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비참한 회군
두 번째 격전이 끝난 후로 나흘이 지났다.
그동안 뮤탄 왕국군의 진영은 하루가 다르게 피폐해져 갔다. 아니, 이제는 군영이란 말보다 지옥이란 말이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배가 너무 고파…….”
“여기 약초 좀 더 가져다줘!”
“붕대는? 붕대는 더 없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병사들의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고, 기사나 지휘관들이 옆을 지나가도 경례조차 하지 않았다.
전쟁을 치르며 나흘을 내리 굶다 보니 경례할 힘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한 사정은 지휘관들도 마찬가지였다.
“으…….”
지휘관들끼리 모여 식사를 하던 도중, 한 자휘관이 자신의 식판에 담긴 멀건 스프와 딱딱한 빵 1/3조각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나이 지긋한 그의 동료 지휘관이 인상을 찌푸린 지휘관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런 표정하지 마시게. 그조차도 없어서 굶고 있는 병사들이 즐비하니까.”
“누가 뭐랍니까? 다만 그저 언제까지 이렇게 버티고만 있어야 할지 가늠이 안 되니까 그게 답답해서 그러는 거지요.”
“그나마 그 괴물들 쪽에서 먼저 쳐들어오지 않는 게 다행입니다. 그랬다면…… 어우,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몬스터들이 왜 자신들을 지켜만 보고 있는 건지는 그들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몬스터들이 쳐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었던 것도 현실이었다.
“그나저나 보급품 말입니다. 오늘은 도착하는 거겠지요?”
“당연히 도착해야지요. 안 그러면 지금 당장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도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
“어허, 반란이라니! 입조심하세요! 빈말이라도 그런 말을 입에 담다니…… 그게 지휘관이 할 소립니까?”
지휘관들조차 한계가 가까워져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가 예민한 것도 말이다.
“현재 병사들의 상황은 어떤가?”
버나드데인이 묻자 로우스가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생각하신 것보다 많이 힘든 것 같습니다. 식량은 둘째 치고 약과 붕대가 없어서 치료할 수 있는 병사들조차 때를 놓쳐 잃는 경우가 상당합니다. 게다가 배고픔에 지친 병사들이 탈영하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오늘 보급품이 도착할 예정이라고 하니 보급을 받은 뒤 병사들을 추슬러서 다시 도전하면…….”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 괴물들을…….”
“…….”
그게 문제였다. 설령 보급을 받아 군대를 추스른다 할지라도 과연 몬스터들을 뚫고 제노발 요새를 함락할 수 있겠냐는 것.
뮤탄 왕국군은 제노발 요새를 구경도 못 했는데 벌써 최강의 전력이라 할 수 있는 베니스 기사단을 잃었다.
사실 병사들이 기운을 차린다고 해도 희망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저 이대로 후퇴할 수도 없는 상황이기에 자리만 죽치고 앉아 있을 뿐.
그 사실을 모르는 지휘관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가, 각하! 보급 전단에서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보급 전단에서 전령이 왔다고?”
“왜 전령을…….”
보급 전단에서 전령이 도착했다는 보고에 지휘관들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보급이 도착했으면 전단이 함께 와야지 전령만 따로 보내는 건 무슨 의미란 말인가?
“만나 보면 알게 되겠지.”
그렇게 직접 만나 확인한 전령이 가져온 소식은 절망적이었다.
“보, 보급 전단이 전멸?”
“심지어 보급품도 몽두 놈에게 털렸다고?”
“대체 어떤 놈이…….”
전령은 울면서 절뚝거리는 다리를 꿇어앉더니 고개를 숙였다.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악마는 저만 다리 한쪽을 부러트린 후에 살려 주었습니다. 이 일을 버나드데인 각하께 보고하라고요. 저는…….”
털썩…….
전령은 말을 하다 말고 결국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기력이 쇠진한 상태에서 무리한 탓이다.
지휘관들은 병사들에게 전령을 잘 묻어 주라 명한 뒤 심각한 얼굴로 회의를 가졌다.
“일부러 전령의 다리 한쪽을 부러트린 건 우리에게 더 비참한 시간을 주려고 한 것 같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나흘을 더 굶었고요.”
“차라리 잘됐습니다. 보급품이 없는데 전쟁이고 나발이고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당장 회군하는 게 좋겠습니다.”
“맞습니다. 만에 하나 이 사실이 병사들 사이에 소문이라도 퍼진다면 그때는 정말 병사들을 통제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지휘관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꺼내놓고 버나드데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차피 결정은 총사령관인 그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하나 지휘관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전쟁을 고집할 만큼 버나드데인은 멍청한 사령관이…….
“불가하네.”
“……네?”
“방금 뭐라고…….”
“불가하다고 했네.”
회군은 불가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버나드데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그도 눈이 있고 귀가 있다. 그리고 지금 전령의 보고도 함께 듣지 않았는가? 그런데 회군이 불가하다고?
“가, 각하, 나라의 안위를 염려하는 심정은 이해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그렇지 않습니까?”
“벌써 병사들도 나흘을 굶었습니다. 보급품도 없이 더 이상의 전쟁은 불가능하단 걸 각하께서 누구보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지휘관들은 버나드데인을 설득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밥이 없다면 적의 시체를 뜯어 먹고, 창칼이 없다면 짱돌이라도 들어서 싸우면 그만일 뿐. 자네들은 조국이…… 자네의 가족들이 놈들의 이빨에 씹어 먹히는 광경을 보면서도 그따위 변명만 내뱉을 생각인가?”
“그건…….”
“잘 듣게. 우리가 지금처럼 만반의 준비를 갖춰도 대항하기 힘든 놈들일세. 바꿔 말하자면 놈들이 우리 왕국을 침공했을 경우, 우리가 놈들에게서 조국과 가족을 지켜 낼 수 있는 확률은 한없이 0에 가깝다는 말일세. 그런데도 자네들은 회군을 주장하는가?”
“각하! 본국에서 전령이 도착하였습니다!”
모두의 여론이 다시 버나드데인에게 다시 넘어갈 무렵, 또 다른 전령이 등장하여 상황은 완전히 반전시켰다.
“하아…… 하아…… 가, 각하! 큰일 났습니다! 지금 본국이…….”
“본국에 무슨 일이 있느냐?”
전령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본국이 구르칸 오크족의 기습을 당했습니다! 현재 왕도 코앞까지 놈들이 접근한 상황입니다!”
* * *
남부 대륙의 각 국가들이 구르칸 산맥을 중립지역으로 선포한 이유.
그것은 그곳의 몬스터들이 두렵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구르칸 산맥이 남부 대륙의 거의 대부분을 걸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뮤탄 왕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북쪽을 따라 산맥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뮤탄 왕국의 특성상 마음만 먹으면 산맥을 통해 뮤탄 왕국의 왕도로 진격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의 구르칸 오크들처럼…….
“그러니까 여기만 넘으면 뮤탄 왕국의 왕도가 코앞이라 이거지?”
“맞아. 그런데 생각보다 일찍 왔네? 난 여기까지 사흘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그냥 성 좀 지나가는 건데 사흘은 무슨…….”
요한과 가루칸은 뮤탄 왕도를 코앞에 두고 마지막 요새라 할 수 있는 돌라체성을 함께 바라보고 있었다.
“그나저나 저 보급은 어떻게 된 거냐?”
“오다 주었어.”
“저 많은 걸?”
가루칸은 뒤를 돌아보았다. 전사들이 배부르게 먹고도 아직 산처럼 쌓여 있는 보급품을 보고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네가 왜 보급을 따로 준비하지 말라 했는지 이해가 안 됐는데 이제 알겠네. 너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냐?”
“굳이 따로 준비해 주는 곳이 있는데 우리 것을 쓸 필요는 없잖아. 그래서 저 성을 함락할 작전은?”
“쳐들어간다. 함락한다. 그것 말고 또 있나?”
단순무식한 가루칸의 대답에 요한은 피식 웃었다.
“그래, 너답네. 아무튼 나는 간다. 이번에는 레반돌프 쪽에서 선물을 보내 주기로 했거든.”
“그래, 가라. 보급은 잘 쓰마.”
요한이 하늘을 날아 떠나가자 소화를 마친 오크 전사들을 향해서 가루칸이 크게 소리쳤다.
“그럼 우리도 마무리하러 가자. 이것들아!”
우오오오오!
공성전이 시작되자 돌라체의 성벽 위에서 오크족을 감시하던 병사들이 마른침을 삼키며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켰다.
“저, 저건 설마…….”
“공성탑이다!”
“얼른 투석기를 준비해! 공성탑이 성벽으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으란 말이다!”
돌라체성이 근위 기사단장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오크족의 공성탑이 어떤 의미인지 이제 뮤탄 왕국에서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처음에는 당연히 무시했다. 산에서 몬스터나 때려잡으며 생활하던 아인족들이 분에 넘치게 맞지도 않는 문물을 사용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그게 착각임을 깨닫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후웅! 후웅!
준비된 투석기에서 발사된 바위들이 공성탑을 때렸다.
하나 거리가 먼 탓에 날릴 수 있는 돌은 작고 무게가 덜 나가는 것이었으며 그 정도로는 공성탑에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없었다.
그리고 공성탑에 위력적인 피해를 가할 수 있게 바위를 실어 날릴 수 있는 사정거리에 공성탑이 들어왔을 때는…….
“가자!”
커엉!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슈욱!
공성탑에 숨어 있다가 훌쩍 점프한 기랑대가 성벽 위로 가뿐하게 올라섰다. 기마대로는 흉내조차 내지 못할 일이 기랑대로는 가능했던 것이다.
물론 그것도 엄선된 전사들과 다이어 울프만이 가능한 일이었지만 일단 한번 성공하면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촤악! 서걱!
“으아아악!”
“피해!”
“사, 살려 줘……!”
먼저 진입에 성공한 기랑대가 성벽 위를 누비며 병사들과 기사들을 닥치는 대로 쓰러트리는 사이, 완전히 접근을 마친 공성탑에서 계단을 타고 기랑대원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렇게 되면 상황은 종료다.
다이어 울프를 타고 침입한 오크 전사들을 막을 병사는 없었다. 결국 그들을 지휘하는 기사들을 제일 먼저 처리하자 병사들이 앞다퉈 무기를 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안쪽에서 성문을 열면 가루칸을 필두로 한 오크 전사 보병단이 일제히 안으로 입성하여 성을 접수한다.
이게 지금의 오크식 공성전이자 무적의 공성법이었던 것이다.
“자, 그럼 다음은 왕도랬나? 귀찮으니까 오늘 안으로 끝내 버리자고.”
“대족장의 명을 받듭니다!”
* * *
당연히 이 소식을 전해들은 뮤탄 왕국 침공군은 패닉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럴 수가…….”
“각하! 지금 당장 회군을 준비하겠습니다!”
버나드데인의 명령을 기다릴 것도 없었다. 당연히 그의 명령도 자신들의 생각과 같을 것이라 여겼으니까.
그런데 아니었다.
“회군은 하지 않는다.”
“가, 각하?”
“놈들은 왕도를 코앞에 두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지금 우리가 돌아가 봐야 늦다. 차라리 벨로반을 점령하여 후일을 도모하는 게 더 현명한 선택이다.”
“그게 무슨…….”
지휘관들이 느끼는 혼란스러움은 극에 달했다. 그래서 그런지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항명에 가까운 얘기들이 자연스럽게 튀어 나왔다.
“지금까지 조국과 가족의 안위를 운운하며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작자가 누군데 이제 와서 나라와 가족들을 버리라고?”
“네놈들의 나라와 벌레 같은 인간들의 안위 따위 내 알 바가 아니다! 난 트리스탄의 황족으로서 해야 할 숙명을 부여받은 몸이라고!”
“…….”
광기에 절어 발작처럼 소리쳤던 버나드데인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주변을 둘러보며 변명을 하려했다.
“그, 그게 아니라 난…….”
“죄송합니다, 각하.”
퍼억! 털썩…….
현재 그의 머리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확신한 로우스는 그의 뒷덜미를 강하게 내리쳐 기절시키고는 그 대신 지휘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 죄는 먼저 왕국의 위기를 구한 다음에 달게 받을 것이다! 먼저 회군을 서둘러라! 나라를 구하는 게 급선무다!”
“명을 받듭니다!”
그렇게 야욕으로 똘똘 뭉쳐 벨로반을 침공했던 뮤탄 왕국군은 결국 비참한 신세가 되어 상처만 가지고 왕국으로 돌아갈 뿐이었다.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