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언데드의 땅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으로 들린 마을에서 요한은 릴리안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나나 라거한테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죽음의 마나에 민감한 너한테는 극독이 될 수도 있어. 아니면 설마 내가 챙겨 줄 거라 믿고 억지를 부리는 건 아니겠지?”
일반적인 생명체에게도 죽음의 마나는 굉장히 위험한 독극물같은 기운이었지만 엘프들에게는 그 의미가 달랐다.
생명의 기운이 누구보다 충만하고 민감한 그들이었기에 죽음의 마나는 다른 생명체보다 더 한 극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에 릴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이런 위험을 피해 갈 생각이었다면 스승님을 따라 나서지도 않았겠죠. 저는 걱정 마시고 원하시는 대로 움직이시면 돼요. 애초에 그곳에서 쓰러질 거라면 제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전사란 뜻이겠죠.”
“크하하하! 역시 전사라면 이 정도 배짱은 있어야지! 더 더욱 마음에 드는구려. 릴리안 공, 이렇게까지 얘기하는데 알파 경도 그만 포기하는 게 어떻겠소? 릴리안 공이 걱정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더 이상의 배려는 전사에 대한 모독이오. 그것 경이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라거가 호탕하게 웃으며 릴리안을 지지했다.
강해지기 위해서 위험한 시련도 스스로 극복하려는 모습이 그의 심금을 울린 것이다.
“하아…… 하는 수 없지. 좋아. 그럼 이대로 가 보자고.”
요한이 결정을 내리자 옆자리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용병 사내 한 명이 다가와 요한에게 말을 걸었다.
“나, 파보라는 사람이오. 저기, 본의 아니게 얘기를 듣게 되었소만, 혹시 그란체스카의 성으로 갈 생각이시오들?”
“예,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파보의 질문에 요한이 되묻자 파보가 고개를 저으며 그들을 만류했다.
“그란체스카 성의 보물을 노리고 가는 거라면 포기하는 게 좋을 거요. 그곳은 지옥이오. 나도 말로만 듣고 동료들과 함께 찾아갔다가 나 혼자 간신히 살아 돌아왔소.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건지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꿈을 꾸고 있는 건지도 잘 모르겠소.”
파보는 마지막으로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요한의 어깨를 다독였다.
“보물을 노리고 성을 찾아간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지만 살아서 도망치고 보니 목숨보다 중한 보물은 없더이다. 그래도 욕심을 포기하지 못하겠다면…… 뭐, 힘내시오. 살아서 도망칠 수 있다면 이미 그것으로 그대들은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말을 마친 파보는 요한 테이블의 음식값까지 계산한 뒤 조용히 가게를 떠났다.
“좋은 친구네. 그럼 어디 보자……. 두 사람 다 여전히 포기 할 생각은 없는 것 같고.”
요한은 오히려 파보의 경고에 각오를 굳힌 두 사람의 눈빛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가 볼까?”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인 후, 요한의 뒤를 따랐다.
식료품과 의약품을 넉넉하게 챙긴 요한과 일행들은 절대로 ‘출입 금지’라는 팻말이 박힌 통행금지 구역 앞에서 병사들에게 약간의 뇌물을 먹이고 출입을 허가받을 수 있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소. 뇌물을 받아먹으면서 이런 얘기를 하긴 뭣하지만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게 어떻겠소?”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십쇼.”
“하아……. 그란체스카의 성은 길을 따라 곧장 가면 나올 것이오. 행운을 빌겠소.”
그렇게 병사들의 배웅을 받으며 외길을 따라 쭉 걸어가길 반나절. 어느 순간부터 주변에 안개가 슬금슬금 주위를 뒤덮기 시작했다.
안개를 손으로 스윽 훑은 라거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요상한 안개로군. 축축하지도 않은 것이, 그렇다고 연기처럼 매캐하지도 않은 것이, 기분 나쁘게 달라붙는 느낌이랄까. 릴리안 공을 괜찮은가?”
“안개 아니라 마치 영혼들이 안개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것도 한 맺힌 영혼들이 마치 더 이상 살아 있는 생명들의 출입을 거부하는 것 같은…….”
릴리안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다 주먹을 불끈 틀어쥐며 각오를 다시 한번 굳혔다.
“그 정도 느낌일 뿐이에요. 아무렇지 않아요.”
“얘기만 들어 봐도 그 정도 느낌이라고 하기엔 영…….”
요한은 피식 웃으며 정면을 살폈다.
차라리 듣지 않았으면 좋았을 릴리안의 감상이었지만 나름 일리는 있었다.
“릴리안이 그렇게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애초에 이곳은 원한과 절망으로 가득한 망자의 땅이니까.”
“애초에 언데드의 영토가 그런 것 아니겠나.”
“그러고 보니 내가 이곳의 유례를 얘기해 주지 않았던가? 원래 이곳, 그란체스카 공국은 그란체스카 공왕이 다스리던 풍요와 번영의 땅이었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그 풍요와 번영이 되레 독이 되었던 거지.”
“침략을 많이 당했다는 뜻인가요?”
릴리안의 질문에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 같이 불행한 건 참을 수 있어도 누구 하나만 행복한 건 못 참는 게 인간이거든. 아무튼 그란체스카 공왕은 백성을 아끼는 군주였고 누구보다 솔선수범하여 전장을 질타하던 용맹한 장수였다지. 그 덕분에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지만 그만큼 적은 더 많아진 거고.”
“금세 한계에 부딪쳤겠군.”
“맞아. 사실 상왕국인 드레도네 왕국이 그란체스카를 도와야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란체스카 공왕의 명성이 너무 높았던 게 불행이었던 거지. 자신의 자리를 위협받을까 봐 상왕국은 공국을 외면했고 그 즈음에 한 흑마법사가 공국을 찾아와 공왕에게 마법 아이템 하나를 진상했다더라고.”
지금에야 흑마법사는 동화나 전설 속에서만 등장하는 인물이었지만 당시 마도 문명 시대에는 흑마법사들의 존재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 마법 아이템 덕분에 그란체스카 공왕은 불멸, 불사의 군대를 손에 넣을 수 있었지만 그 대가로 공왕은 자신의 땅을 죽음이 가득한 나라로 만들어 버렸지. 덕분에 지금 그란체스카 공국에서는…….”
“이런……!”
“언제 이만큼이나…….”
요한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언제, 어디서든지 질릴 만큼의 언데드를 볼 수 있게 됐다는 얘기.”
요한은 제로스의 망토에서 오리하르콘 창 한 자루를 꺼내 꼬나 쥐었다.
“선봉은 라거, 중견은 나, 후위는 릴리안이 맡는다! 이놈들은 평범한 언데드가 아니야! 죽일 생각 말고 돌파할 생각으로 뛰어!”
“알았다!”
“예!”
요한의 명령에 즉각 대형을 구성한 세 사람이 몰려드는 언데들을 뚫고 직선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런 빌어먹을!”
언데드는 죽었으나 죽지 못한 몬스터들이다. 당연히 고통 같은 건 느끼지 못했고 급소나 약점 따위를 노려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즉, 한 번에 쓰러트리지 못하면 얼마나 큰 부상을 주던 그렇게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일격필살의 공격을 끊임없이 이어 나가야 하는 작업은 라거에게 새로운 의미의 과제이자 도전이었다.
파상공세가 주특기인 그조차도 이런 상황은 버겁게만 느껴졌던 것이다.
‘게다가 호흡할수록 안개에 가득한 죽음의 마나가 폐부로 밀고 들어와 몸 안쪽에서부터 갉아먹는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놓는다면 이 기운에 삼켜져 죽어 버리겠어!’
죽음의 마나는 생명체가 흡수하는 것만으로도 오한, 발열, 혼란, 무기력증을 유발하고 이내 목숨을 앗아간다.
하지만 반대로 언데드들에게는 무한한 에너지를 불어 넣는데 본래라면 완전히 박살 나서 작동이 멈춰야 할 언데드가 다시 수복되어 달려드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래서 요한이 쓰러트릴 생각 말고 돌파를 명령한 것이다. 어차피 여기 있는 언데드들은 몇 번을 쓰러트려도 다시 되살아나니까.
하지만 진짜 최악의 상황에 놓은 사람은 우려했던대로 릴리안이었다.
콰우우우우!
바람의 마나를 한껏 머금은 돌풍의 화살이 달려드는 언데드들을 갈아 버리며 쭉쭉 질주하였다.
안개 때문에 한치 앞도 보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어딜 쏘든 언데드로 가득했으니까.
돌풍의 화살은 확실한 위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마나의 소모가 너무 심해……!’
릴리안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평범한 화살로는 아무리 엘프의 강궁이 위력적이더라도 언데드에게 큰 타격을 주지 못한다.
설령 일반 화살로 언데드의 머리통을 관통한다 한들 인간이라면 즉사했을 피해라도 언데드들은 그냥 두개골에 구멍이 뚫린 정도로 끝나는 것이다.
게다가 바람의 마나는 확실히 위력 대비 마나의 소모가 낮지만 그것도 지금처럼 끊임없이 적들이 몰려들면 얘기는 달라진다.
심지어…….
쿨럭쿨럭!
갈수록 기침이 점점 더 잦아지고 오한과 어지러움이 더 심해지기 시작했다. 상극인 죽음의 마나가 하이 엘프인 그녀의 몸을 남들보다 몇 배로 빠르게 갉아 먹었던 탓이다.
“집중해! 여기서 정신 놓으면 그대로 죽는다!”
“예!”
요한은 그런 릴리안을 더 엄하게 다그치며 주변을 정리했다. 그가 오리하르콘 창을 휘두르자 창끝엣 뿜어져 나온 번개가 무서운 속도로 주변을 휩쓸었다.
지금처럼 라거와 릴리안이 크게 무리 없이 버티며 돌파할 수 있었던 것도 중견을 맡은 요한이 전후방을 적절하게 커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요한 혼자 왔다면 지금보다 더 빠르게 이곳을 돌파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한이 굳이 두 사람을 케어하며 힘들게 이곳을 돌파하고 있는 이유는 두 사람의 성장을 누구보다 바라는 사람이 요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나만 강해진다고 능사가 아니야. 각각 엘프와 드워프 진영의 중심이 될 이들이 강해질수록 제국과의 전쟁에서 이길 확률이 훨씬 더 높아질 테니까.’
이들이라면 분명 힘들고 괴로운 전투 속에서 스스로 발전 할 수 있으리라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한 요한의 확신은 곧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힘을 뚝뚝 끊어서 쓰면 힘만 낭비하고 빠르게 지칠 뿐이다. 처음의 파괴력을 계속 이어 나가야 돼!’
콰콰콰콰콰쾅!
시간이 지날수록 라거의 도끼질이 조금씩 그러나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일단 일격의 파괴력만 중시했던 도끼질에 흐름이 생기기 시작했다.
눈앞의 상대만 보지 않고 다음 상대를 생각하면서 연계를 시작하자 파괴력은 줄지 않으면서도 쓸데없는 힘의 낭비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으아아! 젠장, 또 끊겼어!”
“긴장 풀고 생각을 멈추지 마! 몸이 경직되면 생각이 굳으니까. 방향성은 좋아. 그대로만 해.”
물론 그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었기에 잦은 실수가 많았지만 그 실수로 생긴 공백은 요한이 메워 주며 어드바이스를 아끼지 않았다.
릴리안도 마찬가지였다.
‘죽음의 마나도 일종의 마나야. 하이 엘프인 내가 다스리지 못할 리가 없어!’
하이 엘프는 마나의 축복을 받은 존재들이다. 그중에서도 바람의 마나를 타고난 릴리안은 더욱 특별한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어쩌면 오만했던 건지도 모른다. 자신이 마나를 이해해 주지 않더라도 마나가 자신을 이해해 줄 거라면서…….
하지만 그건 큰 오산이었다.
죽음의 마나는 마치 소리 없는 암살자처럼 릴리안의 생명을 철저히 갉아먹었다. 그것을 이해할 수 없어 무섭고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자신이 오만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녀는 죽음의 마나에 한 발짝 더 다가설 용기를 얻었다.
죽음의 마나도 성질만 다를 뿐, 똑같은 마나다. 그녀는 처음으로 마나를 이해하 위해 직접 죽음의 마나를 몸속으로 받아들였다.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