정곡을 찌른 모양이네. 시작은 좋은데 전투가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 금방 조바심을 내서 밑천을 드러내는 녀석들의 특징이거든, 그게. 그 부분에 관해서는 보완해 두는 게 좋은 거야. 아니면 너보다 강한 녀석을 만났을 때 생각한 것 이상으로 허무하게 죽을 테니까.”

“……도망치고 싶지 않았어.”

“뭐?”

“나라고 도망치고 싶어서 도망친 게 아니라고! 조금만 위험한 적이 나타나도 동료들은 나를 피신시키기에 급급했어. 내가 쓰러트려야만 하는 적이라고 고집을 부리면 오히려 내 목숨을 지키려고 더 많은 동료들이 자신을 희생할 뿐이었다고! 그런데 나더러 뭘 어쩌라는 거야!”

“…….”

결국 서럽게 흐르는 눈물을 애써 닦아 내는 그녀였지만 그럴수록 눈물은 눈치 없이 터져 나올 뿐이었다.

요한은 그런 릴리안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엘프 여왕의 딸, 고귀한 하이 엘프, 엘프족 최강의 전사…….

엘프 전사들이 그녀를 떠받들고 과보호하려는 이유는 충분히 이해했다.

요한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며 과거를 회상했다.

‘그때 내가 싸웠던 이 녀석은 아이러니하게도 엘프들이 궁지에 몰려 더 이상 이 녀석을 보호할 전력이 남아 있지 않을 때였지. 목숨을 걸고 수많은 전장을 누비며 자신보다 강한 적들과 숱한 사선을 넘나든 후에야 비로소 완성되었다는 건가.’

그리고 완성된 릴리안의 저력은 그야말로 괴물이었다. 그건 싸워 본 요한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인정하는 바였다.

“나도 엘라임을 돕고 싶었어. 그곳에서 고통받는 우리 동포들을 내 손으로 구해 주고 싶었다고. 하지만 장로들은 내가 엘라임에 가는 걸 결사반대했어. 아니, 내가 노예로 붙잡힌 동포들을 구출하는 것조차 그들은 못마땅하게 생각해. 내가 엘프 여왕의 딸이니까. 다음 세대의 숲의 여왕이 돼야 할 사람이니까…….”

“그래서 난 이 어린애 투정을 언제까지 들어 줘야 하는 거지?”

“뭐, 뭐라고? 어린애 투정?”

놀람과 분노가 섞인 릴리안의 시선을 가볍게 받아 흘리며 요한은 한숨을 쉬었다.

“하아…… 이것 봐, 공주님.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고, 노력하긴 싫은데 포기도 하기 싫다는 건 그냥 어린애 투정이야. 엘프 여왕 자리를 물려받고 싶으면 지금의 힘을 포기해. 동포들을 구출하고 싶으면 여왕의 딸을 포기하고.”

“…….”

“동료들이 너를 위해 희생하는데 뭘 어떡하느냐고? 착각하지 마. 그들에게 넌 같은 전사가 아니라 지켜야 할 공주라는 걸. 진짜 강해지고 싶으면…… 정말로 동포들을 구하고 싶으면, 일단 네가 가지고 있는 모든 걸 내려놔. 그걸 할 자신이 없으면 그냥 공주님으로 살아.”

요한은 릴리안의 얼굴을 살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눈물을 꾹 누르며 참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아하니 자기 자신도 이미 답을 알고 있었던 모양인 것 같았다.

요한은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가볍게 어깨를 다독였다.

“다만 두 가지 모두 포기할 수 없다면 지금보다 훨씬 강해지면 돼. 더 이상 그들이 너를 걱정하지 않으면서 네 등을 믿고 따를 수 있을 만큼 강해져. 물론 그건 지금 하는 노력보다 차원이 다를 만큼 힘들고 고통스럽겠지만. 선택은 네 몫이다. 책임도 네 몫이고.”

“…….”

그 말을 모두 들은 릴리안은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숲속으로 사라질 뿐이었다.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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