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함정 속으로
레반돌프 왕국도 처음에는 사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아무리 벨로반이 사국 중에서 가장 강력한 국력을 보유중인 국가라 하더라도 삼국이 힘을 합친 것보다는 못 하다고 확신했으니까.
“조금만 더 힘을 내라! 여기 우랄 협곡만 넘으면 왕도가 코앞이다!”
“와아아아아아!”
우랄 협곡으로 진군하는 동안 레반돌프군은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전투를 치르지 않았다.
기껏해야 장애물 정도로 행군 속도에 지장을 주었을 뿐, 이미 성을 지키는 병사들과 백성들은 모두 도망친 이후였던 것이다.
“푸하하하! 천하의 벨로반도 겁이 나면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꼴이 길가의 똥개랑 다를 바 없구먼. 안 그런가, 해리?”
“쉽게 생각하실 일이 아닙니다, 각하. 놈들이 쉽게 성을 버리고 후퇴를 선택할 수 있었던 건 뒤집어서 말하면 그만큼 이곳, 우랄 협곡이 천혜의 요새라는 뜻이기 때문이니까요.”
“에휴, 하여간 자네는 분위기 박살 내는 데 일가견이 있다니까.”
그러나 레반돌프군의 총사령관 이실로데는 결코 자신의 부관 해리의 조언을 흘려듣지 않았다.
무력이라면 누구보다 자신 있는 그였지만 안타깝게도 신은 그에게 무력과 지력을 동시에 허락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부족한 무력을 부관인 해리가 채워 주었다. 그게 이실로데가 해리를 아끼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래서, 전략은?”
“우랄 협곡은 돌아가게 될 경우, 높이 370미터에 달하는 터무니없는 절벽을 기어 올라가야만 합니다. 소수의 레인저라면 모를까, 대군이 시도할 수 있을 만한 길은 아니죠. 설령 올라간다 하더라도 올라간 순간 힘이 다 빠져서 그대로 죽게 될 겁니다.”
“결국 정면 돌파밖에 답이 없다는 뜻인가? 협곡 중앙을 틀어막고 있으면 꽤나 골치 아프겠어.”
“그래도 다행히 길이 좁기는 해도 험한 편은 아니라 군이 진군하는 데 큰 장애는 없을 듯합니다. 문제는 협곡의 양쪽 절벽 위에서 가하는 낙하물 공격인데…… 이에 대응하려면 절벽 위로 레인저 부대를 파견하여 절벽 위를 선점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랄 관문에 직접적인 피해도 생각해 볼 수 있고요.”
해리의 계획에 이실로데는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
“브랜드! 지금 당장 움직일 수 있는 레인저 부대는 몇이나 되나?”
“총 사천 정도입니다. 각하.”
“저 절벽을 올라가서 절벽 위를 점거할 수 있겠나?”
“명령만 내려주신다면 반드시 해내 보이겠습니다.”
레인저 부대의 대장, 브랜드가 그에게 다가와 대답했다. 그러자 이실로데가 씨익 웃으면서 명령을 내렸다.
“좋다. 브랜드, 오늘밤 작전을 개시한다. 그때까지 레인저 부대를 충분히 쉬게 해 주도록.”
“명을 받듭니다!”
“쉽지 않은 일일 걸 잘 압니다. 하지만 브랜드 경과 레인저 부대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협곡 안으로 한 발자국도 들어갈 수 없을 겁니다.”
“걱정 마십시오. 우랄 협곡은 이미 제 손 안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 레인저 부대는 다른 나라의 레인저들보다 훨씬 특별하니까요.”
브랜드가 자신 있게 가슴을 두드리며 대답했다.
* * *
그날 밤.
스윽…….
브랜드가 이끄는 레인저 부대는 그 흔한 횃불 하나 없이 우랄 협곡의 절벽 앞에 섰다. 브랜드는 작전을 시작하기에 앞서 나직한 목소리로 대원들에게 알렸다.
“우리는 인간이 아니다. 우리는 엘프도 아니다. 그 어느 쪽에도 섞이지 못한 채 노예로 살다가 비참하게 죽을 운명이었던 우리를 각하께서 구원하셨다. 이 은혜를 목숨으로 갚지 않으면 무엇으로 갚는단 말이냐? 전원, 목숨은 이곳에 두고 오로지 작전의 성공만 생각한다.”
전원 하프 엘프로 이루어진 레인저 부대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트리스탄 황족의 방계 출신인 이실로데가 혼혈이라고는 해도 아인종의 피가 섞인 노예들을 거두어 부린다는 것이 말이다.
물론 이것은 이실로데가 특이한 케이스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이들의 가치가 특별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들만큼 레인저를 하기에 특화된 존재들도 드물었으니까.
예전에는 협곡을 뚫어도 벨로반의 대군을 상대해야 해서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지금처럼 벨로반이 다른 두 나라를 방어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얘기는 달랐다.
협곡을 뚫자마자 기다리는 건 텅텅 비어 있는 벨로반 왕도였기 때문이다.
“가자.”
브랜드를 필두로 대원들이 빠르게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속도가 범상치 없었다.
불빛이 없어도 이들은 마치 깜깜한 절벽을 훤하게 보는 것처럼 성큼성큼 기어 올라갔기 때문이다.
사실 불빛이 없어도 엘프들은 밤을 낮처럼 볼 수 있는 눈이 있었다.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엘프들만큼 밝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였을까?
퍼걱.
“……!”
한 대원이 틈 사이에 위태롭게 걸려 있는 돌을 잘못 밟았다가 백수십 미터 아래로 추락해 버렸다.
하지만 누구도 그를 돌아보거나 멈추는 사람은 없었다. 동료를 아끼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죽은 동료의 몫까지 책임감을 가지고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였다.
자신들이 임무를 실패하면 동료의 죽음은 말 그대로 개죽음이었기 때문이란 걸 그들이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불빛도 소리도 죽인 채 필사적으로 절벽을 기어오른 결과, 대부분의 레인저 부대가 절벽을 완등할 수 있었다.
[움직이기 힘든 녀석은?]
가장 먼저 등반에 성공한 브랜드가 부대원들에게 수신호로 대원들의 상태를 물었다. 대원들은 전원 고개를 저었다.
[그럼 잠시 휴식을 취한 뒤에 바로 움직인다.]
브랜드는 일부 경계 병력을 주변에 배치해두고 부하들에게 휴식을 주었다.
하프 엘프라고는 해도 300미터가 넘는 우랄 절벽을 맨몸으로 기어오르는 건 매우 힘든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휴식을 취하는 동안에도 주변은 조용했다. 설마 벨로반 측에서도 불도 없이 절벽을 기어올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을 터.
그 덕분일까?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체력을 회복한 대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브랜드는 대원들과 함께 절벽 위에 능선을 따라 우거진 숲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하늘에 달 말고는 누구도 자신들의 모습을 보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어떡하냐. 거긴 지옥인데. 가서 말릴 수도 없고, 나 참…….”
와삭!
하늘에 비스듬히 누워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요한은 안타까움에 고개를 저으며 가져온 사과 한입을 깨물어 먹었다.
“행운을 빈다. 진심으로.”
* * *
브랜드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건 숲에 들어선지 5분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브랜드 부대는 전속력으로 숲을 달렸다. 절벽을 올라온 이상, 그때부터 절벽 위를 점령할 때까지는 속도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군. 아무리 방심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보초병이나 정찰병이 한 명도 없을 수 있다고?’
병사가 적다거나, 그나마도 어딘가 구석에 짱박혀서 자고 있는 거라면 이해라도 한다. 그런 거라면 자신의 기감에 걸리지 않을 리 없을 테니까.
그런데 정말로 병사가 한 명도 없었다. 단순히 전혀 절벽 위로 올라올 걸 신경 쓰지 않은 것일까?
그런 거라면 차라리 다행이지만 그렇다면 지금 자신이 느끼는 이 서늘한 불안함을 뭐란 말인가?
그 순간, 브랜드가 느끼던 서늘한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슈욱…… 푹! 털썩…….
“……!”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순식간에 대원 한 명의 관자놀이를 관통하면서 목숨을 끊어놓았다.
부하의 죽음에 브랜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수신호로 명령을 내렸다. 그의 명령을 받은 대원들 역시 침착하게 주변으로 흩어지며 나무나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브랜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근처 가장 큰 나무 기둥 뒤에 몸을 숨긴 그는 활과 화살을 장비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도대체 어디서…….’
브랜드가 놀라고 있는 건 적 궁수의 위치였다. 이런 숲에서 화살이 살상력을 가질 거리라면 자신이 기척을 놓쳤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화살이 날아온 방향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순히 기척을 잘 죽인다는 말로도 설명이 부족한…… 처음부터 그곳에 없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다시 한 번 화살이 날아왔다.
‘어디 있느냐, 놈!’
이번에는 대원들 모두 엄폐물 뒤에 잘 숨어 있어서 화살에 당할 걱정은 없었다. 대신 브랜드는 기감을 최대한 끌어 올리며 숨어 있는 궁수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런데…….
스륵…… 푹! 털썩…….
‘이게 무슨……!’
브랜드는 하마터면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당연히 직선으로 날아가야 할 화살이 마법처럼 궤도를 틀어 나무 뒤에 숨어 있던 부하의 심장을 관통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사이에도 또 다른 화살이 빠르게 날아오고 있었다. 이번에는 열 발의 화살이 한꺼번에 날아왔다.
문제는 그 화살들 모두가 방금처럼 곡선을 그리며 엄폐물과 상관없이 부하들의 목숨을 앗아 간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브랜드 역시 오러 엑스퍼트 상급의 궁사였다. 마음만 먹으면 오러를 실은 화살로 나무나 바위를 꿰뚫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날아가는 화살의 궤도를 수정하는 건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했다.
‘그런 일이 가능한 건…… 설마!’
[1, 2조는 주변에 흩어져서 적을 수색한다. 3, 4조는 나를 따라 포인트로 향한다. 조심해라 상대는 바람의 마나를 사용한다.]
끄덕.
브랜드의 명령대로 1, 2조는 남아서 암살자를 수색하고, 브랜드는 3, 4조와 함께 목적지로 빠르게 이동했다.
하나 그러는 사이에도 희생자의 숫자는 꾸준히 늘어갔고 암살자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젠장, 도대체 어디서 쏘는 거냐고!’
필사적으로 수색해도 암살자를 찾기는커녕, 부하들의 희생만 늘어 가자 1조 조장은 정말로 미칠 것만 같았다.
게다가 화살이 자기 마음대로 휘어져 날아오는 탓에 화살의 궤적을 보고 위치를 특정하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화살의 숫자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인가…….’
이쪽은 1조와 2조만 합쳐서 2천이 넘었다. 화살이 꾸준히 날아와 부하들을 학살하고는 있었지만 날아오는 화살의 숫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막말로 몸빵을 서더라도 브랜드와 3, 4조가 포인트를 점령할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착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 필요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꿈틀, 꿈틀……. 부스럭, 부스럭!
“뭐, 뭐야?”
“어떻게 이런 일이…….”
화살을 맞고 죽었을 터인 시체들이 다시 일어나는 모습에 대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작전 수행 중에 육성을 내는 건 금물임을 알고 있는 그들이 놀라서 경악할 만큼 눈앞에서 일어난 일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왜 안 그렇겠는가? 죽은 자가 다시 살아 움직이는데…….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어어…….”
“야, 너 갑자기 왜 이래? 으아악!”
콰작!
“조심해라! 시체가 공격한다!”
다시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한 구울들은 살아 숨 쉬는 대원들의 숨소리에 이끌려 그들을 덮치기 시작했다.
“크아악!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콰드득, 콰득!
칼로 목을 베고, 화살로 머리를 찔러도 소용이 없었다. 한 번 목덜미를 문 구울들은 대상의 숨소리가 멈출 때까지 목덜미를 물어뜯었으니까.
“그, 그만…… 살려…….”
결국…….
푸화학!
목덜미를 완전히 물어뜯자 피분수가 솟구치며 한 대원의 숨이 끊어졌다. 동공에서는 초점이 사라졌고 발버둥 치던 사지도 그대로 축 늘어져 완전한 죽음을 맞이했다.
아니, 죽었어야 할 터였다.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