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우랄 협곡의 거상들
다음 날 아침까지도 기다리던 소식이 돌아오지 않자 레반돌프군의 분위기는 아침부터 상당히 무거워져 있었다.
“실패한 건가…….”
“이 시간까지 아무런 응답이 없다는 건 십중팔구 그렇다는 뜻이겠지요.”
“아쉽군. 적어도 이번 임무에 누구보다 특화된 친구들이라 생각했는데 말이야.”
이실로데의 표정은 아쉬움이 남아 있을지언정 레인저 부대원들에 대한 안타까움은 티끌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그도 제국의 인물이라는 뜻이겠지.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각하.”
“협곡을 돌파하지 않고 우회해서 가는 방법은?”
“우랄 협곡을 피해 대군이 움직일 수 있는 경로로 돌아가려면 결국 북쪽의 뮤탄이나 남쪽의 존타나 왕국의 침공로를 경유할 수밖에 없습니다.”
“빌어먹을 벨로반 같으니…….”
이실로데는 벨로반 왕국이 가진 천혜의 자연 환경이 그저 부럽고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이대로 진군한다.”
“각하?”
“그럼 다른 방법이 있냐? 여기까지 와서 다른 왕국한테 협곡을 통과하는 건 어렵겠습니다. 죄송하게 됐네요. 뒷머리라도 긁적거리면서 눙칠래?”
“돌아가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적어도 이곳에서 대기하면서 다른 왕국들의 추이를 지켜보고 판단할 수도 있는 일이 아닙니까?”
해리가 아닌 다른 지휘관의 의견에 이실로데는 고개를 저었다.
만일 그가 진짜 레반돌프의 귀족이자 장수였다면 그의 말대로 했을 터였다. 자국의 병력을 아끼면서 효율적으로 군을 움직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실로데도 버나드데인과 마찬가지로 솔직히 레반돌프의 병사들이 얼마나 죽어 나가건 그런 크게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었다.
“자네 말대로 다른 왕국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대기한다고 치자. 만약 다른 왕국들도 비슷한 상황이라면? 그렇게 되면 진흙탕에서 눈치 싸움하는 것밖에 되지 않아. 동맹국에게 피를 강요하려면, 결국 우리도 피를 흘려야 한다는 말일세.”
“게다가 상황이 그렇게 나쁘지만도 않습니다.”
“아바타를 말 하는 거지?”
해리의 첨언에 이실로데가 반응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지휘관들에게 설명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처럼 우랄 협곡은 천혜의 요새입니다. 백 명의 병사들만으로 만 명의 적을 막을 수 있는 곳이죠. 굳이 그런 곳에 아바타라는 비대칭 전력을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요? 제 생각에 아바타가 배치된 곳은 이곳.”
해리는 지도상에 한 곳을 찍으며 말을 이었다.
“남쪽 평야. 존타나와 대치 중인 이곳에 배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구르칸 산맥에서 뻗어 나온 지류와 우랄 산맥의 줄기에 방해를 받는 북쪽과 달리 남쪽은 완전한 파워 게임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까요. 하지만…….”
해리의 입가가 씨익 말려 올라갔다.
“우리에게는 이실로데 총사령관님이 계십니다. 명실상부 레반돌프 최강의 무력을 갖추고 계신 오러 마스터시죠. 만약 우리 군이 큰 피해를 입더라도 관문으로 이어지는 작은 길 하나만 만든다면…….”
“내가 그 너머에 막혀 있는 문을 활짝 열어젖히도록 하지.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말이야.”
최고 전력인 오러 마스터라면 아무리 우랄 협곡의 두꺼운 관문이라도 오래 버티긴 힘들 것이다. 그렇게 한 번 관문이 뚫리고 나면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이의 없으십니까?”
해리의 질문에 지휘관들은 각오를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군을 정비하세. 식사를 마치는 대로 진군을 개시하도록 하지.”
* * *
뿌우우우우……!
“출전이다!”
“전군, 진격하라!”
뿔피리 소리가 웅혼하게 울려 퍼지며 레반돌프군이 협곡 안쪽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오늘 여기서 살아 나올 수 있을까?”
“꿈 깨라. 지휘관들도 얘기했잖아. 오늘 여기가 우리 무덤이 될 거라고.”
“도망칠 놈들은 지금이라도 도망쳐. 괜히 나중 가서 후회하지 말고.”
병사들은 불안을 삭히려 일부러 잡담을 떠들어 댔지만 그들의 시선은 시종일관 위를 향해 있었다.
언제 머리 위로 머리만 한 바위가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뭐지?’
‘꽤나 들어온 것 같은데도 상당히 조용하네?’
지금쯤이면 바위가 쏟아져도 몇 번은 쏟아져 내렸을 타이밍인데 아직까지 절벽 위에서는 돌 부스러기조차 떨어져 내리지 않았다.
병사들만큼 지휘관들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 설마 이 천혜의 요새를 버리고 도망이라도 간 것은 아닐까 쓸데없는 희망을 가지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때였다.
“저건 뭐지?”
“거상?”
“왜 저런 게 이런 곳에…….”
관문에 도착하기 전, 선두에서 군을 이끌고 있던 이실로데와 해리는 협곡을 틀어막고 있는 거대한 두 개의 석상을 발견하였다.
마치 협곡의 수문장처럼 군림하고 있는 두 개의 거상은 신장 5미터 크기에 남신(男神)을 조각한 듯 수려하고 웅장하기 그지없었다.
“예술적인 가치가 상당히 뛰어난 조각상이로군요.”
“도대체 벨로반 측 사령관의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군. 설마 저런 조각상을 가져다 놓고 우리 군의 진군을 막을 생각이었나? 뭣들 하는가. 가서 저 거상을 부숴 버리지 않고.”
“예!”
해리는 이실로데의 명령이 조금 안타까웠다. 조금만 더 시간이 넉넉했더라면 돈과 시간을 들여 조심스럽게 옮길 만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머를 가지고 조각상을 부수기 위해 앞으로 달려가던 병사들은 문득 소름끼치는 감각에 고개를 들어 조각상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뭐지? 기분 탓인가? 방금 전까지 이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 같은…….’
그러나 석상의 표정은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에이, 기분 탓이겠지.’
찜찜한 마음을 털어 버리고 그저 내려진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해머를 들어 올린 찰나.
“위험해!”
“응……?”
뒤쪽에서 터져 나온 경고성에 뭐가 위험하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던 병사들은 그제야 위험의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왜 주먹을 들고 서 있지? 방금 전까지랑 자세가 전혀 다른…….”
콰직!
거상…… 아니, 골렘이 내리찍은 주먹에 병사 한 명의 머리가 그대로 박살 나며 피와 부서진 두개골과 으깨진 뇌수가 사방으로 폭발했다.
그 골렘들의 정체는 요한이 나노 크리에이터를 손에 넣은 첫 번째 던전에서 발견한 골렘, 델타와 시그마였던 것이다.
‘빠르다!’
‘눈으로 쫓을 수가 없었어…….’
무려 오십 명이 넘는 병사들이 비명조차 질러 보지 못하고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기사들도 경악하여 금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오십 명을 도륙하는 골렘들의 움직임이 눈으로 포착하지 못할 만큼 빨랐던 탓이다. 그렇게 접근한 병사들을 모두 처리한 델타가 바닥에 떨어져 있던 해머를 들어 올렸다.
힘 좋은 병사가 두 손으로 들어도 묵직한 해머를 한 손으로 가볍게 들어 올린 델타는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이런, 젠장! 방패를 들어! 어서!”
델타의 의도를 알아챈 해리가 서둘러 목청껏 소리쳤고 훈련받은 병사들은 머리가 명령을 이해하기 전에 반사적으로 방패를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콰앙!
델타는 가지고 있던 해머를 정면을 향해서 힘껏 던졌다. 처음 폭발음은 해머가 날아가면서 공기의 벽을 터트린 탓에 발생한 소닉붐이었던 것이다.
콰콰콰콰콰콰쾅!
그렇게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간 해머는 병사들의 정면을 방어하는 두꺼운 타워 실드를 산산이 박살 내더니 그 뒤에 버티고 서 있던 병사들 수십 명을 무더기로 날려 버렸다.
심지어 그게 끝이 아니었다. 주변에 널브러진 해머는 아직도 많았고 여기에는 델타뿐만 아니라 시그마도 있었으니까.
쾅! 쾅! 쾅! 쾅! 쾅! 쾅! 쾅!
망치를 잡고, 던진다. 단지 그것뿐인 행위가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키는지 말로만 타인에게 설명한다면 그 누구도 믿지 못할 것이다.
“크아악!”
“도망쳐!”
“뒤, 뒤로 밀지 마!”
“그럼 어쩌라고! 젠장!”
그나마 도망치려는 동료들의 군홧발에 짓밟혀 죽는 병사들은 사정이 좋았다. 적어도 시체의 형태 정도는 남아 있을 테니까.
지형이 좁은 협곡 탓에 막을 수도, 옆으로 피할 수도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동료를 밟고서라도 뒤로 도망치는 것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신 차려!”
“지금부터 군기를 흐트러뜨리는 자는 군법으로 엄히 다스릴 것이다!
잇따른 해머 투척 공격에 병사들의 지휘가 흔들리자 지휘관들은 목청껏 소리치며 병사들을 재정비하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 사이, 기사들은 전투 도끼나 철퇴, 해머 등을 가지고 골렘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검이나 창 같은 날붙이로 베어 봤자 의미가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먼저 그들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확실히 골렘을 상대할 때는 날붙이보다 둔기류가 훨씬 더 효과적이었으니까.
그러나 판단이 맞는 것과 이기는 건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후웅…… 쾅!
“이런 미친…….”
콰직!
두 골렘은 기사들의 공격을 피하지도, 막지도 않았다. 애초에 그들이 전력을 다해 자신들의 몸을 두드린다 해도 긁힌 자국 하나 나지 않았으니까.
그에 반해 자신들의 주먹질은 절대적이었다.
“이거나 먹어라!”
시그마는 자신을 향해서 철퇴를 휘두르는 기사를 향해 마주 주먹을 휘둘렀다.
콰앙!
주먹은 철퇴를 가볍게 산산이 박살 내더니 멈추지 않고 뻗어 나가…….
콰작!
철퇴의 주인이었던 기사의 머리도 마찬가지로 박살 내 버렸다.
그만 특별한 게 아니었다. 델타와 시그마가 막무가내로 주먹을 휘둘러도 마치 장난치는 사자 앞에서 쥐들의 전력은 무의미한 것처럼 기사들의 목숨만 허무하게 스러질 뿐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해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오러를 다루지 못하는 기사들로는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각하.”
“그런 것 같군. 하는 수 없지. 검은사자 기사단은 앞으로!”
이실로데가 검은사자 기사단을 호출하자 장비부터 분위기까지 다른 기사들과 압도적으로 차이가 나는 기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 선두에 이실로데가 검을 뽑아 들며 나직하게 으름장을 놓았다.
“지금부터 저 귀찮은 돌덩이들을 치운다.”
“예, 각하.”
그 순간, 이실로데의 검에서는 강렬한 퍼펙트 오러가, 그를 따르는 검은 사자 기사단의 검에서는 위협적인 엑스퍼트 오러가 피어올랐다.
“기사들은 뒤로 물러나라!”
아직까지 살아남은 기사들을 뒤로 물린 이실로데는 자신의 직속 기사단과 함께 골렘들을 향해서 빠른 속도로 쇄도하였다.
파앗!
과연 오러 마스터의 강자답게 그의 움직임은 골렘들과 비교해 봐도 손색이 없었다. 그를 따르는 검은사자 기사단 역시 마찬가지로 인간의 움직임을 아득히 초월한 초인들이었다.
한편, 그 모습을 절벽 위에서 지켜보던 릴리안이 흥미롭다는 말투로 곁에서 함께 구경하고 있던 요한에게 얘기를 꺼냈다.
“오러 마스터와 오러 엑스퍼트만으로 구성된 기사단이라……. 아무래도 버겁지 않을까요?”
“버겁겠지.”
“그럼 지금이라도 제가 가서 좀 도와주는 게…….”
“최소한 그랜드 오러 마스터를 필두로 오러 마스터로 구성된 기사단이라면 모를까, 저 정도로는 많이 버거울걸.”
“…….”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