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90화 (90/150)

90. 암흑신과의 계약

칠흑보다 깊은 어둠 속에서 한 인간의 숨소리만 나직하게 들려왔다.

후우우우우우우…….

사내를 감싸고 있는 건 주변에 가득한 어둠보다 더 깊은 암흑이었다.

연기처럼 살랑거리며 생물처럼 꿈틀거리던 그것은 사내의 몸을 드나들면서 마치 의복처럼 그의 몸을 휘감았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죽여…….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건 끔찍한 살의뿐. 그 살의의 대상이 누구인지, 누굴 죽이라는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의식을 받았던 대부분의 황족들은 이 단계에서 미쳐 죽는다. 광인이 되어 살육을 일삼거나, 자기 자신을 죽이는 베드 엔딩으로 막을 내리는 게 대부분이다.

‘…….’

하지만 사내는 머릿속을 울리는 끔찍한 저주의 목소리에도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내의 의식이 목소리를 집어 삼키는 듯한 모습마저 보였다.

이렇게 목소리를 무시하고 의식을 삼키기까지 1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곧 목소리가 잠잠해지자 이번에는 다른 무언가가 사내의 의식을 침범하기 시작한 것이다.

콰우우우우우……!

그것은 분노, 증오, 원한, 박탈, 공포, 억압, 절망 같은 감정의 해일이었다.

그 거대한 파도는 사내의 의식을 집어삼켜 이리저리 휘몰아쳤다. 여기서 버티지 못하면 그것으로 백치가 되어 평생을 식물인간처럼 살아야만 했다.

하지만 사내의 의식은 마치 깎이지 않는 바위처럼 그 자리에 존재했다. 그 어떤 끔찍한 감정이 의식을 침범해도 절대로 거부하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그 감정이 두려워 거부하는 순간, 절대로 의식을 성공할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끔찍한 감정의 격류를 받아들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사내는 끝끝내 그것들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그 감정이 마치 처음부터 자신이 느꼈던 것처럼 생생하게 와닿았다.

문득 사내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흘러넘치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주체할 수 없었던 탓이다.

그리고 현재…….

사내는 꿈을 꾸고 있었다.

사내는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일이었지만 마치 자신이 겪은 것처럼 생생하게 와 닿았다.

그곳에서 자신은 ‘신’이었다. 그것도 수억, 수십억이 넘는 신도들과 천사들을 거느린 절대자가 바로 자신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영역은 이미 포화 상태였고 자신의 신도들과 자식들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또 다른 터전이 필요했다.

이대로라면 자멸은 필연적이었으니까.

자신은 오랫동안 그 터전을 찾아 헤맸다. 수십, 수백, 수천 년도 우스운…… 족히 수만 년 동안 수많은 차원들을 찾아 헤맨 끝에 마침내 최적의 행성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곳은 이미 주인이 있는 행성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빼앗으면 그만이었고 그만한 능력이 자신에게는 있었으니까.

그렇게 곧, 차원 간의 전쟁이 일어났다.

신은 금방 결판이 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파지직, 콰릉!

이제는 보기만 해도 공포와 분노가 차오르는…… 천둥 벼락을 휘두르며 전장을 질타하는 한 명의 신 때문에 자신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결국 신은 자신의 신도들, 그리고 자식들과 함께 봉인당했지만 그 파편을 어떤 인간 무리에게 남길 수 있었다.

다행히 인간은 욕심이 많은 존재들이었고 곧 그 파편에 담긴 지식과 힘을 계기로 하나의 거대한 문명을 만들어 부흥시켰다.

이제 부활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한 신에게 벽력과도 같은 결과가 찾아왔다.

문명이 멸망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부흥시킨 것도 욕심이라면 멸망시킨 것도 욕심 때문이었다.

신은 계획을 바꾸기로 했다. 자신의 의지를 담은 대리자를 세워 뜻대로 조종하기로…….

그러나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파편에 찌꺼기만 남은 의식이라 하더라도 신의 의식은 인류의 인지를 아득히 초월했으니까.

그 의식의 일부라도 담을 수 있는 그릇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천 년 전, 그 의식의 일부를 아주 약간이나마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나왔다.

기뻤다. 하지만 시기상조였다.

자신을 부활시키기 위해서는 인류 전체를 제물로 바쳐 의식을 치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당시 제국의 능력으로는 인류를 통합하기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다시 때를 기다렸다. 수천 년 정도 기다리는 건 신에게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고작 천 년 만에 이만한 그릇을 손에 넣을 수 있을 줄이야…….

‘당신인가, 봉인당한 암흑신이라는 존재가.’

-내 의식을 접하고도 여전히 자아를 의지할 수 있는가? 제법 흥미로운 녀석이군.

‘지나간 과거 따윈 내 알 바 아니다. 중요한 건 당신이 내게 도움이 될 만한 존재인지 아닌지, 그뿐이니까.’

암흑신은 사내와 똑같은 모습으로 사내 앞에 섰다. 물론 그것은 사내의 모습을 잠시 빌린 것일 뿐, 그의 본 모습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다. 나 역시 네가 내게 도움이 될 만한 녀석이라면 네가 어떤 녀석이든 상관없긴 하지. 그래도 통성명 정도는 하고 지내자고. 당분간 함께 지내게 될 사인데 말이야.

‘헥토르 바젤 폰 트리스탄이다.’

-반갑다, 헥토르. 나 자신에게 정해진 이름은 없지만 나를 부르는 이름은 많거든. 대부분은 나를 ‘쿠’라고 부르지만 아무거나 편하게 불러도 상관없어. 어차피 네가 뭐라고 부르든 네 의식은 내게 전달될 테니까.

‘알았다, 쿠.’

-그럼 난 네 의식 속에 지내면서 네가 하는 일을 지켜보도록 하지. 하지만 명심해라. 네가 나와의 계약을 어기는 순간. 네 꿈도 무너진다는 것을…….

쿠가 의식 속으로 사라지자 헥토르가 눈을 떴다.

순간 칠흑처럼 검게 물들었던 그의 눈동자는 흡수되는 검은 연기와 함께 서서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렇게 기운을 갈무리 한 헥토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단을 나섰다. 그는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향하더니 시종에게 명령을 내렸다.

“폐하를 알현하기 전에 잠시 시험해 볼 것이 있다. 검성을 호출하라.”

* * *

헥토르는 자신의 개인 연무장에서 검성을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허리춤에 검을 찬 중년의 사내가 연무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황자 전하! 진심으로 감축드리옵니다! 설마 3년 의식에 성공할 거라고는…… 솔직히 소신도 의심을 감추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하하하!”

검성(劍聖) 메르페우스.

사람 좋게 웃어 보이는 이 중년인이야말로 제국의 숨은 실력자 중 한 명이었다.

그동안 제국이 쌓아 온 지식, 정보, 노하우, 자금을 쏟아부어 만든 제국의 비밀 병기. 그중 한 명이 바로 검성 메르페우스였던 것이다.

“하면 내가 검성을 호출한 이유도 알고 있겠군.”

“얼굴을 보자마자 바로 본론이십니까? 하긴, 그게 더 황자 전하답긴 하네요. 그럼 어디…… 황자 전하께서 손에 넣으셨다는 그 힘을 한번 견식해 보도록 할까요?”

슉.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메르페우스의 신형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한순간에 거리를 지우고는 헥토르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휘우~!”

메르페우스는 감탄의 의미가 섞인 휘파람을 불었다.

초고속 접근 후에 빠른 발검술. 필살기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걸 막아 낼 만한 강자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그런데 헥토르는 검도 꺼내지 않고 자신의 발검술을 막아 버렸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막은 게 아니라 막힌 건가?’

헥토르는 처음처럼 그저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을 뿐이었다. 자신의 검을 막은 것은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검은 연기였다.

손으로 대충 휘저으면 가볍게 흩어질 것 같은 검은 연기가 어떻게 성벽도 푸딩처럼 자를 수 있는 자신의 검을 간단히 막아 버린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럼 좀 더 레벨을 올리도록 하죠, 전하.”

촤촤촤촤촤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메르페우스의 칼끝이 흐드러지며 수십, 수백 개가 넘는 초승달 모양의 검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 검기 모두 퍼펙트 오러를 품은 것들로 하나하나가 능이 대저택 하나는 반으로 갈라 버릴 수 있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검은 연기가 너울너울 춤을 추면서 어렵지 않게 검기를 집어 삼키기 시작했다. 검은 연기에 삼켜진 검기들은 힘을 잃고 그대로 소멸하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스으으으…….

검은 연기는 소리 없이 빠르게 메르페우스를 향해서 접근했다. 마치 촉수를 뻗듯이 사방팔방에서 뻗어 나오는 검은 연기를 피해 메르페우스가 움직였다.

‘갈수록 빨라지는군. 힘을 쓰는 방법을 학습하고 있는 건가?’

처음에는 바람보다 빠른 메르페우스의 움직임에 대응하지 못했지만. 촉수는 무서운 속도로 빠르게 성장하며 그를 따라잡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우우웅!

그 순간, 그의 검이 공명했다. 새하얀 퍼펙트 오러 주변에 핀 공간의 아지랑이……. 바로 그랜드 오러 마스터의 상징인 앱솔루트 오러였다.

“이번에는 긴장 좀 하셔야 할 겁니다, 전하!”

콰앙!

메르페우스가 지면을 박차는 순간, 훈련장 바닥이 박살 나면서 그의 신형이 공간을 관통하였다.

서걱!

그리고 망설임 없이 헥토르의 목을 베어 버리는 메르페우스. 그의 검격에는 단 일말의 망설임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챙그랑…….

잘려 나간 것은 헥토르의 머리가 아니라 메르페우스의 검이었다. 앱솔루트 오러로 무장된 검이 반 토막이 나서 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이런, 긴장할 사람은 전하가 아니라 저였나 보네요. 하하하…….”

메르페우스는 머쓱하게 웃으며 부러진 검을 쳐다보았다.

‘전력을 실은 앱솔루트 오러는 아니었지만 아마 전력을 담았다고 해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겠지?’

“전하께서 손에 넣으신 그 힘 말입니다. 뭔가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는 강함의 개념은 확실히 아닌 것 같습니다.”

메르페우스는 부러진 검을 납검하며 헥토르에게 자신의 의견을 전했다. 헥토르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공감했다.

“그럴 거다. 이건 힘이 아니라 의지에 더 가까우니까.”

“의지만으로 검을 막을 수 있다면 검에 베여 죽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텐데요.”

“단순한 인간의 의지라면 그렇지. 하지만 ‘신’은 다르다. 신은 그 존재 자체가 의지의 집합체…… 즉, 이 힘이 곧 의지이자 의지가 곧 신이라는 뜻이다.”

“그 힘이 신이라면 그럼 저는 방금 신을 베려고 한 겁니까? 어쩐지, 쉽지 않더라니.”

끝까지 능청스러운 메르페우스의 모습에 헥토르는 살짝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피식 웃었다.

“검성 그대라면 언젠가는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이제 나는 폐하를 만나러 가야겠다.”

“그 말씀은…….”

메르페우스의 두 눈에서 안광이 번뜩였다.

“그래. 모든 준비는 끝났다.”

“드디어 성전이 시작되겠군요.”

잔뜩 기대에 부푼 메르페우스에게 헥토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것은 전쟁이 아니다. 우리가 대륙의 주인이 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과정일 뿐이지.”

걸릴 것은 없었다.

그림자들은 이미 각국의 높은 자리에 침투하여 분란 조성을 준비 중이고, 제국은 암암리에 남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 힘을 키워왔다.

메르페우스가 바로 그 증거였으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3년 의식을 거쳐 헥토르 자신이 암흑신과 계약을 맺었다. 그 힘은 그랜드 오러 마스터인 검성 메르페우스조차 쉽게 제압할 수 있을 정도 였으니…….

이런 압도적인 상황에서 감히 누가 맞서고, 누구와 전쟁을 벌인단 말인가?

헥토르의 말처럼 어찌 보면 이건 트리스탄 제국의 도래를 선포하는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지도 몰랐다.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