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검은 칼바람의 탄생
“먼저 내 소개를 하지. 난 요한. 요한 크림포드라고 한다. 만나서 반갑다, 라즈. 뭐, 이런 식으로 인사하게 된 건 본의가 아니었지만.”
-네 녀석이 이 괴물의 주인인가?
라즈는 화이트를 가리키며 요한에게 물었다.
“맞아. 하지만 화이트를 괴물이라고 부르기엔 너도 만만치 않다? 그건 알지?”
-무슨 이유로 우리를 찾아 온 것이냐.
“걱정 마. 너희들한테 위해를 끼치려고 찾아온 건 아니니까.”
라즈는 그 말을 반쯤은 신용할 수 있었다.
봉우리 위에서부터 지켜보았다. 요한과 화이트가 이곳으로 접근하는 모습을.
수많은 동족들이 덤벼들었고 놈들은 그런 동족들을 압도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단 한 마리의 동족도 살생하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만큼 압도적인 능력차가 있긴 했지만, 신경에 거슬린다면 얼마든지 죽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이곳을 찾아온 건 너희들과 협상을 하기 위해서다.”
-협상? 그게 뭐지?
“너희에게 필요한 걸 대가로 주는 대신 우리가 필요한 걸 너희들로부터 받는 거지.”
요한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사태로 엉망이 된 설원은 평소보다 더욱 혹독하고 삭막해 보였다.
“듣자 하니 북부에 터를 잡은 이후로 고질적인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다는 데 맞아?”
-…….
라즈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적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즈의 침묵으로 요한은 자신이 조사한 바가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확실히 북부의 고산지대는 좋은 곳이지. 특히 너희처럼 두꺼운 털가죽을 가지고 있어 보온이 특별히 좋은 녀석들은 천적들로부터 안전하게 새끼를 키울 수 있는 곳이기도 하고.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요한은 삭막한 설원을 고갯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너희들만 살기 좋은 환경이라 먹잇감이 부족하다는 거겠지. 간혹 영역 경쟁에서 밀리거나 떠돌이 몬스터, 혹은 짐승들이 흘러 들어왔을 때나 사냥했을 거고. 그렇다고 비교적 먹이가 풍부한 중부로 진출하자니 오크들 때문에 그것도 쉽지 않고. 안 그래?”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식량을 제공해 주지. 너희 동족들이 이 혹한의 설원에서 풍족하게 먹고 살며 후손을 기를 수 있을 정도의 식량을 말이야.”
크르르르……!
요한의 제안에 라즈는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우리더러 인간의 가축이 되란 말이냐!
“가축 무시하지 마라. 가축은 우리한테 도움이라도 되지. 너희는 뭔데? 있어 봤자 위협밖에 더 되냐? 이제 곧 대륙에 큰 전쟁이 벌어질 거다. 장담하는데 어느 쪽이 이기건 너희는 멸망한다. 어느 쪽이 이기건 너희는 위협밖에 되지 않으니까.”
-쓸데없는 참견이다. 우리는 싸울 것이다. 마지막 한 마리가 남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이 우리 고고한 다이어 울프의 긍지이자 명예이다!
“멸망뿐인 승리에 명예고 지랄이고 그딴 게 있을까!”
쿠르르르릉……!
그 순간, 요한의 일갈이 설원 전체에 울려 퍼지며 겨우 정적을 되찾았던 설원이 다시 한번 몸살을 앓았다.
그 기세가 얼마나 사납고 거대했는지 멀리서 지켜보던 다이어 울프들조차 위축되어 꼬리를 말 정도였다.
당연히 눈앞에 있던 라즈는 기세가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건 짐승이건 몬스터건 다른 뭐가 됐건 간에 생명체의 승리는 생존뿐이다. 나머지는 개똥이나 처먹으라 그래. 그래서 네놈은 갓 태어난 네놈들의 자식들에게 명예를 위해 죽음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할 수 있나? 그게 가능하다면 네놈은 우두머리가 아니다. 그저 명예와 긍지라는 허울에 미친 사기꾼일 뿐이지.”
-그래서 결론은 네놈들의 가축이 되어 복종하라는 게 아니더냐. 결국 네놈은 네놈의 잇속을 채우기 위해 그럴듯한 궤변을 지껄이고 있을 뿐이다.
“내 잇속을 채우는 게 뭐가 어때서? 그게 창피한 일인가? 해서는 안 될 짓인가?”
-……?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오히려 본심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요한의 모습에 라즈는 눈을 부릅뜨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네 말이 맞아. 너희들을 가축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너희들의 힘이 필요해서 너희들을 이용하려는 건 사실이다. 그래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가족들, 친구들, 나라를 지킬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너희도 우릴 이용하란 말이다. 너희의 가족을, 친구를, 동족들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야.”
요한은 주먹을 내밀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이걸 ‘동맹’이라고 부르지. 서로 같은 입장에서 동등하게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 상대와 힘을 합치는 거다.”
-동맹?
“네가 말한 가축은 필요에 의해 착취당할 뿐인 존재지만 동맹은 달라. 필요한 것을 내주고, 필요한 것을 얻지. 그 과정에서 너희들에게 부당하다 생각되는 부분이 있으면 언쟁하고 조절하면 된다. 그조차도 불가능하면 그때는 손을 놓으면 되는 거라고. 쉽지? 생각할 건 오로지 아군의 안위와 이익뿐이다.”
요한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신들은 진흙탕을 기더라도 동족들을 지키고 풍요롭게 살게 해 주겠다는 각오와 동족들이 멸망해도 자신들만큼 고고히 살아가겠다는 고집. 어느 쪽이 더 명예롭고 긍지 높을 것 같아?”
-…….
라즈는 고개를 돌려 동족들을 살펴보았다.
걱정 가득한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동족들의 모습은 자세히 살펴보면 초췌한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특히 가죽이 두껍고 털이 길 뿐, 살은 거의 깡마르다시피 해서 요즘에도 굶어죽는 동족들의 숫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 동족들의 고기를 먹어 버티고는 있었지만 그걸 단 한 번도 명예롭거나 긍지 높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저 운명이라고 생각했기에 받아들였을 뿐.
그런데…….
봉우리 위에서 작은 늑대 한 마리가 허겁지겁 달려 내려왔다. 어미 늑대가 말리려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컹컹컹컹!
그렇게 위험한 산비탈을 필사적으로 뛰어 내려온 작은 새끼 늑대는 아빠를 위협하는 적에 맞서 그 작은 체구로 힘차게 요한을 향해서 짖었다.
“네 자식이냐.”
-그렇다.
“애가 아빠보다 낫네. 아빠는 긍지를 위해서 자식을 죽일 생각을 먼저 하는데 자식은 그런 부모라도 아비라고 지키고 싶은 모양이야.”
-…….
라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을 지켜 주던 작은 기사의 얼굴을 핥아주더니 살며시 옆으로 비켜 세웠다.
-네놈의 가축이 되면 내 자식들은…… 우리 동족들은 앞으로도 무사히 풍족하게 살 수 있는가?
“가축이 아니라 동맹이라니까.”
-가축이든 동맹이든 뭐가 됐든 상관없다. 네놈의 말처럼 나는 일족의 우두머리로서 우리 동족들이 풍요롭고 안전하게 살 수만 있다면 진흙탕이라도 구를 테니까.
라즈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 요한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야 일족의 우두머리다운 얼굴이 됐네.”
* * *
“……진짜로 데려왔네?”
“그럼 만년설 덮인 그 추운 곳까지 산책하러 갔다 왔겠냐?”
요한은 다이어 울프들을 보고 어벙해져 있는 가루칸에게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오크족 마을 입구까지 찾아온 다이어 울프들과 오크 전사들 사이에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전사들도 요한이 직접 울프들을 끌고 왔기 때문에 더 이상 녀석들을 자극하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 두 무리 사이에서 보이는 긴장감은 지금 당장 유혈 사태가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역시 사이가 썩 좋지는 않은가 봐?”
“대부분 녀석들을 마주쳤을 때는 춘궁기였으니까. 서로 먹이가 부족한 탓에 서로 보이면 싸워서 잡아먹기 일쑤였지. 솔직히 이렇게 오래 눈 마주치고 있는 것도 처음이다.”
그사이, 라즈가 가루칸에게 다가왔다.
-오랜만이군, 가루칸. 대족장이 된 모양이지?
“그쪽도 우두머리로서 고생이 많은 모양이네, 라즈. 사실 이렇게 대화하는 것도 뭔가 어색하지만.”
양쪽의 수장이 만나서 인사를 나누자 그나마 조금 긴장감이 완화되는 느낌이었다.
“어때? 이만하면 충분하지?”
요한이 다이어 울프들을 가리키며 묻자 가루칸이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충분하냐고? 푸하하하하! 우리 전사들이 이 사나운 녀석들을 타고 전장에 나간다면 그건 이미 전쟁이 아니라 학살이 될 거다.”
“그러면 더 좋고. 어디 보자, 그럼 짝은 어떻게 정해야 하나…….”
“그건 우리에게 맡겨 주지 않겠나?”
“무슨 좋은 수라도 있어?”
요한이 묻자 가루칸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전장에 서면 서로 목숨을 지켜 줄 전우를 선택하는 일이다. 적어도 이 새끼면 나쁘지 않겠다 정도의 확신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 안 그러냐? 라즈.”
-동감이다.
가루칸은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기수 지원한 놈들은 후딱 튀어 나와라!”
기수를 지원한 전사들 스물이 빠릿하게 튀어나오자 라즈도 마찬가지로 다이어 울프 스무 마리를 앞으로 보냈다.
그에 가루칸이 두 무리 사이에 서더니 양쪽을 향해서 외쳤다.
“지금부터 전사들은 무기 사용 없이 맨주먹으로, 다이어 울프도 이빨이나 발톱을 사용하지 않고 1 : 1로 붙는다. 그렇게 붙어서 둘 중 한 놈이라도 아니다 싶으면 다른 녀석들로 교체해서 다시 싸운다. 만약 둘 다 서로가 괜찮다 싶으면 그렇게 짝을 맺을 거다. 알았나!”
라즈도 가루칸의 말을 다이어 울프에게 그대로 전달하였다. 다이어 울프 역시 룰이 마음에 들었는지 꽤나 즐거워하는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그럼 시작!”
“으랏차차차!”
크르르릉!
가루칸이 하늘높이 들었던 손을 내리기가 무섭고 오크들과 다이어 울프의 난전이 시작되었다.
서로 무기와 발톱, 이빨 등을 쓰지 않기 때문에 사망이나 큰 부상은 발생하지 않겠지만 서로를 쓰러트리겠다는 의지만큼은 절절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훗날 구르칸 산맥 최강의 부대라 칭송받는 기랑 부대, ‘검은 칼바람’이 탄생하고 있었다.
* * *
산맥에서 할 일을 모두 마치고 산을 내려온 요한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가니온 유스터프 공작가였다.
“무사히 다녀오셨습니까. 전하, 대업을 완수하심에 진심으로 감축드리옵니다.”
요한이 귀빈실의 상석에 앉자 가니온이 그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며 축하를 건넸다. 그에 요한은 고개를 저었다.
“대업이라니, 이제 고작 한 계단을 올랐을 뿐이네. 내가 황위에 앉는 그날, 이 나라의 제후가 되어 있을 자네의 축하를 다시 받도록 하지.”
“그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하온데 황실에서 내려온 전갈은 받으셨습니까?”
“전갈? 혹시 내가 해저 신전의 유물을 찾으러 갔을 때 온 건가……?”
“역시…… 저도 그런 줄 알고 전하께서 모르실 것 같아 말씀 올리옵니다. 얼마 전에 황실에서 전갈이 내려왔습니다. 드디어 천 년 만에 황실의 대업을 이루시겠다는 전갈 말입니다.”
“……!”
요한은 드디어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본격적인 내전은 조금 더 시간이 걸리지만, 이러한 황제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각 나라에서 그림자들이 내전을 준비했던 것이다.
“그렇다는 말은 헥토르 형님이 의식을 무사히 마치고 복귀했다는 말이겠군.”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도 계획을 서둘러야겠다. 가니온, 지금 즉시 군을 소집하라. 남부 대륙을 내가 먼저 정벌하여 아버지께 내 능력을 증명하겠다. 그리고 이 나라에서 암약 중인 임페리얼 섀도를 모두 지정된 장소로 소집하여 화를 피하는 것도 잊지 말고.”
“분부대로 거행하겠나이다.”
깊숙이 고개를 숙이는 가니온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요한의 눈빛을 미처 살피지 못했다.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