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돈을 쓸어 담다
루다푸로스크의 영주실.
본래라면 영지에 관련된 서류들과 자료들로 가득해야 할 이곳을 뿌연 연기가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것은 마약을 향로에 피워 올린 연기였다.
그곳에서는 마약에 찌들어 여자들 속에 파묻혀 있는 한 중년인이 있었다.
한 손에는 술병을 들고, 한 손으로는 여자의 가슴을 주무르며 여자들의 살결에 파묻혀 열심히 허리를 흔드는 그의 모습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에 가까웠다.
아니, 초점이 거의 사라진 눈동자와 헤실헤실 웃는 입꼬리, 그 입꼬리를 타고 흐르는 침을 보고 있으면 짐승이란 말조차 그에게는 과분했다.
문제는 그런 작자가 바로 이 루다푸로스크의 영주, 유바셀이라는 사실이었다.
똑똑똑.
“영주님, 들어가겠습니다.”
끼이익.
안에서 영주의 허락이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안경 쓴 젊은 사내는 곧장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왔다. 마치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안으로 들어서자 공기 중에 가득 찬 마약 연기가 사내의 폐부로 흘러들어 왔다. 하지만 사내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유바셀에게 보고를 올렸다.
“행정부에서 영주님의 결재를 기다리는 서류들이 올라왔습니다. 하지만 영주님께서 바쁘신 관계로 지금까지처럼 제가 대행 업무를 봐도 될는지요.”
사내의 물음에도 유바셀은 여전히 허리를 흔들기에 바빴다. 아니, 사내가 들어왔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그렇게 알고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사내가 문을 닫고 나서는 순간, 그의 날숨에서 폐부에 축적되어 있던 마약들이 숨을 타고 전부 빠져 나왔다.
그사이, 검은 로브로 정체를 숨긴 복면인 하나가 사내의 뒤에 그림자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로이드 경.”
“왔어? 그래, 상부에서는 뭐라고 하시든?”
“헥토르 전하의 의식이 곧 끝날 것 같다고 하십니다.”
의식이 끝날 기미가 보인다는 말에 로이드의 눈동자가 커졌다.
“결과는?”
“확실한 결과는 뚜껑을 열어봐야 알겠지만 신관들의 말로는 현 상태만 유지할 수 있다면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였습니다.”
꽈악!
로이드는 주먹을 불끈 쥐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방금 전과 전혀 다른 사람처럼…… 어떻게 보면 유바셀보다 더 흥분한 것처럼 들뜬 음색으로 그림자에게 말했다.
“역시! 내가 선택한 주군이시다. 기억하나? 그 옛날 에페로칼 대제께서는 1년 의식에 성공하시고도 대륙을 통일로 이끄셨다. 지금 와서 당시 대제의 무력을 측정해 보면 그랜드 오러 마스터 상급에 필적하는 전력이라고 대부분의 신관들이 입을 모아 말했지. 하지만 당시에도 대제를 막을 수 있는 적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3년이다, 3년! 황가의 역사상 대제의 1년 기록을 깬 황손도 없었는데 헥토르 전하께서는 무려 3년의 의식을 버티고 성공하신 것이다! 그 강함을 짐작이나 할 수 있겠나?”
“감히 저 같은 미물이 어찌 그분을 짐작할 수 있을는지요…….”
그림자는 고개를 숙이며 읍했다. 로이드는 그에 개의치 않고 자신이 할 말만 이어 나갔다.
“게다가 지금은 대륙 대부분의 왕국들에 우리 황가의 자랑스러운 임페리얼 섀도들이 활약하며 나라의 기틀을 차근차근 붕괴시켜 나가고 있지. 이것이야말로 헥토르 전하께서 대륙을 통일하라는 신의 계시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옳으신 말씀이옵니다.”
“하아……. 이런, 너무 흥분했군.”
깊이 숨을 고른 로이드는 뒤를 돌아 영주의 집무실을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은 마치 가면을 쓴 것처럼 냉정하고 딱딱한 사무적인 얼굴로 돌아왔다.
“저 녀석은 이제 글렀어. 앞으로 한 달도 못 버틸 거다. 대체품은?”
“유바셀의 장남, 폴론을 교육시켜 두었습니다. 아직 젊으니 못해도 5년 이상은 충분히 버틸 겁니다.”
“1년만 해도 충분해. 어차피 쓰다 버릴 소모품이니까.”
교육이라고 해도 사람을 타락시켜 가지고 놀기 좋은 말 정도로 만드는 것뿐이었다.
애초에 이곳, 루다푸로스크는 그림자들이 지배한 도시였기 때문에 교육에 저항하면 남은 건 죽음뿐이었지만…….
“자, 그럼 도시를 팔아서 오늘도 헥토르 전하의 자금 조달에 힘 써볼까?”
* * *
루다프로스크는 도시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유흥 시설이었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거리에는 취객들과 호객하는 사람들이 넘쳐 났으며 도시에서는 술과 마약의 냄새가 진동을 했다.
“타락의 끝을 보여 주는 곳이로군. 쯧쯧…….”
“…….”
라거는 주변을 둘러보며 혀를 찼고 릴리안은 한눈에 봐도 싸늘한 분위기가 압도적이었다. 막말로 누구 하나 눈이라도 잘못 마주치면 큰일 날 기세였던 것이다.
다행히 이곳은 구역 하나가 유흥 구역인 이테란과 달리 도시 전체가 유흥의 도시였다.
그래서 그런지 두 사람처럼 복면이나 로브로 정체를 가리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차고 넘쳤다.
“일단 숙소를 잡을 테니까 두 사람은 거기서 대기하고 있어. 괜히 밖에 돌아다니다 시끄러운 소동 일으키지 말고.”
“일 없다. 나도 이런 시끄러운 곳은 딱 질색이니까.”
“그렇게 할게요.”
라거와 릴리안이 수긍하자 요한은 두 사람에게 근처에서 가장 크고 편한 여관을 잡아 준 뒤, 블랑카와 함께 나섰다.
“그런데 여기에도 숨겨진 유적이 있는 겁니까?”
“아니. 여긴 없어.”
“네? 그런데 저는 왜…….”
“말했잖아. 고생한 만큼 챙겨 주겠다고.”
그런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카지노’였다.
* * *
세상 모든 욕망이 모이는 곳을 한 군데 꼽으라면 그곳은 단연 도박장일 터였다.
두 사람이 찾은 도박장, 엘카리움도 그런 곳이었다.
고대어로 황금의 땅이라는 뜻을 가진 엘카리움 카지노는 대낮부터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며 한 순간에 천문학적인 돈이 오고 가는 곳이었다.
“레드 18에 올인!”
“또 올인이다!”
“저 사람 진짜 미쳤나 봐.”
“에이, 아무리 그래도 설마…….”
또륵.
룰렛 위를 열심히 굴러가던 쇠구슬은 수많은 사람들의 의심 속에서 정말 거짓말처럼 레드 18칸에 멈춰 섰다.
와아아아아!
“미쳤다!”
“도박의 신이다!”
숫자와 색깔을 맞춘 무려 18배 배당금 올인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으하하! 으하하하하!”
당연히 블랑카의 입꼬리도 귀에 걸려 내려올 생각이 없었다.
“어디 보자……. 그렇지! 다음은 블랙에 7!”
‘나노.’
[네. 마스터.]
당연한 말이지만 블랑카가 연속 잭팟을 터트리는 이유는 그의 운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아니, 그는 운이 매우 나쁜 편에 속했다.
하지만 도박은 아무리 운이 좋아도 결국 플레이어가 돈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젠장,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딜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블랙 7칸에 구슬이 들어가지 않도록 구슬을 튕겼다.
먹고 자는 걸 빼면 그것만 연습한 딜러에게 그 정도 기술은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딸칵.
“브, 블랙에 7입니다…….”
숫자는 블랑카가 건 블랙의 7로 쏙 하니 들어갔다. 당연히 칩은 말 그대로 산처럼 쌓여 갔고 블랑카는 당장 옷 벗고 춤이라도 출 기세였다.
‘운이 아닌 기술 싸움으로 들어가면 나노는 못 이기지.’
뒤에서 지켜보던 요한은 피식 웃었다. 아무리 딜러의 손기술이 좋아도 구슬을 코팅하고 있는 나노 크리에이터의 조작은 절대 따라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에이, 이제 이건 재미없다. 다른 거나 해야지.”
“자, 잠시만요! 한 번만 더 기회를……!”
간절하게 애원하는 딜러를 뒤로하고 블랑카는 칩을 보따리에 한 가득 넣어 짊어지고선 자리를 나섰다.
그러자 건장한 떡대들에게 끌려 나가는 딜러를 쳐다보며 안쓰럽게 혀를 차는 블랑카.
“쯧쯧, 이렇게 보니까 되게 불쌍하네. 원래 저런 역할은 제 역할이었는데 말이죠.”
“너 딜러도 했었냐?”
“아뇨. 저런 식으로 떡대들한테 질질 끌려 나가는 거요. 그런데 어떻게 한 겁니까?”
“뭐가?”
“아뇨. 방금 한 것들요! 알파…….”
요한이 눈살을 찌푸리자 블랑카는 서둘러 말을 바꿨다.
“그러니까 에이스 경이 하신 거요. 어떤 트릭을 썼길래 제가 말하는 대로 번호가 쏙쏙 들어가냐는 말입니다. 아니, 이참에 저랑 대륙 도박장을 전국적으로다가 순회하시는 건 어때요? 아주 돈을 깡그리…….”
“주접떨지 마라. 너 좋으라고 이러는 거 아니니까. 다음엔 저 카드로 하자. 너 카드는 할 수 있지?”
“어휴, 말만 하십쇼. 제가 몽땅 따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어떻게 해서든 사기를 쳐서 잃은 돈을 모두 회수하려던 딜러들의 노력은 나노 크리에이터에 의해 전부 물거품이 되었고…….
결국 천문학적인 칩을 챙긴 요한과 블랑카는 칩을 환전하기 위해 환전소를 찾았다. 그러자 블랑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근데 이 많은 돈을 환전해 줄까요? 제가 이만한 돈을 환전해 본 경험이 없어서…….”
“뭐, 보이는 곳에서는 별다른 수작질은 안 하겠지. 그건 이 도박장의 신용 문제로 직결될 테니까.”
“그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작질을 한단 말씀…….”
“일단 지켜보자고.”
그렇게 번쩍번쩍한 금괴 더미를 챙겨 도박장을 나선 요한과 블랑카.
아니나 다를까…….
“역시 미행이 붙었네. 아마 그 도박장에서 보낸 놈들 같은데…….”
“네? 진짜요? 그 새끼들도 진짜 운 없는 놈들이네.”
블랑카는 자신을 미행한다는 도박장에서 보낸 폭력배 무리에게 깊이 애도했다.
다른 때였다면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부리나케 도망쳤겠지만 지금 자신의 옆에는 요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한 역시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자신들을 미행하고 있는 게 두 부류로 나뉘었기 때문이다.
한쪽은 살기등등한 여러 무리였기에 도박장에서 보낸 폭력단이 맞을 것 같았고, 다른 한쪽은 그림자처럼 은밀하게 혼자서 자신들을 쫓고 있었다.
‘조급하게 움직이지 말고 조금만 더 지켜보자. 녀석이 내가 생각하는 그 녀석이 맞다면 알아서 미끼를 물어줄 테니까.’
요한은 일단 폭력단을 유인하기 위해 일부러 인적이 드문 골목길로 향했다.
“엉? 넌 뭐야?”
“이 새끼 이거 돈 좀 있어 보이는데?”
그런 곳은 당연히 그 구역을 주름잡는 깡패들의 구역이었지만…….
“어? 저, 저기……!”
“저 엠블렘은…… 엘카리움이잖아?”
“오셨습니까! 형님들!”
“그래, 우리는 저 형씨들한테 잠시 볼 일이 있으니까 다른 데서 놀아라.”
폭력단의 엠블렘을 알아본 깡패들이 서둘러 자리를 떠나서 무려 오십여 명의 떡대들이 요한과 블랑카를 둘러싸고 위협하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일부러 천천히 주섬주섬 무기들을 꺼내기 시작하는 그 모습에 블랑카는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나섰다.
“저기요. 형님들? 왜 이러는지 내가 모르는 거 아닌데 그래도 이러지 맙시다. 내가 나 살자고 이런 말 하는 거 아니야. 다 형님들 위해서 이러는 거라고. 형님들도 사지 멀쩡하게 퇴근하고 싶잖아. 안 그래?”
“뭐라는 거냐, 저 병신은?”
“몰라. 먼저 죽고 싶다는 거 같은데?”
“보아하니 제정신은 아닌 것 같고. 하여간 우리 도박장에서 사기도박 하다 걸리면 뒈지는 건 알고 그런 짓을 저지른 거겠지?”
떡대들이 자신의 말에 콧방귀도 뀌지 않자 블랑카는 한숨을 내쉬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하아……. 그래. 죽어 봐야 저승 맛을 알지. 난 분명 경고했다.”
“돈은 챙기고 사지만 분질러서 데려와. 가죽은 큰형님이 직접 벗기신단다.”
그렇게 떡대들이 요한을 향해 달려들었다.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