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72화 (72/150)

72. 불과 얼음의 땅

“이건……!”

“오오……! 어디서 이것을……!”

엘프 장로들은 요한이 등에 메고 있던 활을 보고 눈을 번뜩이며 경외를 금치 못했다. 요한은 등에서 활을 풀어 들더니 데메테리안에게 물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평범한 활은 아닌 것 같았는데, 혹시 알고 계시는 물건입니까?”

“가지고 계신 활의 이름은 실피드라고 해요. 초대 하이 엘프의 여왕께서 바람의 정령왕께 우호의 증표로 받은 선물이죠. 해서 활의 이름도 그분의 이름을 따서 붙인 거고요. 저희 엘프들에게는 국보나 다름없는 물건이죠.”

“그런 게 어쩌다 연못에…….”

“트리스탄 제국의 습격 이후로 유실되었어요. 전승에 따르면 그 활은 막강한 힘을 품고 있지만 자격을 갖춘 자가 아니면 제대로 된 힘을 끌어낼 수 없는 활이거든요. 그래서 당시 실피드를 관리하고 있던 선조가 비밀리에 활을 숨겼고, 그대로 제국군에게 당해서 활의 행방은 아무도 알 수 없게 되었죠.”

요한은 활을 한 번 내려다보더니 데메테리안에게 건넸다.

“그렇군요. 아쉽네요. 주인이 눈앞에 버젓이 있는데 가져가기에는 제 양심이 좀 그래서요.”

요한이 활을 돌려주자 데메테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실피드는 돌려받지 않겠습니다.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숱하게 찾아 헤매도 찾지 못했던 그것을 알파 경은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찾아내셨죠. 저는 그 이유가 반드시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뭔가 착각한 거 아닐까요? 확실히 말씀하신 것처럼 이 활에서 대단한 잠재력이 느껴지긴 하지만 제가 주인은 아닌 것 같아서요.”

솔직히 말해서 요한이 순순히 활을 넘겨줄 수 있었던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요한도 인간인데 왜 보물을 보고 욕심이 나지 않겠는가? 그것도 심지어 발견한 보물이 자신의 주 병기인 활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활에서 느껴지는 강대한 기운이 자신을 거부하는 것을 확인한 뒤로는 깔끔하게 활에 대한 미련을 접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알파 경이 주인이 아니라면 혹 경께서 그것의 진정한 주인에게 뜻을 이어 줄 고리 역할을 맡으신 게 아닐까요? 물론 이건 제 추측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맡아 주시기 부담스러우시다면 기꺼이 저희가 보관하도록 할게요.”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제가 좀 더 가지고 있어 보겠습니다. 실피드가 은혜를 아는 녀석이라면 제대로 된 주인을 찾아 줬을 때 저를 위해서 힘을 빌려 줄 수도 있을 것 같고요.”

그렇게 드라이어드와 엘븐 글로리아의 국보, 실피드까지 되찾은 요한은 명실상부 엘븐 글로리아 최고의 국빈이 되었다.

그 이후에 진행되는 협상은 순조로웠다.

조건부로 동맹을 맺은 요한과 엘븐 글로리아는 서로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사건에 대해서만 힘을 모으고 그 외에는 간섭하지 않기로 합의를 본 것이다.

“그럼 살펴 가십쇼.”

엘프들의 성대한 배웅을 받으며 엘븐 글로리아를 떠난 요한과 블랑카가 더욱 북쪽으로 향해 가던 길이었다.

“잠시만요!”

“응?”

요한은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아보았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저 멀리서 뜻밖의 인물이 자신들을 쫓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릴리안?’

“저 분은 릴리안 님 아니에요?”

“맞는 것 같은데…….”

서둘러 달려온 릴리안의 모습을 보니 아무리 봐도 배웅이 목적은 아닌 듯 보였다.

“왜? 뭐 할 말이 남았어?”

“저도 같이 동행할 수 있게 허락해 주세요! 부탁드려요!”

반말에서 존댓말로 바꾼 릴리안이 고개를 숙이며 요한에게 정중히 부탁했다.

그 모습에 블랑카가 놀라서 요한과 릴리안을 번갈아 쳐다보자 요한이 등에 메고 있던 활을 가리키며 물었다.

“혹시 이것 때문이야?”

“네!”

“솔직해서 좋네. 하지만 너도 어제 시험해 봐서 알겠지만 너도 실피드의 주인은 아니었잖아.”

“맞아요. 하지만 확신이 있어요.”

“확신?”

릴리안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실피드가 저를 인정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고요. 하지만 지금 이 상태로는 불가능해요. 좀 더 많은 경험을 쌓고, 지금보다 훨씬 강해지지 않으면…….”

“마음대로 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공주 대접을 바랄 생각이라면 꿈도 꾸지 마. 밥값은 네 손으로 버는 거다. 그것만 명심해.”

“네! 그럼 이제 스승님이라고 불러도 되는 거죠?”

“스승님은 무슨…….”

피식 웃으며 요한은 앞장서 걸었다. 그렇게 요한과 블랑카, 화이트에 이어 실력 좋은 엘프 궁수를 추가한 요한 일행은 불과 얼음의 땅…… 드월븐 팩토리아로 향했다.

* * *

‘이, 이상하다? 분명 방금 전까지는 포근한 숲속이었는데…….’

덜덜덜덜덜…….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던 블랑카는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조차 불가능했다.

엘픈 글로리아를 지나 숲을 빠져나오니 메마른 목초 지대가 펼쳐졌다.

그때부터 살을 파고드는 차가운 바람이 불어 닥치기 시작하더니 조금 더 위쪽으로 올라가자 눈밭이 보이고 눈보라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세상이 달라진 것 같은 날씨의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아, 아, 아, 알파 경! 지, 진짜 이, 이 길이 맞는 겁니까?”

“이 정도로 죽는소리하지 마라. 이건 아직 문지방도 못 넘은 거니까.”

“네?”

요한의 말처럼 북쪽으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날씨는 더욱 가혹해졌다.

“헉!”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한 치 앞도 볼 수가 없었고 눈은 사람의 키 높이 이상으로 쌓여서 자칫 잘못 밟으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경우도 있었다.

“푸하아……!”

화이트는 눈밭에 파묻힌 블랑카를 입으로 물어서 꺼내 자신의 등에 태웠다.

한편, 이 혹한의 환경에서는 릴리안도 견디기 힘들었는지 눈에 띄게 힘들어 하는 것이 보였지만 요한은 그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더 북쪽으로 이동했을까?

“와, 세상에…….”

조금씩 강해지는 온기를 느끼던 블랑카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세상 모든 것을 얼려 버릴 기세로 휘몰아치는 혹한의 대지 속에서 반대로 세상 모든 것들을 살라 버릴 기세로 용암을 분출하는 화산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분화구에서 산등성이를 타고 눈밭을 흐르는 불의 강은 그야말로 절경도 이런 절경이 없을 정도였다.

“우욱……!

이 지독한 계란 썩는 듯한 냄새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다 온 것 같네.”

“네?”

요한의 한마디에 블랑카는 그가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넋을 놓고 입을 벌렸다.

“세상에…….”

철과 불꽃으로 만들어진 드워프들의 도시, 드월븐 팩토리아.

그곳은 이 근방에서 가장 거대한 화산의 중턱쯤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증명하고 있었다.

* * *

인간 두 사람이 드월븐 팩토리아에 입성하는 건 본래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다른 때 같았으면 검문이 아니라 검을 먼저 받았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함께 동행한 릴리안의 보증 덕분에 요한과 블랑카는 검문을 쉽게 패스하고 더불어 이곳 드월븐 팩토리아의 왕. 푸거와 대면할 수 있었다.

“이것 참…… 육백 년을 살았지만 이건 또 신선한 조합의 손님들이군.”

“위대한 철과 대장장이들의 왕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숲과 정령의 딸을 만나게 되어 나 역시 기쁘군. 그런데…….”

푸거의 시선이 요한과 블랑카에게 향했다.

“함께 온 인간들은 누구인가?”

릴리안은 두 사람에 대해 짧게 소개하였지만 워낙 임팩트 자체가 컸던 탓인지 푸거의 놀람도 상당했다.

“그 테메테리안이 인간과 동맹을 맺었다?”

“정확히는 인간이 아니라 알파 경과 동맹을 맺은 것입니다. 아직 인간을 완전히 신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죠.”

“그렇다고는 해도 상상 못 할 결단임은 확실하군. 반갑네. 나는 이곳을 다스리는 드워프들의 왕. 푸거 라르레리온이고 하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하. 알파라고 불러주십시오. 뵙자마자 본론을 꺼내는 것은 예의가 아닌 줄 알지만 사정이 급박하여 서둘러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의 요청에 푸거는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고 요한은 두 가지에 대해 그에게 부탁했다.

그중 아다만티움 공동에 대해 들은 푸거와 다른 드워프들의 놀람은 경악을 넘어섰다.

“뭐라? 그런 곳이 실제로 존재한단 말이더냐?”

“사실입니다. 정 의심이 가신다면 제 말이 거짓인지 참인지 릴리안 공주에게 확인을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러자 푸거와 드워프들의 시선이 릴리안에게 향했다.

그녀 역시 아다만티움이 어떤 광석인지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녀가 식은땀을 흘리는 건 그런 요한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꿰뚫어 봤기 때문이었다.

“저도 처음 듣는 얘기라 믿기 힘든 건 사실이지만 알파 경의 말은 제 눈에 사실로 비추어졌습니다.”

“허 참…….”

릴리안의 말을 푸거는 의심하지 않았다.

진실을 꿰뚫어 보는 존재들답게 하이 엘프들은 거짓을 입에 담는 순간, 진실의 눈을 상실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전하께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들어 보지.”

“드월븐 팩토리아에 아다만티움 공동의 채굴권을 독점 계약을 하는 대신 제 군사들과 제 동료들의 무장을 이곳에서 책임져 주십시오.”

이미 예상했던 요한의 요구에 푸거는 팔걸이에 턱을 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건 우리가 손해를 보는 조건 같은데? 어차피 아다만티움의 채굴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지. 우리밖에 할 수 없는 일을 마치 선심이라도 쓰는 양 우리에게 독점권을 준다고 해서 우리를 노예처럼 부려먹겠다는 발상은 너무 안일하지 않은가?”

푸거의 말은 정론이었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그렇죠. 아다만티움을 채굴하고, 그것을 주조하기 위해서는 마나가 고농축으로 포함된 초고온의 불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런 불꽃을 만들 수 있는 건 드워프들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의 장인뿐이죠. 하지만 말입니다.”

파지직, 파직!

“우와악!”

“아, 알파 경?”

그 순간, 요한의 손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한 뇌전이 어마어마하게 커지며 미친 듯이 사방으로 방전하기 시작했다.

“전원 전투 준비!”

왕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드워프 근위대가 순식간에 포위망을 형성하며 요한 일행을 포위하였다.

푸거는 자리에서 일어나 요한을 노려보며 사납게 소리쳤다.

“역시 인간의 본성은 추악하도다! 결국은 힘으로 우리를 굴복시킬 작정이었겠지만 우리는 네놈들 따위에게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푸거가 빼어 든 명검에서 오러 마스터의 증표인 마스터 오러가 뿜어져 나왔다. 그에 요한은 피식 웃으며 뇌전의 오러를 거두더니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전하. 먼저 오해를 살 만한 행동이었음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죄를 드립니다. 다만 제가 마나를 끌어  올린 건 전하께 증명하고 싶은 사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웃기는 소리! 당최 무엇을 증명하려 했단 말인가?”

“오러 마스터의 강자이신 전하라면 방금 제 마나가 어느 정도의 수준이었는지 알아보시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셨을 겁니다. 물론 이건 주변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적절하게 조절한 것일 뿐, 제 부하 중에는 지금 제가 보여 드린 마나의 수준보다 족히 열 배는 강력한 불의 마나를 다루는 이가 있습니다.”

“……!”

그 순간 푸거를 포함한 장인들의 표정이 굳어져 갔다. 그에 반해 요한의 입꼬리는 말려 올라갔다.

이번에도 릴리안이 고개를 끄덕여 요한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방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아다만티움을 채광하고 가공하는 데에는 일부 드워프들 장인들이 가진 불에 마나를 담을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고농축, 초고온의 불의 마나만 다룰 수 있으면 누구든 채광과 가공이 가능하다는 뜻이죠. 그런데 아직도 불공정한 제안이라 생각하십니까?”

“그거야…….”

“채광과 가공, 모두 저희 측에서 가능합니다. 그럼에도 제가 전하께 이런 제안을 드리는 이유는 드워프 장인들의 신기에 가까운 솜씨로 그 보석보다 귀한 아다만티움을 재련한다면 더욱 놀랍고 굉장한 무구들이 탄생할 게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황금으로 변기를 만들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 순간, 자리에 동석했던 장인들의 분노와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말만 들어도 참을 수 없다는 그들의 분위기는 이미 요한의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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