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불의 거인 호로모스
“일단 그 제안에 관해서는 우리도 좀 더 확실한 정보와 답사가 필요하네. 그러니 시간을 좀 주지 않겠나? 그런데 두 번째 부탁은 무엇인가?”
“이곳에 잠들어 있는 고대 거인왕의 보물, ‘빅벤의 반지’를 찾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대재앙에 대비하려면 반드시 그 보물의 힘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거인왕은 옛 드워프들의 선조격인 인물로 후에 거인족과 드워프족으로 나뉘었다가 거인족만 멸종하고 드워프들만 살아남은 것으로 전해져 있었다.
즉, 빅벤의 반지는 거인왕의 유품이고 이들이 거인왕의 후손인 만큼 보물을 그냥 내어 달라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불과 얼음의 땅에서 빅벤의 반지를 손에 넣었다는 것 말고는 아는 게 없다고. 그렇다고 이 혹한의 대지를 이 잡듯이 뒤지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럴 시간도 없고 말이야.’
그 때문에 요한은 푸거에게 고개 숙여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그런 유물이라면 이들이 훨씬 더…….
“빅벤의 반지가 필요하다고? 상관없네. 아니, 제발 좀 가져가 주게!”
“……네?”
되레 간절해 보이는 푸거의 표정에 요한을 할 말을 잃어버렸다.
* * *
“이곳일세.”
드워프 전사가 요한 일행을 안내해 준 곳은 이 혹한의 대지에서 두 번째로 거대한 화산…… 불카누스산의 중간이었다.
그곳에는 쇠사슬로 굳게 잠겨 있는 철문이 꽝꽝 얼어 있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게 얼어서 잘…….”
드워프가 가지고 온 열쇠를 자물쇠에 넣어 돌리려 했지만 꽝꽝 얼어 버린 자물쇠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런 젠장!”
결국 드워프는 등에 빗겨 멘 전투 도끼를 꺼내 들더니 수직으로 쇠사슬을 쪼개 버렸다.
번쩍! 철그렁……!
한 줄기 빛과 함께 성인 남성 허벅지 굵기의 쇠사슬이 실처럼 잘려 나가자 드워프는 힘을 주어 문을 밀었다.
“끄응……!”
쿠구구구구구…….
짜리몽땅한 드워프의 통나무 같은 근육이 꿈틀거리자 자기보다 열 배는 더 거대한 철문이 육중한 굉음을 내며 조금씩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힘이 장사시네요?”
“요즘 젊은 것들이 나약한 거지. 내가 조금만 젊었어도 이런 건 한 손으로 열어 재꼈어.”
드워프의 허세는 빈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고 보니 여기까지 오면서 통성명도 안 했네요. 알파라고 합니다.”
“위대한 전사이자 대장장이셨던 소르트의 아들 라거다.”
“응? 소르트는 선왕 전하의 존칭이신 게…….”
“맞다. 내가 푸거 형님의 동생이지. 그리고 언젠가는 형님을 넘어 최강의 전사이자 대장장이가 될 몸이시고.”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자신 있게 포부를 내비치는 라거의 모습에 요한이 피식 실소를 그렸다.
‘믿을 만한 안내인을 붙여 주겠다고는 들었지만 설마 그게 자기 동생이었을 줄은…….’
“괜찮은 겁니까? 그런 대단하신 분이 될 분께서 이런 위험한 곳에 직접 행차하셔도?”
“그런 곳이니까 이 몸이 온 게 아니겠나? 하여간 형님은 걱정도 팔자지, 나 혼자서도 괜찮다고 충분히 말했건만.”
자신감 넘치는 라거의 대답에 요한은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그런데 그 괴물은 정확히 어떤 녀석입니까?”
“호로모스?”
끄덕.
요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라거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주 대책 없는 녀석이지. 녀석은 거인족과 설인족의 혼혈이다. 애초에 거인족은 거대한 체격과 타고난 완력 때문에 당해 낼 수가 없는 놈들이었지만 그만큼 난폭해서 대륙에서는 적도 많았지. 그래서 이곳으로 쫓겨 온 거고. 물론 우리는 이곳의 풍부한 지하자원 때문에 자진해서 이주한 거지만.”
라거는 계속 계단을 내려가면서 말을 이었다.
“아무튼 당해 낼 적이 없다고 생각했던 오만방자한 거인 놈들도 결국 자연의 힘 앞에서는 무력했던 거지. 추위에 약했던 거인족의 숫자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태어난 녀석이 바로 거인족의 마지막 후예인 호로모스, 그 녀석이다.”
호로모스는 거인족과 설인족의 혼혈이라 거인족의 특성과 강함을 그대로 물려받았으면서 추위에 강한 설인족의 강점까지 가지고 있는 괴물이었다.
“그래서 이곳으로 이주한 우리 선조들도 놈 때문에 피를 많이 봤지. 심지어 우리가 보관 중이던 빅벤의 반지까지 녀석이 가져가는 바람에 더 손 쓸 수가 없어졌다고 들었다. 하여 당시에 우리 선조들은 녀석 전용의 감옥을 이곳에 건설하고 녀석을 유인하여 가두었다. 이곳, 라비린스에.”
* * *
“아이고, 나 죽네…….”
블랑카는 턱 끝을 소매로 훔쳤다. 그러자 소매가 흠뻑 젖을 만큼의 땀이 묻어 나왔다.
그저 계단을 내려왔을 뿐인데 체력이 뭉텅이로 깎여 나가고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숨은 턱턱 막혀서 아무리 몰아쉬어도 부족하고 머리는 핑 돌았다.
문제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라는 사실이었다.
“도착했다. 여기가 라비린스의 입구다.”
라비린스는 거대한 불의 미로였다.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사방을 구분하기 힘들어졌다.
자칫 잘못하면 함께 있던 동료조차 잃어버릴 판이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 여기서 미궁에 먹히면 다시는 탈출하지 못한다!”
어떤 신화에서는 거대 미궁을 탈출하기 위해 실을 썼다는 기록도 있었지만 적어도 이곳에서는 불가능했다.
일정 시간마다 미궁의 형태가 달라지는데, 그 패턴이 수백 가지인 데다가 무작위로 바뀌어서 실이나 쇠사슬 같은 건 아무런 의미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벽이나 바닥을 부수는 것도 절대 금물이었다. 이곳은 화산의 지하. 벽과 바닥을 조금만 부숴도 용암이 미친 듯이 쏟아져 들어올 터였다.
물론 그 용암이 굳으면서 뚫린 구멍을 막겠지만 미로를 헤매던 사람들은 이미 뼛조각조차 살라진 뒤겠지.
“흐르는 바람도 없어요. 이래 가지고는 바람길을 찾아 탈출하는 것도 불가능할 것 같아요. 어떡하죠?”
릴리안이 긴장하며 묻자 요한이 피식 웃으며 블랑카를 가리켰다.
“탈출은 걱정 마. 그것 때문에 저 녀석이 있는 거니까. 위험을 감지하는 저 녀석의 감이 의외로 쓸 만하거든. 지금은 그것보다…….”
쿠구구구구궁!
땅이 흔들리고 벽이 흔들리자 요한 일행이 자세를 낮췄다. 그에 라거가 일행을 향해서 외쳤다.
“용암 강물의 흐름에 따라 미로의 구조가 계속해서 바뀔 거다!”
“그럼 그 거인 녀석이 있는 곳까지는 어떻게 가야 합니까?”
“걱정 마. 미로 어디서든 무작정 길을 따라 가다 보면 반드시 미로의 중심부에 도착하게 되니까.”
일행은 라거를 따라 빠르게 미로를 돌파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달리고 또 달렸을까?
쿠어어어어어!
쿠구구구구구…….
천둥? 지진 소리?
저 멀리서 들려오는 포효 소리는 도저히 생물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생물의 그것이었다면 미세하게나마 이 거대한 미궁을 떨게 만들 순 없었을 테니까.
“도착했다!”
“진입과 동시에 전원 전투 준비!”
라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요한이 외쳤다. 복잡하고 답답한 통로를 지나 도착한 라비린스의 중심부는 엄청난 크기의 평평한 섬이었다.
그곳을 섬이라 부른 이유는 그곳이 용암 호수 한가운데에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말도 안 돼…….”
하지만 일행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뜨거운 용암 호수가 아니라 자신들을 보고 입맛을 다시며 뛰어오는 거대한 털북숭이 거인이었다.
문제는 그 거인의 크기였다.
족히 10미터가 넘어서는 거인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오자 지축이 울리고 용암 호수가 출렁였다.
‘빠르다!’
단순히 신장이 거대해서 보폭이 넓다는 얘기가 아니었다. 녀석의 신장이 인간 크기였다 하더라도 호로모스의 속도는 어지간한 오러 익스퍼트급을 능가하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서 녀석의 신장까지…….
‘이건 순간이동이 따로 없잖아?’
“피해!”
요한의 외침에 일행들이 사방으로 산개해서 흩어졌다.
뇌전의 오러를 쓰는 요한, 바람의 마나를 쓰는 릴리안, 스피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화이트, 모두 호로모스의 기가 막힌 스피드에 재빨리 대응할 수 있었지만 라거는 달랐다.
아무래도 넘치는 파워에 비해 스피드는 부족했던 라거가 재빨리 도망쳤다고는 해도 호로모스의 사정권 안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녀석도 라거를 목표로 잡았는지 시선을 집중하며 주먹을 뻗었다.
“블랙!”
요한의 부름에 그의 그림자에서 검은 미노타우로스, 블랙이 튀어나왔다. 녀석은 주인의 의도를 바로 알아채고는 빠르게 라거의 곁으로 합류했다.
“이거나 먹어라!”
무오오오오오!
터질듯 꿈틀거리는 근육으로 마스터 오러가 무장된 배틀 엑스를 휘두르는 라거와 타이밍을 맞춰 아다만티움 몽둥이를 풀 스윙하는 블랙.
그 두 합공이 마주 날아오던 호로모스의 주먹과 충돌하며 거대한 충격파를 터트렸다.
콰앙!
“우와아아악!”
호로모스의 주먹이 위로 튕겨져 올라갔지만 그 대신 라거와 블랙은 거칠게 바닥을 구르며 수십 미터 밖으로 튕겨져 날아갔다.
그사이…….
“릴리안!”
“하압!”
릴리안은 바람의 마나를 끌어모아 화살에 담았다.
하지만 이곳은 바람의 마나와 상극인 불의 기운이 넘쳐흐르는 곳. 심지어 바람이 통하지도 않는 밀폐된 공간이었다.
콰앙!
‘칫! 위력이 너무 부족해!’
화살은 정확히 호로모스의 뒷덜미에 명중했지만 위력은 생각했던 것 이상의 반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효과는 있었다. 급소인 뒷덜미에 화살이 적중하자 깜짝 놀란 호로모스의 시선이 릴리안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순간!
파지직…… 콰릉!
한 줄기 번개가 호로모스의 모가지를 관통했다. 아니, 관통한 줄 알았다. 호로모스는 떨리는 눈빛으로 요한을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실피드를 들고 있는 요한이 호로모스를 올려다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있었다.
‘이 정도면 크게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하기야, 엘븐 글로리아에서 봤던 그 뱀 같은 녀석이 우글우글한 게 여럿 있을 거라는 전제가 말이 안 되긴 하지.’
호로모스는 확실히 강력하고 버거운 적이 맞았지만 그렇다고 황금 뱀에 비교할 만큼 대적하기 불가능한 적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건 좋은 기회였다. 쓸 만한 인재들을 육성하기 위한 좋은 기회 말이다.
“어때? 힘들 것 같으면 내가 끝낼까?”
“웃기는 소리! 놈은 내 먹잇감이다”
“할 수 있어요!”
무오오오오!
요한의 가벼운 도발에 라거와 블랙, 그리고 릴리안이 소리치며 호로모스에게 달려들었다.
그렇게 오러 마스터 이상의 강자 세 명과 호로모스의 대결이 팽팽하게 이어졌다.
과연, 빅벤의 반지를 손목에 착용한 녀석의 신체 능력은 오러 마스터 세 명의 합공에도 꿇리기는커녕 우위를 점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쿠워어어어어!
본능적으로 싸우는 호로모스와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손발이 맞아 가는 세 사람의 팀워크에 조금씩 균형이 맞춰지고 있었다.
게다가…….
‘투박했던 릴리안의 마나 컨트롤이 조금씩 정교해지고 있다. 라거는 오히려 힘이 빠지니까 자연스럽게 힘을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블랙 같은 경우는 나무랄 곳이 없었다. 아니, 블랙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전황을 유지하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터였다.
그런 가운데 라거와 릴리안이 실시간으로 성장하면서 승리의 추는 점점 세 사람 쪽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으랏차!”
무오오오오!
“타앗!”
라거의 도끼가 날아오던 호로모스의 주먹을 땅으로 처박고, 블랙의 몽둥이가 녀석의 발꿈치를 후려갈겨 중심을 무너트리자, 쓰러지던 녀석의 귓구멍을 정확하게 릴리안의 화살이 관통하였다.
쿠어어어어!
아무리 가죽이 질기고 단단한 데다 빅벤의 반지로 그 단단한 가죽을 더욱 강화했다 하더라도 귓속까지 강화시킬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
쿠웅…….
양쪽 귀에서 피를 흘리며 눈을 까뒤집은 호로모스의 거체가 육중한 굉음과 함께 그 자리에 쓰러졌다.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