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요한, 대공이 되다
국왕과 요한이 합심하여 퍼트린 소문은 날개 달린 말보다 빠르게 왕국 전체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당연히 왕도로 향하고 있던 예가르 아반가르디 남작가에도 이 소식이 전해졌다.
“뭐? 정말 알파 경이 크림포드 백작가의 요한 도련님이었다고? 하지만 그분은 돌아가셨잖아?”
“자신의 죽음마저 위장한 거죠. 전하의 명령으로 어릴 적부터 미친 짓까지 하며 주변 사람들을 속이셨던 분이 죽음인들 속이지 못할까요? 그 어릴 적부터 자신의 명예와 긍지까지 모두 버려 가며 오로지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기사라니…… 결심했습니다, 오늘부터 제 목표는 형이 아니라 요한 도련님입니다.”
리리아의 호위 기사 클레번의 마음속에는 어느새 예가르의 호위 기사이자 아반가르디 남작가의 기사단장인 클레도르를 제치고 요한이 1위로 우뚝 섰다.
현실은 클레번 같은 기사들이 현재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는 것이다.
소문의 진위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드러난 결과였으니까. 드러난 결과가 소문의 정당성을 입증했다.
“알파 경이 요한 도련님이었다니…….”
말을 타고 가면서 홀로 넋을 놓고 중얼거리던 리리아.
그녀는 자신이 보고 들었던 요한이라는 인물과 한때나마 마음에 품었던 알파가 같은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쉽사리 납득하지 못했다.
“아, 그러고 보니 아가씨. 그때 했던 말씀 말입니다.”
“응? 내가 언제 무슨 말을 했는데?”
“하워드 소백작님이 주관하시는 파티에 다녀오신 후에 아가씨께서 요한 도련님에 대해 말씀하셨잖아요.”
“아, 그거…….”
클레번은 리리아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날 제 실언을 사죄드립니다. 역시 아가씨, 하여간 사람 보시는 안목은 탁월하시다니까. 당시에는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아가씨의 말씀처럼 요한 도련님이 진짜 아가씨를 지키기 위해서 그런 일을 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정말로요. 우와! 그렇게 생각하니까 기사도의 표본이 따로 없네요. 자신의 피앙세를 지키고 약혼을 일부러 파기하기 위해서 스스로 오물을 뒤집어쓰다니…… 이건 뭐, 기사 이전에 남자네, 남자야.”
“…….”
리리아는 옆에서 떠드는 클레번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시종일관 표정이 어두워 보였다. 클레번은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안타까움에 혀를 찼다.
그는 조심스럽게 리리아를 위로했다.
“걱정 마세요, 아가씨. 아가씨 잘못으로 약혼이 파기된 게 아니잖아요. 요한 도련님도 그때는 나름의 사정이 있던 거니까. 파기한 약혼이라도 되돌릴 수 있을 거예요. 예가르 경께서도 이번 아가씨의 재약혼에 가문의 명운을 건다고 말씀하셨을 정도니까 분명 잘될 거예요.”
클레번은 얘기하면서도 안타깝지만 사실 그건 현실성이 매우 낮다고 생각했다.
요한은 뇌전의 마나를 다루는 전설에서만 볼 수 있었던 아바타다. 게다가 국왕의 총애를 받으며 반역자들로부터 나라를 구한 구국의 영웅이었다.
또한 막강하고 난폭하기로 소문난 구르칸 오크족들과의 동맹을 추진하였으며, 오크족뿐만 아니라 다른 아인종들과도 스스로 교류를 맺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이 정도라면 설령 요한이 노예였다 하더라도 작위를 주고 국왕이 공주를 시집보내려고 안달이 날 수준의 업적이었다.
이제는 가니온마저 사라져 명실상부 귀족들 가운데 으뜸이라 할 수 있는 크림포드 백작가의 차남인 것이다.
위 업적 중 하나만 달성했다 하더라도 왕국 1등 신랑감이자 사윗감인데, 요한은 저 모든 업적을 혼자 달성했다.
이제 와서 뭐가 아쉬워 약혼을 파기한 남작가의 여식과 약혼을 다시 맺겠는가? 클레번은 슬프지만 냉정하게 봤을 때 그럴 가능성은 한없이 0%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네? 그야 아가씨께서 너무 의기소침해 계시니까 응원해 드린 거죠.”
“에휴, 바보야! 내가 우울했던 건 요한 도련님과 다시 맺어지지 못할까 봐 걱정한 게 아니야. 너에게 그 말을 하고 난 직후의 내 행동 때문이지.”
“아가씨의 행동이요?”
리리아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파티장에서 있었던 상황을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했거든. 머리와 심장은 항상 같아야 한다. 그것이 벨로반 기사의 제1 덕목이다. 너도 알지?”
“그거야 그렇지만…… 그때 그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요한 도련님의 행동이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상상 못 했을걸요.”
“요한 도련님의 의도가 중요한 게 아니야. 내가 그렇게 생각했으면 그렇게 믿고 고마움이라도 글로 담아 전했어야 했어. 설령 그 마음을 요한 도련님이 어떻게 받아들이든 상관없이 말이야. 그게 기사의 덕목이니까.”
“아가씨…….”
클레번은 안타까운 얼굴로 리리아를 쳐다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도련님은 정말로 대단한 기사가 맞는 것 같아. 나라를 위하는 생각과 마음이 똑같으니까 그런 모진 세월도 견뎌 가면서 지금의 그분이 되신 거겠지. 언젠가 나도 그런 멋있는 기사가 될 수 있을까?”
“아가씨라면 반드시 될 겁니다.”
“그때까지 도와줄 거지, 클레번?”
“물론이죠!”
* * *
요한은 왕도에 위치한 백작가의 사택에서 왕성으로 가는 동안에도 백성들의 환호성이 이어졌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성을 뒤로하고 입성한 요한.
그랜드 홀 앞에 멈춰 서자 거대한 문이 양쪽으로 열리며 안쪽에 있던 왕과 귀족들의 모습이 한눈에 보였다.
요한은 보무도 당당하게 레드카펫을 걸어 어전으로 나아가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요한 크림포드 명예 대공은 일어나 고개를 들라.”
그러자 포라드가 요한에게 일어날 것을 종용했다.
요한은 국왕의 말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인자하게 미소 짓고 있는 포라드 왕과 왕비의 얼굴이 보였다.
“명예 대공직이라고는 하나 자네는 엄연한 벨로반 왕국의 대공일세. 굳이 남들처럼 격식을 갖춰 과인을 어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일세. 하기야, 이제는 명예직이라는 말조차 우습구먼.”
포라드는 중앙 레드 카펫을 기준으로 양쪽에 도열해 있는 귀족들을 둘러보았다. 숫자는 평소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들은 모두 믿을 수 있는 자신의 귀족들이었다.
“모양새는 초라해졌지만 마음은 예전보다 더 든든한 것 같군. 경들이야말로 이 나라의 진짜 기둥들이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그런 경들에게 내 한 가지 의견을 물어볼까 하오. 현재 요한 크림포드 명예 대공의 대공직은 사실상 명예직이라 그 실효성이 전혀 없는 것이나 다름없지. 하지만 그가 구르칸 산맥에서 이룬 업적, 그리고 우리나라를 위해 이룬 업적들을 고려해 봤을 때, 더 이상 명예 대공으로 그를 대하는 건 우리 벨로반의 국격이 훼손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하오. 경들의 생각은 어떻소?”
그 자리에는 당연히 하이든 크림포드 백작과 하워드 역시 참석 해 있었지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 식구 감싸기가 될 수도 있었으니까. 게다가 굳이 두 사람이 입을 열지 않아도 얘기할 사람은 차고 넘쳤다.
“전하, 우리 왕국은 예로부터 신상필벌이 가장 엄격하고 확실한 나라로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웠나이다. 국운을 위협한 반란의 무리를 그에 걸맞게 단죄하여 벌한 것처럼 구국의 영웅에게는 그에 걸맞은 상이 필요하다 사료되옵니다.”
“요한 크림포드 명예 대공의 업적은 고금을 통틀어도 찾아보기 힘든 일들입니다. 그러한 신위에 굳이 과거의 잘못을 꼬집어 반대할 신하는 없을 것이옵니다.”
“전하의 뜻대로 하소서. 신들은 따르겠나이다.”
모든 신하들이 한 목소리로 포라드의 의견에 찬성했다. 그러자 하이든과 하워드 역시 그들의 말에 맞춰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아버지…….’
하워드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가 미소를 그렸다. 고개 숙인 아버지의 얼굴 밑으로 흐르는 눈물을 봤기 때문이었다.
“경들의 뜻은 잘 알겠네. 하면 요한 크림포드 명예 대공은 내 앞으로 와서 서게.”
“예, 전하.”
“시종장은 대공의 망토를 가져오라.”
요한이 포라드의 부름을 받고 그의 앞으로 다가가 서자 시종장이 기다렸다는 듯 하얀 깃털로 장식된 붉은 푸른 망토가 담긴 선반을 가지고 왕에게 다가왔다.
붉은 망토는 왕의 상징, 보라색 망토는 왕비의 상징. 그리고 푸른 망토는 좀처럼 보기 힘든 대공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썩 잘 어울리는군.”
포라드는 요한의 등 뒤로 대공의 푸른 망토를 둘러 주었다. 기사라면 검으로 임명하겠지만 대공은 이런 식으로 왕이 직접 망토를 둘러 주는 것으로 임명식을 대신했다.
짝짝짝짝짝짝짝!
요한이 망토를 두르자 뒤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이제 그런 딱딱하고 어려운 표현은 쓰지 말게.”
“하오나…….”
“자네의 위치는 그래도 되는 위치일세.”
포라드의 대답에 요한이 힐끔 하이든을 쳐다보았다.
하이든은 뿌듯하게 미소를 그리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별말을 다 하는군. 감사는 내가 해야지. 자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오늘 이 자리가 아니라 단두대 위에 목을 걸고 있었을 게 아닌가? 이 사람과 함께 말이야.”
“왕가와 모든 국민들을 대신해 다시 한번 정말로 감사드려요, 대공.”
포라드가 왕비를 시선으로 가리키며 말하자 왕비가 우아하게 고개를 숙이며 요한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아닙니다. 왕비 마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그리고 저 혼자 한 일도 아니라 이런 대접을 한 몸에 받기가 조금 부담스럽기도 하네요.”
“그럴까 봐 자네에게는 비밀로 하고 이 친구를 초대했지. 가루칸 경을 모시도록 하라!”
‘응? 가루칸이라고?’
요한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분명 연회는 내일 저녁부터였다. 때문에 가루칸도 내일 오후쯤에나 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는데…….
‘진짜네?’
그렇게 문이 열리자 정말로 가루칸이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 불편하다고 잘 입지도 않는 오크족 대전사의 예복까지 단단히 갖춰 입고 말이다.
그렇게 오크족 대전사가 등장했음에도 그랜드 홀에 사열한 기사들은 조금도 그를 경계하지 않았다.
국왕이 직접 초대한 손님에게 경계하거나 적의를 보이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결례가 된다는 걸 그들 역시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퉁퉁퉁.
“전하를 뵙소. 내 인간의 언어와 예법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익숙하지가 않소. 무례를 용서하시오.”
가루칸은 포라드의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고 고개도 숙이지 않았다.
대신 주먹으로 가슴을 세 번 두드렸는데 이것은 오크족 대전사가 존경의 의미로 내보이는 최고의 예우였다.
“피도, 종족도 다른 우리를 돕겠다고 목숨을 걸고 찾아와준 영웅들에게 예법이 무슨 의미가 있고, 예절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자네들의 태도 그리고 마음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예법인 것을. 그런 형식 따위는 그대와 과인 사이에서 전혀 중요치 않으니 신경 쓰지 말게.”
“요한, 나 이 친구 마음에 드는데?”
“야, 인마!”
요한은 갑자기 오크어로 국왕을 평가하는 가루칸의 말에 깜짝 놀라 주의를 주었다. 그런데…….
“하하하하!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헉! 우리말을 할 줄 아시오?”
포라드가 어눌한 오크어로 대꾸하자 가루칸은 지금까지 보여 준 적 없을 만큼 놀란 표정으로 포라드에게 되물었다.
“요새 조금씩 배우고 있다네. 명색이 오크들과 수교를 맺은 국가인데 그 수장이 오크어 한마디 못 해서야 체면이 서겠는가?”
“이것 참……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왕이시오. 우리말도 수준급이고.”
“나도 자네가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군. 자네처럼 마음과 행동이 한결같은 친구는 보기만 해도 내 답답한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으니 말이야. 아무튼 본론으로 넘어가도록 하지.”
포라드는 다시 공용어를 사용했고 곁에 있던 통역사가 그의 말을 통역했다.
“나 포라드 린곤 벨로반 3세는 구르칸 산맥의 오크들과 공식적인 동맹 관계를 맺고 이들을 우리 왕국의 백성이자 요한 크림포드 공국의 백성으로 인정하려 한다. 반대 의견이 있는가?”
물론 손을 드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에 포라드가 가루칸에게 물었다.
“가루칸 대족장의 의견은 어떤가? 우리와 손을 잡고 함께 하시겠는가?”
“내 벗의 조국이오. 그보다 확실한 이유는 없지.”
그렇게 포라드와 가루칸은 악수를 나누며 정식으로 수교를 맺었다.
마도 시대 이후로 인간과 오크족이 정식으로 수교를 맺은 역사적인 날이 아닐 수 없었다.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