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유물의 수호자
“그러니까 여기가 진짜 신마 시대의 고대 문명 유적이라는 거죠?”
“그렇다고는 들었는데…….”
“…….”
블랑카는 요한을 힐끔 쳐다보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지금 두 사람의 눈앞에는 그들의 목적인 신마 시대의 유물이 담긴 상자가 존재했는데, 이곳까지 오면서 함정이나 장치 같은 게 발동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새끼는 안전하게 와도 지랄이야. 왜? 지금이라도 스펙타클하게 만들어 줄까?”
“에이,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보아하니 이곳은 유물을 지키기 위한 던전보다 유물을 받들기 위한 신전 같은데 말이죠. 그런데 엘프들은 왜 이곳을 한 번도 들어 와 보지 않은 걸까요?”
“굳이 문이 굳게 잠겨 있는 태고의 신전을 억지로 비집고 침범할 필요성을 못 느꼈던 거겠지. 인간이었으면 진즉에 발굴됐겠지만.”
그렇게 상자로 다가간 요한이 상자에 손을 뻗는 순간.
“자, 잠깐만요!”
“왜?”
“그, 그, 그 상자를 열지 마세요! 이런 건 느껴 본 적도…….”
털썩…….
사시나무처럼 몸을 벌벌 떨던 블랑카가 눈을 까뒤집더니 돌연 게거품을 물며 자리에 쓰러졌다.
요한은 녀석의 반응을 보고 이 신전이 어떤 의미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아…… 그런 건가?’
요한은 진지한 얼굴로 화이트에게 명령했다.
“화이트, 너는 저 녀석을 데리고 최대한 멀리 피신해 있어. 아무래도 상당히 위험한 걸 건드릴 모양이거든, 내가.”
“예, 마스터.”
블랑카는 화이트를 물어 등 위로 던져 올리더니 빠르게 신전 밖으로 빠져 나갔다.
‘자, 그럼…….’
그 모습을 확인한 요한은 마나를 잔뜩 끌어 올리며 조심스럽게 상자를 개봉하였다.
그 순간!
쿠구구구구구궁……!
엄청난 지진이 신전을 습격했다.
도저히 두 발로 서 있기 힘든 강한 진동에 찢겨진 벽과 천장에서는 먼지와 바위가 떨어져 내리고 바닥에는 거미줄 같은 균열이 넝쿨처럼 신전을 잠식했다.
그와 동시에 신전의 바닥이 무너져 내리며 그 밑에서 거대하고 길쭉한 몸통을 가진 황금빛의 무언가가 솟구쳐 올라오기 시작했다.
거대한 기둥이라고 보기엔 너무 유연한 그것은 하나하나가 어른 손바닥만 한 비늘을 가진 황금의 뱀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신전은 지하 깊은 곳까지 무너져 내렸고, 보호막이 형성된 상자는 두둥실 떠오르더니 뱀이 그대로 꿀꺽 삼켜 버리는 게 아니겠는가?
-하찮은 도둑이여, 허락받지 못한 탐욕의 대가를 치를 지어다!
인간 이상의 지성을 가진 것인지 황금 뱀은 날카롭게 찢어진 눈동자로 요한을 내려다보며 탐욕의 대가를 언급했다.
“함정 같은 걸 만들지 않은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나.”
함정이 존재하지 않았던 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무사히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신의 자비였을 터.
하지만 그 자비를 무시하고 욕심을 택한 순간, 신의 사자가 등장하여 자비 없이 신의 심판을 행사하는 것이다.
파지직, 파직!
그 순간, 요한의 몸에서 피어오른 뇌전의 마나를 보고 황금 뱀이 가느다란 눈동자를 더욱 좁히며 흥미롭다는 듯이 얘기했다.
-호오…… 억겁의 세월 만에 나를 깨운 좀도둑이 설마 유피테르의 환생이었을 줄이야. 이것도 위대한 뜻의 의지인가.
“유피테르의 환생? 위대한 뜻? 뭔 헛소리를 씨부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말 할 때 내 물건 내놔라.”
-네 물건?
“네가 꿀꺽한 내 보물 말이야. 당장 토해 내라고, 좋은 말로 할 때.”
요한의 협박에 황금 뱀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간 듯 보이는 건 기분 탓이었을까?
-아무래도 이번 환생자는 예절 교육이 좀 필요해 보이는군. 일단 그 버르장머리부터 고쳐 주도록 하마. 그것도 살아 있을 때 얘기지만.
“해 볼 수 있으면 해 보든가.”
콰릉!
천둥을 터트리며 요한이 무서운 속도로 황금 뱀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전류를 방전하며 빛살처럼 질주하는 요한의 움직임은 이미 눈으로 인지할 수 있는 범위를 아득히 초월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상대는 동체만 수백 미터에 달하고 굵기만 십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뱀.
순식간에 접근에 성공한 요한의 주먹은 녀석의 황금빛 비늘을 후려 갈…….
후웅……!
‘……이런 미친!’
사라졌다.
그 거대한 동체가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아니, 사라졌다고 착각할 만큼 녀석의 움직임이 빨랐을 뿐이다.
뇌전의 마나를 각성하고 나서 누군가의 움직임을 놓쳐 본 적도, 하물며 자신보다 빠른 상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는…….
그러나 놀라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어느새 녀석의 머리가 요한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쇄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콰아앙!
요한의 몸뚱이가 황금 뱀의 머리와 충돌하는 순간, 공기의 벽이 부서지는 충격파와 함께 음속으로 날아간 요한의 몸뚱이가 거칠게 숲을 나뒹굴었다.
콰콰콰콰콰!
수십 미터에 이르는 먼지 구름, 수백 미터에 달하는 고랑, 수수깡처럼 부러져 나뒹구는 나무들…….
그 잔해만 봐도 충격의 강도를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야야…….”
요한은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뇌전의 마나로 나노와 신체를 최대치까지 강화하지 않았으면 몸뚱이가 개박살 났겠어. 도대체 저 괴물은 뭐지?’
그때였다.
“알파 경!”
황금 뱀의 등장에 놀란 엘프 전사들이 무리 지어 요한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요한은 그들을 향해 손을 뻗어 그들의 접근을 제지했다.
“소란 일으켜서 미안해요. 나는 괜찮으니까 더 이상 접근하지 말고 후퇴하세요. 이건 당부가 아니라 명령입니다.”
“너 미쳤어? 저런 괴물을 우리 숲에서 깨워 놓고 우리더러 물러나라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러자 전사들과 함께 돌아온 릴리안이 요한을 향해 소리쳤다.
“말했잖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입에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고. 나라고 저런 괴물이 숨어 있을 줄 알았냐?”
요한은 황금 뱀을 가리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다행히 황금 뱀은 그 자리에서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도 같이 싸워! 더 이상 저 괴물이 우리 숲을 파괴하게 놔둘 수는 없을 테니까. 저 괴물을 깨운 네 녀석의 책임은 그때 물을 테니까 두고 봐.”
“하여간 고집하고는……. 잠시 이것 좀 빌립시다.”
요한은 고개를 젓더니 곁에 있던 엘프 전사의 활과 화살 통을 뺏어 들었다.
“공주님! 안 됩니다! 어서 물러나십쇼!”
전사들이 그녀를 말리려는 순간, 요한과 릴리안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황금 뱀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압!”
콰우우우우!
퓽.
파지직, 콰릉!
누가 지시한 것도 아닌데 본능적으로 양 옆으로 돌아간 두 사람이 자신들의 마나를 화살에 담아 황금 뱀을 향해 쏘았다.
그러자 폭풍의 화살과 번개의 화살이 긴 꼬리를 그리며 황금 뱀을 위협했다.
하지만…….
휘익, 휘익.
“뭐, 뭐야 저 움직임은? 저 덩치에 저건 반칙이잖아!”
릴리안이 경악에 차 소리 지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황금 뱀의 몸이 부드럽게 움직이자 순식간에 두 발의 화살을 피해 내며 역습까지 시도했기 때문이다.
후웅!
‘피해야……!’
자신을 덮쳐 오는 거대한 꼬리에 이를 악 물며 몸을 날렸지만 녀석의 꼬리를 피하기엔 속도가 너무 느렸다.
‘틀렸어! 당한…….’
콰아앙!
엄청난 폭음이 들리고 강한 충격과 함께 릴리안이 땅에 처박히는 순간, 그녀는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몸이 부서졌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자신의 몸은 의외로 멀쩡한 편이었다.
그녀는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너……!”
“몸은 괜찮냐?”
“미, 미안…….”
자리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요한을 보고 릴리안은 죄책감을 느꼈다. 자신이 괜히 끼어든 바람에 요한이 자신을 지켜 주느라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말했잖아. 미안한 사람은 나라고. 인간인 내가 못 미덥고 불안한 건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래도 믿고 맡겨. 저 녀석은 반드시 내 손으로 쓰러트릴 테니까.”
“…….”
요한의 등을 바라보던 릴리안은 알 수 없는 안도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평범한 방법으로 저 녀석을 쓰러트리는 건 힘들 것 같고, 아무래도 그 방법밖에는 없겠지?’
-왜 그러지? 벌써 포기하는 건가? 유피테르의 환생이여.
“거 유피테르의 환생이란 소리 좀 작작하지. 내 이름은 따로 있거든? 그리고 포기한 것도 아니고 끝난 것도 아니다. 먼저 그 잘난 척하는 면상에서 웃음기를 싹 지워 버려 줄게.”
파지직, 콰릉! 콰르릉!
그 순간, 요한의 몸에서 어마어마한 전류가 방전되더니 그의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은빛으로 물들었다.
‘저건 뭐야? 갑자기 사람이 달라진 듯한…….’
아니, 달라진 것은 머리카락뿐만이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흐르는 분위기가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아니, 저건 사람이 아니라 무슨…….’
지켜보던 릴리안은 비슷한 비유를 찾아다가 머릿속을 스쳐 지가는 무언가에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돌이나 강물 같은 미생물이 주는 그런 무감각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슉.
순간, 요한의 신형이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쩌엉! 파지직, 콰릉!
지금까지 한 번도 스치지 못했던 요한의 주먹이 이번에는 제대로 황금 뱀의 몸뚱이를 파고들었다.
-크윽!
황금 뱀은 눈을 부릅뜨며 반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슉.
요한의 모습이 다시 한번 사라지며 녀석의 꼬리는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고, 또 한 번 요한의 주먹이 녀석의 전신을 난타했다.
그것은 그야말로 전광석화와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이상했다. 딱히 속도가 더 빨라진 것도 아닌데 황금 뱀은 이전과 다르게 전혀 대응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 그 이유가 있었다.
‘놈! 분위기가 변했다 싶더니 갑자기 마음을 읽을 수 없게 되었다. 이 모습은 흡사…….’
황금 뱀은 눈매를 좁히며 미소를 머금었다. 마음이 없는 전투 병기. 오로지 파괴만을 위해 움직이는 번개의 화신.
이 모습이야말로 뇌신(雷神) 유피테르에 가장 가까운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영 글러먹은 놈인 줄 알았더니 싹수가 보이는 녀석이었군. 좋다. 인정하마. 네놈이 내가 찾던 유피테르의 그릇이었다는걸.’
자신이 본모습으로 돌아가면 유피테르의 형상을 이제 겨우 모사하기 시작한 요한을 쓰러트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황금 뱀이 겨우 찾은 그릇을 자기 손으로 깨트리는 짓을 할 리가 없었다.
콰우우우우!
그 순간, 황금 뱀이 포효했다. 천지를 뒤흔드는 충격파에 땅이 흔들리고 나무들이 쓰러지며 구름이 걷혔다.
열심히 공세를 가하던 요한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충격파를 방어했다. 그렇게 포효가 끝나자 요한도 이성을 되찾았는지 머리를 감싸 쥐며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젠장, 위험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났으면 영영 돌아오지 못할 뻔했어. 하여간 이건 효과는 확실한데 위험부담이 너무 큰 게 문제라니까. 그런데 설마 저 녀석이 일부러 날 깨워 준 건 아니겠지?’
그렇게 요한의 의아한 눈빛으로 황금 뱀을 올려다보자 녀석이 요한과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이쯤하면 되었다. 너는 네 그릇을 충분히 증명하였고 나는 그것을 인정했다.
“뭔 그릇? 좀 알 수 있게 얘기 좀 해 주지?”
황금 뱀은 요한이 원하던 대답 대신 자신이 삼켰던 유물을 토해 내며 동문서답했다.
-네 의문은 완벽한 그릇으로 성장하게 되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다가올 어둠이 세상을 덮치는 그날까지 다시 잠들어 있겠다.
녀석은 자기 할 말을 마치자마자 자신이 나왔던 지하로 돌아갔다. 그리고 무저갱처럼 뻥 뚫려 있던 구멍은 거짓말처럼 평평한 대지로 돌아왔다.
“아니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만 하다 돌아가냐. 어이없는 녀석일세…….”
요한은 피식 웃으며 녀석이 남기고 간 상자를 향해 다가갔다. 사실 요한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녀석에겐 여유가 있었고 그 이상의 감춰진 무언가가 있었을 거라고. 만약 녀석이 진심으로 싸웠다면 자신이라고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거란 보장은 없었다.
그렇게 상자를 집어 들려던 순간, 싸늘한 생각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잠깐, 나는 그릇인지 뭔지라고 해서 봐줬다 치자. 그럼 헥토르는? 분명 녀석은 상자를 얻었고 그러려면 저 뱀과 싸워야 하잖아? 근데 결과적으로 녀석은 유물을 손에 넣었지. 그럼 뭐야? 헥토르 그 녀석은 설마 저 괴물을…….’
순간, 요한의 이마에서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 상자 위로 떨어졌다.
헥토르가 가장 처음 손에 넣은 유물이 바로 이것이었다. 즉, 녀석은 어떤 유물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황금 뱀을 쓰러트렸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때 녀석이 가지고 있던 힘이라면 마자현과 암흑의 마나뿐이었을 텐데…….’
회귀 전의 자신은 안타깝게도 헥토르를 지키는 수많은 병사들과 원소의 마나를 다루는 강자들, 그리고 마자현에게 가로막혀 헥토르의 코앞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즉, 녀석과 직접 싸워 본 적도 없고 녀석이 가진 암흑의 마나가 어떤 능력인지 모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뇌전의 마나를 각성하면 1 : 1로는 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황금 뱀과 싸우면서 그 희망이 조금 작아진 느낌이었다.
‘진짜 징그럽구나, 헥토르. 너란 자식은…….’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