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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80화 (80/150)

80. 꿩 먹고 알 먹고

“오, 먼저 와 있었네? 생각보다 성격이 급하신가 봐.”

요한이 숙소로 돌아오자 뜻밖의 인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인물이란 다름 아닌 술레이만과 그 무리였다.

릴리안과 라거는 그들을 지켜보며 경계하고 있었고 블랑카는 구석에 숨어서 눈치만 살피는 중이었다.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를 경계하다 요한이 들어오자 술레이만이 즉시 반응했다.

“너, 도대체 정체가 뭐야? 왜 이런 걸 나한테 남겨 둔 거지?”

술레이만은 요한에게 쪽지를 보여 주며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 쪽지는 요한이 그의 품속에 몰래 넣어 둔 것으로 그가 묵고 있는 숙소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그쪽이야말로 뭔가 바라는 게 있어서 찾아온 게 아닌가? 그런 게 아니라면 그냥 찢어서 버렸으면 됐을 텐데.”

“말장난 하지 마. 내 정체를 알고 있는 듯한 뉘앙스도 그렇고, 갑자기 성으로 쳐들어가서 난장판을 만들어 놓은 이유도 그렇고, 너 대체 정체가 뭐야?”

술레이만의 심문에 요한은 가까이에 있던 의자 하나를 앞으로 끌어당겨 앉았다.

“지금 중요한 건 내 정체가 아니야. 당신이 지금부터 무엇을 해야 하냐겠지. 안 그래? 유바셀의 삼남, 차베니 경.”

“…….”

술레이만…… 아니, 차베니는 더 이상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게 무의미하단 것을 깨닫고 복면을 벗었다.

“좋아요. 당신 말대로 당신의 정체는 묻지 않겠습니다. 어차피 당신의 정체를 안다고 해도 우리는 당신 같은 괴물을 상대할 만큼 여력이 넘치는 것도 아니니까요.”

차베니는 주먹을 틀어쥐며 말을 이었다.

“로이드 그 작자가 자기 아버지의 대를 이어 우리 영지의 총관에 임명된 이후로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도시는 점점 유흥과 퇴폐에 물들어 갔고 돈은 쏟아져 들어왔지만 그 돈은 모두 로이드의 주머니로 들어갔죠. 그러다 보니 영지민들의 삶은 더욱 더 궁핍해져 갔고요.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로이드가 네 아버지와 형들을 전부 구워삶아 놓은 탓이겠지.”

차베니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필사적으로 아버지와 형님들을 돌려놓으려 했지만 오히려 아버지와 형님들은 제게 칼을 겨누며 반역자라고 매도하시더군요. 이미 로이드의 꼭두각시가 된 그들을 바꿀 방법은 없었습니다. 이미 영지의 기사들과 병사들도 모두 로이드의 것이 되었고요.”

결국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뜻이 맞는 자들을 긁어모아 지하로 숨어드는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였다.

“제로스의 망토는 어디서 손에 넣었지?”

“처음부터 우리 가문의 가보로 내려오던 물건이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가보까지 로이드의 손에 뺏길 수는 없어서 그것만 들고 도망칠 수 있었죠.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혹시…….”

“이걸 돌려 달라고? 상관없어.”

“예? 그게 정말입니까?”

요한이 망토를 가리키며 대꾸하자 차베니의 표정이 한껏 밝아졌다. 하지만 이어진 요한의 대답에 그의 표정은 똥 씹은 사람처럼 구겨질 수밖에 없었다.

“네 목숨이랑 이거랑 둘 중 하나를 선택해서 대답해. 아니면 설마 내 돈을 훔쳐 가 놓고 목숨도 지키고, 가보도 챙기겠다는 뭐 그런 심보는 아니겠지? 나로서는 이걸로 네 목숨을 퉁쳐줄 생각이었거든.”

“아, 예……. 죄송합니다. 제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네요.”

차베니는 순순히 고개를 숙이며 용서를 구했다.

막말로 아버지나 형님들 중에 멀쩡한 사람들만 있었어도 목숨을 걸어 볼 만했지만 지금 가문을 다시 부흥시키고 영지를 되찾을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요한의 돈을 허락 없이 훔친 것도 사실이고…….

“아무튼 그래서 한다는 짓이 도둑질이었나?”

“어쩔 수 없었습니다! 자금이 쏟아져 들어가는 저들에 비해 저희는 턱없이 돈이 부족했으니까요…….”

그 말에 요한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아무것도 안 하고 손가락만 빨고 있는 것보다는 낫네. 귀족 아들이라고 고고한 척 똥에 손을 묻히지 않는 것보다야 네가 백배는 낫다. 그래서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당신에게 도움을 구하고 싶습니다.”

차베니가 고개를 숙이며 도움을 청하자 요한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지금 누구한테 고개를 숙이는지는 알고 숙이냐? 내가 로이드보다 더한 악당이면 어쩌려고?”

“상관없습니다. 지금 제게는 악당이건 영웅이건 제게 힘을 빌려줄 사람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영지를 되찾고 백성들을 구할 수만 있다면 당신이 천하에 다시없을 악당이라고 해도 기꺼이 신발을 핥겠습니다.”

‘이런 녀석이었구먼.’

차베니는 그 신분과 도둑으로 활동했다는 것만 이후에 전해졌을 뿐, 그의 행적은 따로 기록된 바가 없다.

그야 그럴 만도 하지. 헥토르의 부하인 로이드의 적인데 역사에 기록 한 줄 남아 있을 리가 있나? 역사야말로 승자의 일기장 같은 것인데.

그러나 직접 만나 본 차베니는 자신의 생각과 상당히 다른 인물이었다.

도박장과 도박으로 큰돈을 벌어들인 도박꾼, 그리고 불법 노예 장사꾼들만 목숨 걸고 골라서 터는 의적 활동부터 조금 의아해 했는데 직접 만나 본 그의 눈빛은 맑고 강했던 것이다.

보통 돈에 욕심이 많은 녀석들이 가지고 있는…… 블랑카 같은 녀석들의 썩은 동태 눈깔이 아니라.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쓸 만하겠어.’

“난 그런 취미 없으니까 됐고, 대신 거래를 제안하지.”

“거래라고 하시면…….”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불법 도박장, 노름꾼, 유흥 시설, 노예 상단을 전부 정리해 주지. 대신 정리하고 챙긴 자금은 내가 갖겠다.”

“그건……!”

차베니의 곁에 있던 그의 동료가 다급하게 나서려고 하자 차베니가 손을 들어 부하를 제지했다.

“마음에 안 들면 이대로 떠나도 상관없고. 어차피 이쪽은 원하던 걸 손에 넣은 참이거든. 그렇지 않아도 할 일이 태산이라.”

“아뇨, 상관없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도련님!”

로이드가 흔쾌히 허락하자 그의 부하들이 기겁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로이드에게도 계획이 있었다.

“지금까지 모아 둔 자금만 해도 적지 않다. 애초에 전쟁자금으로 쓸 돈이었지만 이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곧바로 영지 복원 사업에 자금을 투자할 수 있어. 그렇지 않은가?”

“그렇지만…….”

현재 영지에 불법 도박이나 유흥, 노예 매매를 통해 흘러들어오는 검은 돈들은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액수를 자랑했다.

그 많은 돈들을 두 눈 뜨고 뺏긴다 생각하니 인간적으로 아쉬운 것도 사실이었다. 로이드 역시 그런 수하들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렸다.

“경들의 마음은 이해한다. 하지만 이들이 바라는 돈은 애초부터 우리 영지의 돈이 아니었다. 우리 영지의 것이 아닌 재물을 주고 영지를 되찾을 수 있다면 이거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가 아니겠는가?”

“도련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호오라…….’

그 순간, 이 자리에서 가장 적절한 판단과 적절한 설득으로 수하들을 이해시키는 차베니의 모습에 요한은 그가 제법 훌륭한 영주가 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좋아. 그럼 먼저 성으로 가자고. 이런 여관에서 영지의 중대사를 논하기에는 좀 그렇잖아?”

그렇게 성으로 돌아간 일행은 그곳에서 마약과 술에 취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전혀 짐작조차 못 하는 유바셀과 그의 자식들을 볼 수 있었다.

“아버지! 형님!”

자식도 몰라보고 여전히 폐인처럼 널브러져 있는 아버지와 형제들의 모습에 차베니가 눈물로 그들을 외쳐 불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요한은 그런 차베니의 어깨를 다독이며 고개를 저었다.

“저건 교황이 이 악물고 치료해도 안 돼. 가장 좋은 방법은 더 이상 고통받지 않게 보내 주는 것뿐이다.”

“…….”

결국 수하들의 암묵적인 동의 앞에서 차베니는 아버지와 형제들의 목숨을 끊어 주었다.

“자, 그럼 우리도 일 시작해 볼까? 먼저 릴리안. 너한테 전문 분야인 노예 상단을 맡길 생각인데 자신 있지?”

“네! 맡겨만 주세요.”

릴리안의 대답이 어느 때보다 자신감 넘쳤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 와서 노예로 살고 있는 동포들을 많이 봤던 그녀였다.

처음에는 요한의 명령 때문에 대기하고 있는 것이 답답하고 짜증났는데 이제 그 스트레스를 마음껏 풀 수 있으리라.

“라거, 너는 불법 유흥업소들은 전부 찾아서 때려 부숴 버려. 안내는 이 친구들이 해 줄 거다.”

“만약 저항하는 놈들이 있다면?”

“뭘 그런 걸 물어? 그냥 다 죽여.”

“그것 참 마음에 드는 명령이네.”

씨익.

요한이 웃으며 대답하자 라거도 마주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호응했다.

“마지막으로…… 블랑카.”

“네? 저도 할 일이 있습니까?”

“어찌 보면 네가 제일 중요한 일이야, 인마. 너는 화이트랑 같이 노름꾼들 찾아서 그 새끼들이 가진 돈 싹 털어 와. 질리도록 쫓겨 본 놈이니까 노하우가 있을 거 아니야.”

“아, 예. 뭐……. 알겠습니다.”

블랑카의 대답은 심드렁했다.

‘어차피 열심히 일해 봤자 저 인간 주머니에 몽땅 들어갈 텐데 뭐 한다고 열심히 해? 그냥 쉬엄쉬엄 하다가 시간 맞춰서 돌아…….’

“아 참, 이 말을 깜빡했네. 노름꾼들 털어서 나온 돈의 절반을 저번에 내가 약속한 보수로 지급할 생각인데, 어때?”

“최선을 다해 그 흉악무도한 새끼들을 먼지 한 톨 남김없이 싹 다 털어 오도록 하겠습니다! 충성!”

마치 이제 막 입대한 신병인 양 바짝 군기가 든 모습으로 거수경례를 하는 블랑카의 모습에 요한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자, 그럼 그 새끼들이 눈치채고 도망치기 전에 움직이자고.”

요한은 직접 가장 위험부담이 큰 도박장과 마약 소굴을 털었다.

도박장과 마약 소굴은 뒤가 없는 놈들, 그리고 제정신이 아닌 놈들이 모여 있는 인생의 끝자락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뭐야, 이 새끼는?”

“뭐긴 뭐야. 새로 영주에 오르신 차베니 님의 감사관이지 이 후레잡놈의 새끼들아.”

“감사관은 니미, 죽여 버려! 한 푼도 넘겨주지 마!”

예상했던 대로 처음 들이닥친 도박장부터 반항이 거셌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요한에게는 애들 투정 수준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 비싸다는 전신 판금 갑옷 풀 세트를 장착하고 덤벼드는 용병들을 상대로 오로지 주먹만 쓰는 요한.

그의 주먹이 뻗어 나갈 때마다 용병들이 공깃돌인 양 훨훨 날아가 벽이나 천장에 처박혀 목숨을 잃었다.

“다음!”

순식간에 도박장을 털어 버린 요한은 나머지 도박장과 마약 소굴 순회공연도 순조롭게 진행했다.

애초에 나노 크리에이터 앞에서 비상금 같은 건 눈앞에 드러난 돈이나 다름없었기에 녀석들이 입을 꽁꽁 싸매도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밤새 순회공연을 마친 요한과 그 일행은 쌓으면 작은 산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을 만큼의 천문학적인 돈을 끌어 모을 수 있었다.

요한은 그 돈을 전부 제로스의 망토 안, 아공간 창고에 보관해 두었다.

“나머지는 눈치채고 발 빠르게 도망간 놈들이라 잡기가 쉽지 않을 거야. 그런 조무래기들한테 신경 쓸 여유도 없고.”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합니다. 다시 한번 거듭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까지 귀인을 존칭할 성함을 모르는군요.”

고작 하루 사이에 영주의 자리가 제법 그럴듯해진 차베니는 고개 숙여 요한에게 감사를 전했다.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야. 그때까지 잘 버티고 있어라. 조만간 큰 파도가 몰려올 거거든.”

“큰 파도요?”

“그런 게 있다. 아무튼 고생하고. 우리는 간다.”

그렇게 차베니와 이별한 요한은 임시로 만든 상단의 행수 자리에 블랑카를 앉혔다.

상단은 노예 상단이었는데 릴리안이 해방시킨 노예들 중에서 갈 곳 없는 이들과 아인종들이 마차에 타고 있었다.

“이게 너에게 주는 마지막 임무다. 화이트랑 같이 구르칸 산맥으로 가라. 거기 가면 이 사람들을 알아서 맡아 줄 거다. 도착하면 너와 나의 계약은 끝난다.”

“저 근데…….”

“왜? 또 무슨 할 말이 남았냐?”

“구르칸 산맥이 제가 알고 있는 그 구르칸 산맥은 아니죠? 벨로반 왕국 옆에 붙어 있는 그…….”

“맞는데?”

“…….”

블랑카는 요한을 미심쩍은 눈빛으로 흘깃 쳐다보았다.

요한은 끝까지 한결같은 녀석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걱정 말고 가, 이 새끼야. 거긴 안전하니까.”

“제가 알고 있기로 거기가 대륙에서 가장 안전이란 단어와 거리가 먼 곳이라고…….”

“아닐걸. 지금 네 눈앞이 가장 위험한 곳일 텐데…….”

“저 아직 출발 안 했어요? 이랴!”

그렇게 다급히 출발하는 블랑카를 보고 요한은 화이트와 눈빛을 주고받았다. 화이트가 동행해 준다면 호위와 감시에 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문제없겠지.

“그럼 가자. 우리도 다음 신기를 찾으러.”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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