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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111화 (111/150)

111. 양자택일

화이트의 등을 타고 질주하길 한참, 블랑카가 어렵게 말을 꺼내들었다.

“저…… 이렇게 아무 말 없이 가는 것도 그런데 우리 간단하게 통성명이나 하는 건 어떨까요? 저는 블랑카라고 합니다.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우리 알파…… 아니지, 요한 대공 각하와는 함께 사선을 넘나들며 피보다 진한 우정을 나눈 사이라고 할까……?”

말을 마친 블랑카는 은근슬쩍 다른 마자현의 눈치를 살폈다.

마자현은 벨로반 왕국을 출반해서 우랄 협곡을 돌아 나와 레반돌프 왕국을 눈앞에 둔 지금까지 아무 말 없이 정면만 바라보며 달리던 중이었다.

심지어 며칠 동안 쉬지도 않고 계속 달리기만 했던 탓에 화이트의 등에 편안히 앉아 있던 자신도 지치고 힘들어 죽겠는데 마자현은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것만 봐도 요한 못지않은 괴물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지만 정작 마자현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며칠 동안 제대로 말도 한 번 붙여 보지 못한 것이다.

“마자현이다.”

그런데 블랑카가 어렵게 용기를 내서 물어본 것치고 쉽게 대답이 돌아오자 다소 허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크림포드 백작가에 수호신이자 요한 대공 각하의 오른팔이 그런 이름을 쓰신다고요. 크흠! 정식으로 제 소개를 다시 드리겠습니다. 요한 대공 각하의 왼팔, 블랑카라고 합니다.”

“…….”

마자현은 그때 블랑카의 질문에 대답한 걸 후회했다. 그 이후로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블랑카의 입이 멈추는 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블랑카의 얘기는 99%가 쓸데없는 잡담 수준이라서 대부분 마자현도 무시했지만 상관없었다. 녀석은 누가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는 것보다 얘기하는 것 자체가 목적인 듯 보였으니까.

그렇게 멈출 것 같지 않던 블랑카의 주둥이도 레반돌프의 왕도를 눈앞에 두자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후우…….”

“긴장되나?”

“당연히 긴장되죠. 전쟁 중에 사신으로 찾아가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데, 저번에도 뮤탄이랑 여기랑 존타나에서 사신들이 찾아와 쓸데없는 소리 지껄였다가 국왕 전하께 목이 댕겅 날아간 사건, 모르세요? 아, 좀 구겨졌네.”

그러면서도 블랑카는 주섬주섬 챙겨 온 벨로반의 깃발을 꺼내 들었다. 벨로반 왕국의 공식 사신을 증명하는 깃발이었다.

“말하는 것만큼 두려워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군.”

“아? 그래 보여요? 이게 자랑인지 아니지만 제가 혼자 있을 때는 쥐새끼여도 사자 등에 탔을 때는 또 사자 못지않게 주둥이 좀 털 수 있거든요.”

블랑카의 천연덕스러운 대꾸에 마자현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확실히 자랑은 아니구나.”

“헤헤, 그럼 다시 한 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른팔 형님.”

어느새 마자현을 오른팔 형님이라는 이상한 명칭으로 부르는 블랑카였지만 정작 마자현은 크게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전쟁 중이라 그런지 검문소의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삼엄했다.

조금만 이상한 점이 보여도 따로 열외시켜 철저하게 조사했고 그러다 수상한 낌새가 포착되면 잔인한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의도와 목적을 철저하게 밝혀냈다.

“뭐, 뭐야 저것들은?”

“사신?”

그런 검문소 앞에 하얀 늑대를 탄 사신이 적국인 벨로반의 깃발을 떡하니 걸고 등장했으니…… 시선을 끌지 말라는 게 불가능한 얘기였다.

그런데 블랑카는 적국 검문소 병사들의 적의 어린 따가운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 넘기며 가까이 다가가더니 크게 소리쳤다.

“길을 비켜라! 위대한 벨로반 왕국의 사신께서 친히 이 나라 왕에게 전하는 우리 국왕 전하의 말씀을 가져왔느니라!”

“검문소의 문을 걸어 잠가.”

“전군, 검문소 앞으로 집합! 궁병들은 사격을 준비하라!”

검문소의 병사들은 소장의 명령에 따라 빠르게 외성문을 걸어 잠그고 성벽 위로 궁수들을 집결시켰다.

그와 동시에 검문소 앞으로 쏟아져 나오는 병사들. 그들의 모습을 보고 블랑카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상식이 결여된 동네라지만 이건 아니지 않냐? 적국이라 해도 사신을 위협하는 건 금물. 이거 상식 아니야?”

“그렇게 상식 따지는 놈들이 사신을 죽여서 목만 보낸 건가? 다 필요 없고, 우리는 받은 굴욕은 똑같이 갚아 주는 게 철칙이다. 네놈들의 모가지만 잘라서 목은 돌려보내고 몸통은 들개들의 먹이로 주도록 하지.”

“그러니까 상식이 결여됐다는 거 아니야, 이 무식한 새끼들아. 세상에 지들 왕자 죽였다고 억지 부르면서 사과하고 돈 내놓으라 하는 게 상식적인 협박이냐? 구라를 치려면 좀 성의 있게 치든가.”

“놈들을 체포하라!”

더 이상은 문답무용인 모양이었다. 검문소장은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에 병사들은 블랑카와 마자현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블랑카는 마자현을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래도 예쁘게 들어가기는 틀린 것 같은데요?”

“여기 있어. 금방 끝나니까.”

마자현은 등에 빗겨 멘 자신의 박도를 뽑아 들더니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검문소의 병사들은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상대는 한 명이고 자신들은 수백 명이 넘었으며 숫자로 찍어 누르면 맨주먹으로도 때려죽일 수 있을 거라 확신한 것이다.

그 자신감이 깨지기 시작한 건 마자현의 몸 주변으로 불꽃이 넘실대기 시작할 때부터였다.

“응?”

“저, 저건…….”

“화염의 마나다!”

“멈춰! 멈추라고!”

그러나 이미 돌진을 멈추기는 많이 늦어 버렸다. 그러는 사이에도 마자현의 몸에서는 엄청난 불길이 뿜어져 나와 그를 휘감고 있었다.

“와, 무슨 사람 몸에서 저런 게 뿜어져 나오냐? 진짜 형님은 괜찮으신 거 맞나?”

성벽을 뛰어넘을 정도로 치솟아 오른 불기둥에 뒤에서 지켜보던 블랑카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의 걱정과는 다르게 마자현은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한 표정이었다.

스윽.

마자현은 그대로 가볍게 박도를 휘둘렀다. 그러자 박도의 궤적이 이정표라도 되는 것처럼 뿜어져 나오던 불의 기세가 사납게 정면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그것은 화마(火魔)의 파도였다.

“아, 안 돼!”

“멈추라고!”

“이미 늦었어!”

콰아아아아아아아!

불의 파도는 달려오던 병사들을 모조리 집어삼킨 것으로도 부족해 그 기세 그대로 굳게 담긴 외성문에 충돌하였다.

어지간한 공성병기도 외성문을 뚫는데 족히 한 시간 이상은 필요하다. 그 정도로 외성문의 내구도는 차원이 달랐다.

그래서였을까? 성문과 충돌한 이후, 기세가 많이 사그라든 불의 파도를 보고 성벽 위에 병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자현이 이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확실히, 기세만으로 저걸 부수는 건 욕심이었나.”

화르르르르르르륵!

그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 방금 전보다 배는 더 거대한 불꽃이 그의 몸에서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블랑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확실히…… 그 화염 거인 몸속에서 나온 영약이 좋기는 좋았던 모양이네. 어후…… 조금만 더 물러나자. 화이트, 이러다 나도 타 죽겠다.”

그랬다.

블랑카의 말처럼 마자현은 요한이 챙겨 두었던 불의 거인 호로모스의 몸속에서 나온 내단을 선물받아 복용한 상태였다.

천 년이 넘게 마그마를 먹으면서 살아온 호로모스의 내단은 그야말로 불의 기운이 압축된 불의 정수였다.

그것은 깨달음이 높은데도 내공이 상대적으로 부족하여 성장하지 못한 마자현에게 신단(神團)과도 같은 축복이 되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내단 근처에만 가도 뿜어져 나오는 불의 기운으로 흔적도 없이 타 죽을 것을 전부 자신의 것으로 소화한 것이다.

그 결과…….

우우우우웅!

그는 단번에 그랜드 오러 마스터의 벽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콰우우우우우우우!

마자현이 박도를 휘두르는 순간, 그의 정면으로 화룡의 형상을 한 불꽃이 뿜어져 나와 성문에 충돌하였다.

콰아아아아아앙!

그 결과, 화룡은 사라지고 굳건히 닫혀 있던 성문 또한 거대한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성벽 위에서 대기 중이던 궁수들 역시 증발하여 사라졌다.

남은 것이라고는 성문의 잔해에 붙어 있는 불길과 화룡이 지나간 자리에 지면이 녹아내려 생긴 마그마뿐이었다.

“가자.”

“넵! 형님.”

마자현의 한마디에 블랑카는 어깨를 당당히 펴더니 그 어느 때보다 벨로반의 국기를 높이 치켜들며 뻥 뚫린 외성문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소란을 듣고 모인 왕도의 백성들이 두 사람을 구경했지만 그 누구도 두 사람을 막아서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내성에서 출동한 근위대가 병사들을 이끌고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음…… 보아하니 환영해 주려고 온 것 같지는 않는데. 어라? 속도를 더 올리네?”

가장 선두에서 앞장선 근위대는 왕실 기마대였다. 달리는 기마대는 그 무게 때문에 멈춰서는 것이 꽤나 힘들다.

그래서 멈춰 설 지점보다 훨씬 멀리서 제동을 걸기 시작하는데 놈들은 되레 제동을 걸어야 할 시점에서 폭발적으로 속도를 올린 것이다.

“성으로 접근하기 전에 여기서 끝장을 볼 생각인가 본데요? 형님.”

“우연이군. 나도 그랬으면 했거든.”

우우우우우웅!

그의 몸에서는 단 한 점의 불길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박도는 오러로 붉게 물들며 그 주변 공간이 아지랑이처럼 왜곡되어 보였다.

그것이야말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화염의 앱솔루트 오러였던 것이다.

“흡!”

콰우우우우우우우우!

마자현이 진심을 다해 검을 내리긋는 순간, 그의 검끝에서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온 화염 폭풍이 순식간에 기사단과 수천 명의 병사들을 집어삼킨 것으로도 모자라 쭉쭉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앙!

결국 뻗어 나간 화염의 폭풍은 이윽고 내성문에 닿아 성문을 완전히 박살 낸 후에야 제 할일을 마치고 소멸하였다.

그렇게 더 이상 지킬 의미가 없는 뻥 뚫린 내성문을 지나 블랑카와 마자현은 레반돌프 왕성에 입성할 수 있었다.

그렇게 왕성에서 일하는 시종들과 성에 모인 귀족들의 시선을 받으며 왕이 기다리고 있는 그랜드 홀에 들어선 두 사람.

국왕 달란트와 왕비는 최후의 보루라 할 수 있는 왕실 근위대와 병사들의 포위망 너머에서 자신들을 두려움에 찬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거참, 사신이 국왕 좀 만나겠다는데 걸리적거리게 길을 왜 막고 그러시나. 좋은 말로 할 때 좀 비켜서 주시지?”

말 하는 본새는 사신이라기보다 동네 불량배에 가까웠고 예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보기 힘든 행동이었다.

당연히 왕과 왕비의 안위를 지켜야 하는 기사들이 쉽게 길을 비켜줄 리 없었다. 그들은 대답 대신 다가오는 블랑카에게 묵묵히 검을 겨누었다.

“더 이상 접근하면 죽는다! 썩 물러가지 못하겠느냐!”

“그래서, 진짜 죽일 수는 있고?”

“이놈이……!”

기사의 경고에도 아랑곳 않고 블랑카가 그의 코앞까지 다가가자 기사는 진심으로 검을 휘둘러 블랑카의 목을 쳤다.

과연 왕실 근위 기사답게 엑스퍼트 오러가 멋들어진, 완벽하고 훌륭한 검술이었다. 다만 그 검으로 블랑카의 목을 베었는가는 또 별개의 문제였지만…….

서걱!

안타깝게도 목이 달아난 쪽은 블랑카가 아닌 기사였다. 어느새 거리를 좁힌 마자현이 박도를 휘둘러 기사의 목을 날려 버린 것이다.

“그러게 좋은 말로 할 때 비키면 좋잖아. 쯧쯧…….”

그 순간, 마자현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세가 기사들의 숨통을 옥죄었다. 그들로서는 블랑카를 막기는커녕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것이다.

그렇게 길이 열리자 두려움과 분노에 가득 차 있는 달란트 국왕의 면전까지 다가간 블랑카가 왕의 손을 덥석 쥐더니 강제로 악수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거이거, 레반돌프의 국왕 전하 아니십니까. 만나 뵙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사실 저 같은 놈팡이가 어딜 가서 국왕이랑 이런 식으로 독대를 해 보겠습니까? 으하하하하!”

“이, 이게 지금 무슨…….”

블랑카의 행동에 당황을 금치 못하는 달란트 국왕. 그런 국왕에게 블랑카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왜요? 당황스러우세요? 그래도 이해해 주세요. 하지도 않은 일로 트집 잡고, 협박하고, 남의 나라까지 침공하는 이 나라의 국격에 맞춰 사신을 찾다 보니까 저 같은 양아치밖에 남은 사람이 없더라고요. 설마 억울하신 건 아니시죠?”

“무례하다! 네놈이 지금 과인을 능멸하려 하느냐!”

“아이고, 우리 전하 또 그러신다! 그럼 거두절미하고, 왕자님들이랑 공주님들 좀 데려가겠습니다.”

“뭐, 뭐라고?”

놀라는 달란트에게 블랑카는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그것 때문에 전쟁이 일어난 거 아니었나요? 새삼스럽기는……. 선택하시죠, 이대로 저 형님 손에 왕성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지, 아니면 왕자님, 공주님 들만 순순히 내놓고 목숨을 보전하실 건지.”

웃고 있는 블랑카의 얼굴을 쳐다보는 달란트의 눈에 절망이 드리웠다.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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