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체감하다
“우웩……!”
당연히 처음에는 바람의 마나와 반발도 하고, 배척도 하면서 참기 힘든 고통이 전신을 엄습했다.
입에서는 피를 토하고 코와 눈에서도 피가 흘러내리며 그 고통을 짐작키가 어려운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 정도로 포기할까 봐? 웃기는 소리!”
릴리안은 무섭게 웃었다. 그것은 긍정을 넘어선 광기였다. 죽음의 마나 따위에 절대로 굴복하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았다.
그 순간, 그녀의 오른쪽 눈동자가 변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자위는 설원처럼 새하얗고 그녀의 눈동자는 설원 위에 떠오른 달빛처럼 은빛으로 빛났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오른쪽 눈자위는 칠흑처럼 검게 물들었으며 눈동자는 마치 검은 바다 위에 떠오른 붉은 달처럼 붉게 물든 것이다.
‘이건…….’
요한은 그녀의 변색된 눈동자를 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과거 신마 시대에 하이 엘프의 영광을 버리고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했다고 전해지는 다크 엘프.
그 힘은 용이나 악마에 필적했고, 모든 엘프들의 수호신이자 동시에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 다크 엘프의 상징이 바로 지금, 릴리안의 오른쪽 눈동자를 잠식한 붉은 눈동자였다.
아직 한쪽만 변한 것으로 봐서는 완전한 다크 엘프라 보기 어려웠지만 그 능력만큼은 이전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특히…….
콰우우우우우!
바람의 마나와 죽음의 마나가 혼합된 검은 돌풍이 언데드들을 분쇄해 버리고 난 이후에는 다시 언데드가 재생되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괜찮겠습니까? 지금이라도 마나를 모두 버리면 되돌아갈 기회가 있을 텐데요.”
요한은 평소처럼 편한 반말이 아니라 존댓말로 그녀의 의사를 물었다. 지금만큼은 그녀를 엘프족의 공주, 릴리안으로 대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지금 그녀의 앞에 놓인 선택의 기로는 중요했다. 하이 엘프가 죽음의 길을 선택해 타락한다는 것. 그것은 존재의 죽음과 다를 바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요한이 스스로를 사회적으로 완전히 죽인 것처럼…….
하지만 릴리안은 오히려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 정도 각오도 없이 스승님을 따르지는 않았을 거예요. 저 하나를 희생해서 동포들을 지킬 수 있다면…… 저에게 그보다 명예롭고 행복한 일은 없을 테니까요.”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요한은 그녀의 의지를 존중하며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이렇듯 라거와 릴리안이 무섭게 성장해가는 덕분에 일행은 어느새 그란체스카 성을 눈앞에 둘 수 있었다.
* * *
“와, 이건 뭐……. 지금까지가 몸풀기였다는 생각밖에 안 드네. 안 그런가, 릴리안 공?”
“…….”
라거와 릴리안은 할 말을 잃었다. 마치 지평선이 움직이듯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무시무시한 숫자의 군대 때문이었다.
“몸풀기 맞지. 지금까지는 사실상 일반 평민들이나 노예로 만들어진 언데드들이었으니까. 본능만 남은 짐승들이라고나 할까?”
요한은 가볍게 몸을 풀며 앞으로 나섰다.
문제는 뒤쪽에서도 여전히 꾸역꾸역 언데드들이 그들을 쫓아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
도망칠 구석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었다.
“블랙.”
요한이 블랙을 소환하자 그림자 속에서 블랙이 아다만티움 몽둥이를 들고 모습을 드러냈다.
“너는 두 사람이랑 같이 후방을 지켜라.”
“예, 마스터.”
블랙이 고개를 숙이며 후방으로 이동하자 라거와 릴리안이 놀라서 소리쳤다.
“이보시게, 알파 경. 설마 저것들을 전부 혼자서 처리하겠다는 생각은 아니겠지?”
“너무 위험해요!”
아닌 게 아니라 병사들의 숫자는 뒤에서 몰려드는 백성들의 숫자보다 몇 배는 많아 보였다.
병사들이 백성들보다 많다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그 이유는 언데드 병사들의 장비가 제각각인 것과 관련이 있었다.
그동안 그란체스카 성의 보물을 노리고 수많은 군대와 용병들이 이곳을 찾아왔지만 그들 모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 땅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 결과, 죽은 병사들과 용병들은 거름이 되지 못하고 또 다른 언데드 병사가 되어 새로운 희생자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결국 그 지옥의 연쇄가 반복된 끝에 일행에게 접근하고 있는 10만 언데드 군세가 완성된 것이었다.
요한은 자신을 걱정하는 두 사람을 돌아보며 얘기했다.
“걱정 말고 전투에 집중해. 내가 쓰러지지 않으면 내 뒤에 있는 동료도 쓰러지지 않는다. 이 말 명심하고.”
파지직, 콰릉!
그 말을 남긴 요한은 뇌전을 전신에 휘감으며 빛살 같은 속도로 전방을 향해 질주했다.
콰아아앙!
그와 동시에 선열을 그저 들이받았을 뿐인데 수십 미터에 달하는 폭발과 함께 수백 구의 언데드들이 박살 나며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그 모습을 보며 라거와 릴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게.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버티죠. 스승님이 보물을 가지고 돌아오실 때까지.”
“그래야지. 잘 부탁한다, 블랙.”
무오오오오!
그렇게 라거와 릴리안 그리고 블랙은 덮쳐오는 언데드들과 전투를 시작했다.
한편, 선열을 개박살 내며 무리 안으로 뛰어든 요한은 현재 언데드들을 상대로 그야말로 대학살을 펼치고 있었다.
파지직, 파직, 콰릉!
요한이 제로스의 망토를 개방하자 아공간 창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불칸의 오리하르콘 무구들이었다.
검, 창, 도끼, 철퇴 등등…… 총 서른 자루에 이르는 각기 다른 오리하르콘 무구들이 빛살처럼 빠져나와 사방을 휩쓸기 시작한 것이다.
‘나노, 썬더 호넷의 컨트롤은 네게 맡긴다.’
[알겠습니다, 마스터.]
언데드나 악마족에게 치명적인 파마(破魔)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광물은 몇 가지가 있다.
대표적으로 은.
하지만 은은 내구력이 약하고 파마의 위력도 많이 부족한 편이다.
그래서 보통 통짜 은제 무기로 쓰기보다는 코팅을 많이 하는 편인데, 그런데도 어지간한 하위 언데드들에게는 치명적인 편이었다.
그런 은보다 강한 광물이 미스릴이다. 미스릴은 철보다 강하며 파마의 기운도 상당히 강력하다.
그래서 미스릴은 통으로 무구를 만드는 경우가 많으며 때문에 파마의 효율은 은으로 코팅된 무기와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런 미스릴을 우습게 압도하는 광물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오리하르콘이었다.
신의 금속이라 불릴 만큼 강도는 아다만티움보다 단단하지만 무게는 같은 부피의 1/10도 안 되고 무엇보다 파마의 성질은 신의 축복이라 불릴 만큼 상상을 초월했다.
어지간한 언데드들은 오리하르콘 근처에만 있어도 정화가 되었으며 급이 높은 언데드 몬스터조차 스치기만 해도 정화가 되는 등…….
그야말로 최고, 최강의 금속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 무구들이 최강의 원소 마나라 칭송받는 뇌전의 마나를 품고 빛살 같은 속도로 날아다니며 언데드들을 도륙하고 있는 것이다.
언데드 병사들이 당해 낼 재간이 있겠는가? 죽음의 마나라 할지라도 오리하르콘에 당한 언데드들을 되살릴 능력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결국 숫자로 밀어붙여 봤자 그저 치워야 할 쓰레기들이 조금 더 많아진 것뿐, 요한의 근처에는 다가오지도 못했다.
게다가 죽음의 마나 역시 스스로 침투하는 성질에 더해 제반의 팔찌가 우악스럽게 빨아들이자 차고 넘칠 만큼 요한의 몸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문제는 죽음의 마나조차 뇌전의 마나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뇌전의 마나에 의해 정화된 죽음의 마나는 평범한 마나로 환원되어 요한의 몸속에 흡수되었다.
그 때문에 넘처나는 마나를 바탕으로 서른 자루의 무구들은 끊임없이 전장을 비행하며 언데드들을 도륙할 수 있었다.
그러자 이내 접근하는 것보다 소멸되는 언데드들의 숫자가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더러는 요한을 무시하고 블랙과 라거, 릴리안에게 접근하는 놈들도 있었다.
“하는 수 없지.”
파지직, 콰르릉!
요한이 뇌전을 두른 채 전장을 질타했다. 그런 요한을 중심으로 서른 자루의 무구들이 자유롭게 비행하며 언데드들을 도륙하자 50만이 넘던 언데드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결국…….
방금 전까지 지평선을 가득 메웠던 언데드 군대는 어디가고 박살 난 잔해만이 땅을 뒤덮었다.
요한은 뒤를 돌아보았다.
“타압!”
“으랏차차차!”
무오오오오!
그곳에선 언데드들을 상대로 일행들이 선전을 펼치고 있었다. 다소 위태롭고 힘들어 보이는 면도 많았지만 블랙이 있으니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요한의 시선이 다시 한번 정면으로 향했다. 저 멀리, 안개 속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성의 실루엣이 그의 목적지였다.
파앗!
요한은 하늘로 둥실 날아오르더니 빠른 속도로 성을 향해 비행을 시작했다.
* * *
성은 대단히 고풍스럽고 웅장했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보면 모진 세월을 가까스로 견디고 있는 흔적이 군데군데 엿보였다.
그러나 가장 큰 특징은 성에서 느껴지는 사악하고 거대한 죽음의 기운이었다.
끼이이익…….
요한이 성문 앞에 도착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성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요한은 열린 성문을 통해 망설임 없이 성으로 들어섰다.
그렇게 외성문을 지나 마찬가지로 열려 있는 내성문을 들어서자 드디어 손님을 반겨 주는 사람들을 만나 볼 수 있었다.
“이거 다음에 다시 찾아올 걸 그랬나? 분위기가 영 흉흉하네.”
철컥, 철컥…….
한 손에는 검은 오러가 깃든 검을, 한 손에는 붉은 안광이 흉흉한 머리를 들고 있는 목 없는 기사들이 강철 군화를 철그럭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혼자서 기사단 하나 정도는 전멸시킬 수 있는 상급 언데드 몬스터, 듀라한.
그런 듀라한이 무려 쉰 마리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내가 바빠서 그런데 길 좀 열어 달라고 부탁하면…….”
크어어어어!
가장 선두에 있던 듀라한이 괴성을 지르며 무서운 속도로 요한을 향해 달려들었다.
한계를 모르는 언데드의 육신이 검은 오러로 강화되자 그 움직임은 이미 어지간한 오러 익스퍼트의 기사를 능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번쩍! 서걱!
요한에게 접근한 녀석의 검이 요한의 머리 위로 떨어지기 직전에 녀석의 몸뚱이가 반으로 갈라졌다.
파지직.
뇌전과 함께 바닥에 깊숙이 꽂힌 오르하르콘 검에 걸려 허무하게 잘려 나간 것이다.
“역시 들어줄 생각은 없으려나?”
크어어어어어!
동료의 죽음을 보고 흥분한 것인지, 아니면 언데드의 본능이 살아 있는 요한을 적으로 인식한 것인지…… 녀석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괴성을 내지르며 요한에게 달려들었다.
요한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상태로 평범하게 걸었다. 굳이 일부러 손을 쓸 필요도 없었다.
쒜엑, 슈웅! 서걱! 촤아악!
나노 크리에이터가 조종하는 서른 자루의 오리하르콘 무구들이 듀라한을 도륙했기 때문이다.
요한이 하는 건 그저 무구들에 담긴 마나가 바닥나지 않도록 그때그때 충전해 주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요한의 등 뒤로는 쉰 마리에 달하는 듀라한의 시체들만 나뒹굴고 있을 뿐이었다.
요한은 그 모습을 슬쩍 돌아보더니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뭔가 괴물이 되어가는 느낌이네…….’
회귀 전의 자신이었다면 전성기였어도 놈들을 상대하는데 상당한 애를 먹었을 것이다. 물론 당연히 이기겠지만 결코 쉬운 승리는 아니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솔직히 말해서 거의 반쯤은 장난이었다. 손을 쓰지 않고도 놈들을 쓰러트릴 수 있을까 호기심으로 시작했던 것이 너무나도 간단하게 현실이 되었다.
지금 자신의 강함은 그런 레벨까지 오른 것이다.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