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전쟁의 서막
“일어설 수 있겠어요?”
“그럼요! 으윽……!”
리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얕은 신음을 흘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 구두…….’
굽이 높은 구두를 신었다가 넘어질 때 아무래도 발이 삐끗한 모양이었다. 그녀의 발목은 한 눈에 보기에도 살짝 부어 있었다.
“죄, 죄송해요! 많이 힘드시죠? 금방 일어날게요.”
“아뇨. 무리하지 마세요. 저는 괜찮으니까. 어디 보자…….”
요한은 샹들리에를 슬쩍 훑어보았다. 떨어질 때 충격으로 완전히 망가진 샹들리에는 멀쩡한 곳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이 정도면 고치는 것보다 새로 만드는 게 낫겠네.’
요한은 제로스의 망토를 개방했다. 그러자 황금빛 오리하르콘 무구들이 망토에서 튀어나와 사방을 빠르게 비행했다.
“뭐, 뭐야?”
“무기들이 날아다니잖아?”
“대체 이게 무슨……!”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당황했지만 곧 무기들이 자신들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넋을 놓은 채 구경했다.
“예쁘다…….”
누군가의 감탄사처럼 황금빛 무구들이 빛을 발하며 자유롭게 유영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하나 무구들이 의미 없이 날아다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서걱! 스핏! 쿠궁!
무구들이 샹들리에를 스쳐 지나갈 때마다 샹들리에가 조각조각 부서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샹들리에를 전부 알맞게 조각낸 요한은 자신이 받치고 있던 마지막 조각을 옆으로 치워 내며 무구들을 다시 망토 속에 수납하였다.
“잠시만 실례할게요.”
“네? 아……!”
요한은 발목이 삐어서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는 리리아를 안아 들고 가볍게 날아올랐다.
* * *
두 사람이 자리를 이동한 곳은 파티장 후원에 위치한 조용한 분수대 옆이었다.
벤치에 자신의 손수건을 깔고 그 위에 리리아를 앉히자 리리아가 요한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감사합니다, 대공…….”
“대공이란 말이 어색하시면 편하게 부르셔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는걸요.”
“그래도 대공이라고 부르겠습니다. 혹시 남들 앞에서 실수할 수도 있으니까요.”
“편하실 대로.”
요한은 피식 웃었다. 이런 융통성 없는 부분 역시 예전 모습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리리아 아가씨의 상처를 좀 살펴봐도 괜찮을까요?”
“네? 아, 네…….”
리리아가 허락하자 요한이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발목을 조심스럽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에 리리아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진짜 내가 미친 건가?’
수련 때 발목이 삐끗하는 건 일상다반사였다. 그때마다 클레번이 압박붕대를 감아 주었지만 그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땀에 전 발은 클레번의 코에 가져다 대며 장난치고 웃기까지 했던 그녀가 아닌가?
그런데 지금은 그 아무렇지 않은 일이 왜 이렇게 창피하고 어색한 건지…….
“어울리지도 않은 짓을 하다 벌받았나 봐요. 그냥 집에서 검술 훈련이나 열심히 할걸…….”
“어울려요.”
“네?”
“검술 훈련에 매진하는 아가씨도 강하고 훌륭하지만 이렇게 차려입은 아가씨도 충분이 아름다우세요. 발목을 삔 건 그냥 운이 없었던 겁니다.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그 순간.
요한의 손에서 푸른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푸른빛은 마치 비눗방울처럼 형성되어 그녀의 발목에 부딪혀 톡톡 터져 나갔다. 그 신기한 현상의 결과를 보고 리리아를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발목이…….”
“이제 좀 괜찮아요?”
“네, 아무렇지도 않아요! 이게 어떻게 된 거죠?”
눈에 띄게 부풀었던 발목도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하게 아물어 있었다.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어 봤지만 고통은커녕 이질감도 들지 않았다.
“뭐…… 노력의 산물이라고 해 두죠.”
“…….”
리리아는 자리에 다시 착석하며 요한에게 사과를 건넸다.
“죄송해요…….”
“네? 뜬금없이요? 여기서는 사과하기보다 고맙다고 해야 할 타이밍 아닌가요?”
“아, 발목을 치료해 주신 것도 물론 감사하고요! 제가 죄송하다고 말씀드린 건 그때 그 일 때문이에요. 물론 대공께서는 기억도 못 하시겠지만…….”
“그때 그 일이라면…… 혹시 연회장에서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요한이 연회장에서 자신과 만났던 일을 떠올리는 듯하자 리리아는 살짝 널뛰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담담히 대답했다.
“저는 그때 대공의 진의를 오해한 채 대공께 모진 말과 행동으로 무례를 저질렀어요. 그 일에 대해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죄송해요. 꼭 직접 만나 뵙고 이 말을 하고 싶었어요.”
“그걸 설마 지금까지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예요? 괜히 미안하네요. 그래도 저는 아가씨를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저를요?”
“네. 자신에게 모욕을 준 상대라 할지라도 목숨을 걸고 지키려던 그 모습은 누가 봐도 올바른 기사의 모습 그 자체였으니까요. 그런 멋진 분이 한때나마 제 약혼녀였다는 사실이 저는 자랑스러웠습니다.”
“…….”
리리아는 입술을 움찔하다가 이내 말을 삼켰다.
‘위험해. 하마터면 나도 모르게 그때 일을 후회한다는 말이 나올 뻔했어…….’
만약 그때 자신의 행동을 참았더라면…… 그랬다면 약혼이 파기되는 일도, 지금 자신들의 관계가 달라지는 일도 없었을 텐데…….
이런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지만 리리아는 피식 웃으며 밀려든 후회를 그대로 흘려보냈다.
“감사해요. 저도 항상 응원할게요. 대공께서 하시는 모든 일들을…….”
“저도 응원하겠습니다. 먼발치에서나마 아가씨가 훌륭한 기사로 성장하시길…….”
두 사람은 그렇게 달빛 아래에서 서로의 꿈을 응원하며 악수를 나누었다.
* * *
“범인은 잡혔나?”
“잡긴 했지만 이미 자현 경이 잡았을 땐 목숨을 끊고 난 이후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주군…….”
요한이 돌아오자 기사들이 보고를 올리고 마자현이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범인은 마자현의 추격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망설임 없이 자결을 선택한 것이다.
“제법 결단이 빠른 녀석이네. 돈 받고 고용된 녀석은 아닌 것 같고. 어디 왕국 암부에서 제대로 훈련받은 놈이려나?”
“설마 제국이 꾸민 짓일까요? 대공의 계획을 눈치채고…….”
카일이 의견을 내놓자 요한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닐 겁니다, 저하. 그 녀석들이 작정하고 일을 꾸몄다면 이 정도로 허술하게는 안 끝났을 테니까요. 물론 그래도 저하와 사람들은 제가 지켰을 테지만.”
“하하하! 그것 참 든든한 말씀이십니다. 아무튼 이건 좀 곤란하게 된 것 같군요. 배후를 밝혀야 하는데 정작 당사자가 죽어 버렸으니…….”
“그러게요. 진짜 멍청한 녀석이죠.”
“네?”
“이 친구요. 죽으면 도망칠 수 있을 줄 알았나 봅니다. 다들 잠시 자리 좀 비켜 주시겠습니까? 일반인분들에게 이 친구의 몸에서 흘러나올 기운이 썩 좋은 건 아니라서요.”
요한은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떠나고 마자현만 남자 그 자리에서 가니온을 소환했다.
데스 켈러미티가 된 가니온에게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죽음의 마나는 살아 있는 생명체에게 그다지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었다.
물론 요한이나 마자현 정도의 마나 저항력이 있으면 크게 문제되진 않았지만.
“가니온, 이 친구 좀 불러 봐.”
-예, 로드.
가니온은 죽은 암살자의 몸에서 그의 영혼을 소환하였다.
영혼은 죽은 즉시 사후세계로 떠나지 않고 사흘 정도를 육신에 머문다. 가니온은 사령술로 육신에 머물고 있는 영혼을 구속하여 깨운 것이다.
-내, 내가 어떻게……?
강제로 깨어난 영혼은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경악에 빠진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쩌냐, 이미 죽어서 자살로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할 텐데. 하기야 그것도 이 녀석한테 반항할 수 있게 된 이후에 얘기겠지만.”
애초에 가니온의 사령술에 속박당한 영혼에게 그의 명령을 거부할 수단은 없었다.
결국 영혼은 요한이 원하는 모든 정보들을 토해 낸 뒤, 에누리 없이 가니온에게 흡수당하여 그의 힘이 되었다.
그렇게 가니온을 역소환한 요한은 국왕에게 긴급 소집을 요청하여 다급히 회의를 가졌다.
“그래, 알아낸 것이 있는가, 대공?”
포라드의 질문에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암살자는 뮤탄 왕국의 암부에서 키워 낸 녀석이었습니다.”
“하면 뮤탄 왕실에서 우리 왕세자를 노리고 암살자를 보낸 것이란 말인가?”
“그건 아닐 겁니다. 정확히는 뮤탄 왕실이라기보다 그곳에 숨어 있는 그림자들의 농간이겠죠. 여러분께서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셨으니 잘 알 겁니다. 놈들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그런 놈들이 합심해서 하나의 목표를 향해 움직인다면?”
“설마 놈들이 노리는 건……!”
하이든이 요한을 쳐다보자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세자 저하 암살 미수 사건은 일종의 경고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가 가짜 황자였다는 사실은 놈들도 알게 되었을 테니까요. 게다가 제국에서는 이미 대륙 통일을 위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즉, 그림자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할 거란 뜻이죠.”
“최악의 경우 뮤탄, 레반돌프, 존타나 왕국이 우리 벨로반을 침공할 수도 있다는 뜻이지?”
하워드의 질문에 귀족들이 경악하며 모두의 시선이 요한에게 집중되었다. 하워드가 언급한 세 나라가 모두 벨로반 왕국과 국경이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까지 세 나라와 국경이 맞닿아 있으면서도 벨로반이 비교적 안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서로가 서로의 억제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뮤탄이 욕심을 내서 벨로반을 침공하면 레반돌프 왕국이 뮤탄을 노릴 수 있고, 마찬가지로 레반돌프가 벨로반을 노리면 뮤탄이나 존타나에서 빈집을 노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쉽게 군대를 움직이지 못한 것인데…….
“몸담은 나라는 달라도 놈들의 근본은 하나니까요. 녀석들이 합심하면 세 나라의 동맹을 계획하는 것쯤은 일도 아닐 겁니다. 다만 지금까지는 상부에서 명령이 없었을 뿐. 하지만 지금이라면…….”
요한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세 나라의 동맹 결성이 남부 대륙 전체에 퍼져 나간 것이다.
명목은 간단했다. 벨로반 왕국에서 각 나라에 자객들을 보내 왕자나 공주를 암살했다는 증거가 속출한 것이다.
“아니, 암살이라니요? 도대체 누가 그따위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했단 말입니까?”
“당연히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어처구니없는 일이지요. 사람 셋이 모이면 없는 오우거도 만들어 낸다더니 어찌 이리 황당한 경우가…….”
“문제는 놈들의 가짜 대의명분이 아닙니다. 실제로 놈들은 우리 왕국을 침공할 테니까요. 이를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그나마 서쪽은 구르칸 산맥으로 막혀 있어 걱정이 없다지만 북쪽의 뮤탄, 동쪽의 레반돌프, 남쪽의 존타나까지……. 우리 왕국 혼자서 놈들을 전부 막아 낼 수 있는 겁니까?”
“그거야, 우리 구국의 영웅 손에 달린 일이 아니겠습니까?”
누군가의 한마디에 모든 귀족들의 시선이 요한에게 향했다. 테이블 위에 지도를 심각한 표정으로 살펴보던 요한에게 한 귀족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대공, 지금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십니까?”
“응? 아, 죄송합니다. 각 나라의 역습 경로를 고민하다 대화를 놓쳤네요. 무슨 얘기를 하고 계셨죠?”
“여, 역습요?”
“우리는 지금 세 나라의 침공을 걱정하고 있는데 대공께서는 벌써 역습을 고민하고 계셨단 말씀이십니까?”
“허허허…….”
요한의 능청스러움에 귀족들은 큰 위안을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의 생각은 틀렸다. 요한은 정말로 세 나라의 침공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작 이 정도로 애 먹으면 제국은 손도 댈 수 없다고. 이 사람들아.’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