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열려라 참깨!
“보아하니 전혀 모르고 있던 건 아닌 모양이군.”
“귀족 파벌에 있던 자들 중에 그림자가 아니었던 자들은 가니온이 죽고 구심점을 잃어 힘을 많이 상실했지만 저에 대한 분노가 사그라든 건 아니겠죠. 그런 자들에게 루카스 왕자님은 가니온의 뒤를 잇는 훌륭한 구심점이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들의 입맛대로 부릴 수 있는 어린 왕족이라면 더더욱 이번 기회를 놓칠 리가 없을 테니까요.”
“그럼 그에 대한 해결 방책도 생각해 둔 바가 있는가?”
“물론입니다.”
요한은 밤하늘을 가리키며 대답을 이어 나갔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지금 루카스 도련님이 저를 미워하는 이유는 제가 지금 저 하늘에 밝게 빛나는 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루카스 도련님께 가르쳐 드리면 됩니다. 저 같은 별보다 훨씬 크고 밝게 빛나는 달이 저 하늘에 존재한다는 사실을요.”
요한의 계획을 눈치챈 카일은 눈을 크게 뜨며 진심으로 놀라 물었다.
“설마 대공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이번 일을 계획했단 말인가?”
“연설 때도 말씀드렸지만 제 목적은 그저 제 고향, 제 가족, 제 후손들이 살아갈 이 터전을 지키는 것뿐입니다. 그 목적에 반하는 모든 것들은 바로 제 적이고요. 설령 그게 적군이든 나라를 병들게 만드는 알력다툼이든 말이죠.”
요한의 대답에 카일은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지 대공은 무서운 사람이야. 나도 어릴 때부터 신동 소리를 들으며 칭찬을 꽤 많이 받으며 자랐다고 생각했는데 대공 앞에서는 한없이 초라해지니까. 과연 아바마마께서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선택한 인재는 다르다는 느낌이군.”
“뮤탄, 레반돌프, 존타나 모두 당분간 회생하기 힘든 타격을 입혀 두었으니 가볍게 순회한다는 느낌으로 정벌을 하시면 저하와 왕가의 입지는 단숨에 반석 위로 오르실 겁니다. 그러면 루카스 왕자님도 저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시겠죠.”
“고생이란 고생은 자네가 전부 했는데 알짜배기는 나보고 챙기라는 말인가?”
“그게 이 나라의 질서와 균형을 위해서라면 찝찝해도 반드시 하셔야죠. 제게 제 역할이 있었던 것처럼 저하께는 저하만이 하실 수 있는 역할이 있으시잖아요.”
카일은 요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과 같은 난세에 스스로도 일국에 버금가는 무력을 가지고 있으며, 삼국을 상대로 압도할 수 있는 무력을 수하로 둔 존재.
그런 전설 속의 존재가 바로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자신이 만약 요한이었다면 스스로 망설임 없이 반역을 꾀하거나 국가를 세워도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요한은 단 한 번도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그건 요한이 욕심 없는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욕심보다 중요한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보다 어린 나이에 그 가치를 스스로 깨닫고 그걸 지키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하고 실천할 줄 아는 요한은 분명 존경받고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인간이었다.
“왜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십니까? 혹시…….”
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두 손을 모아 몸을 가리자 카일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쓸데없는 착각 말게. 그저 대공이 부러워서 잠깐 쳐다본 것일 뿐이네.”
“부럽다고요? 제가요? 지금까지 제가 한 얘기를 잘 들으셨다면 동정의 여지는 많아도 부러울 부분은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
“아무리 나라도 자네만 바라보는 여인의 눈길을 뺏어 올 자신이 없다는 말일세.”
“…….”
요한은 카일이 말하는 그 여인이 누군지 눈치채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대공은 리리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실대로 얘기하지. 나는 그 무도회장에서 그녀에게 내 마음을 빼앗겼네. 첫눈에 반했다는 말일세. 내가 듣기로 리리아의 전 약혼자가 대공이었다지?”
“그랬었죠.”
“대공의 마음은 어떤가? 아직도 전 약혼녀일 뿐인가? 만약 그렇다면 나는 지금부터 진심으로 그녀에게 다가갈 생각이네.”
카일의 말을 듣고 요한은 리리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지금까지 리리아에 대한 그의 마음은 미안함, 그리고 안타까움뿐이었다. 회귀 전의 자신은 그녀에게 몹쓸 짓만 골라 했으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회귀 전의 자신이 벌인 일이며 지금은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불과했다.
더 이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죄책감을 느끼며 그녀에게 속죄할 필요가 있을까? 만약 그 불필요한 속죄 의식에서 벗어난다면 자신은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솔직히 말씀드려서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합니다. 저에게 있어 리리아는 중요한 사람입니다. 제가 지키고 싶은 사람들 중에 포함되어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그런가. 아쉽군.”
두 사람은 그 후로도 많은 얘기들을 주고받았다.
정사에 대한 얘기도 있었지만 쓸데없는 잡담들도 많았으며 왕세자와 대공이 나눌 얘기라고는 상상도 되지 않을 음담패설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공과 왕자가 아닌…… 요한과 카일이라는 남자와 남자의 대화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조금씩 마음을 터 가며 천천히 친구가 되어 가고 있었다.
* * *
다음 날.
벨로반 왕국군의 출병식이 거행되었다.
보통 국난에 버금가는 외세의 침입을 막고 나면 설령 반격을 준비한다 하더라도 몇 달이 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세 나라의 침공군을 방어하자마자 일주일도 안 돼서 반격을 위한 병사들을 준비할 수 있었던 건 침공이 시작되자마자 이번 일을 준비했기 때문이었다.
“지금부터 우리는! 어리석은 탐욕 때문에 우리 벨로반을 침공한 우매한 무리를 징벌할 것이다! 거기에 일체의 자비도 두지 마라! 자칫 잘못했으면 놈들의 군홧발에 짓밟혔을 우리 조국, 우리 가족, 우리의 형제들만을 생각하라! 벨로반의 병사들이여! 항상 승리의 깃발과 함께하라!”
와아아아아아아아아!
포라드의 연설을 끝으로 병사들의 환호가 하늘을 찔렀다.
“전군, 출전한다.”
정벌군을 이끄는 총사령관은 다름 아닌 카일 왕세자였다. 그리고 그의 곁을 가루칸, 릴리안 같은 초인을 넘어선 전사들이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요한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는데 이는 다름 아닌 요한의 안배였다.
여기서 요한이 동행하게 되면 모든 주목을 요한이 받게 되고 이는 쓸데없는 오해를 낳게 된다.
최악의 경우, 카일은 꼭두각시일 뿐이고 요한이 모든 공적을 가로챈다는 음해를 낳을 수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루칸, 릴리안만이 동행한 것이다.
가루칸과 릴리안은 각각 오크족과 엘프족의 대표로 동맹국인 벨로반을 지지한다는 입장이었다.
때문에 두 사람의 동행은 오히려 두 사람이 카일을 지지하고 인정한다는 뜻으로 사람들에게 비춰질 수 있었다.
정벌군이 가장 처음 목적지로 잡은 곳은 다름 아닌 뮤탄 왕국이었다. 그렇게 북쪽으로 향한 정벌군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차례대로 성을 함락하기 시작했다.
“문을 열어라! 벨로반 총사령관님이신 카일 왕세자 저하의 명령이시다!”
전령이 성문 앞으로 말을 타고 가서 이렇게 소리치자 지켜보고 있던 벨로반의 병사들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진짜로 저런다고 문이 열리겠어?”
“그러게. 저런다고 문이 열리면 내 손에 장을…….”
“어? 열렸다.”
“…….”
병사들은 경악했다. 정말로 문 열라고 소리쳤다고 해서 진짜 문이 열릴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병사들의 신뢰와 존경이 담긴 시선은 모두 그러한 명령을 내린 카일에게 향했다. 그들의 눈에는 카일이 카리스마가 넘치는 군주처럼 보였을 것이다.
물론 병사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카일은 양심이 좀 찔리긴 했지만 최대한 태연한 척 연기를 이어 나갔다.
사실 이 자리에서 가장 놀란 사람은 다름 아닌 카일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대공이 하라는 대로 하긴 했지만, 설마 정말로 열릴 줄은…….’
전날 밤.
요한은 함께 온천욕을 하면서 카일에게 뮤탄 왕국을 정벌할 때의 팁 하나를 알려 주었다.
-뮤탄 왕국요? 간단해요. 가서 열려라 참깨! 하고 외치세요. 그럼 열릴 거예요.
-대공은 농담도 심하구먼. 하하하하!
-농담 아닌데. 진짠데…….
물론 뮤탄 왕국에서 순순히 문을 열어 준 이유가 있었다.
무리해서 벨로반을 침공하다 호문쿨루스들에게 박살이 난 탓에 정벌군을 막아설 군세도 한참 부족한 데다 오크족 군세가 이미 한 번 폭풍처럼 휩쓸어 놓은 탓이었다.
게다가 자신들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오크군이 정벌군과 함께 찾아왔으니…… 뮤탄 왕국 입장에서는 오크 전사들만 봐도 바지에 오줌을 지릴 지경까지 떨어졌던 것이다.
그렇게 왕도까지 요새의 형상을 하고 있는 자동문들을 거쳐 카일은 뮤탄 왕국 왕성에 입성. 손쉽게 벨로반의 깃발을 꽂을 수 있었다.
“저희의 잘못을 인정하고 원하시는 모든 배상을 지불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뮤탄 왕국의 명맥만큼은 유지시켜 주시길 간청드립니다. 카일 저하…….”
뮤탄의 국왕 롬멜러가 앉아 있어야 할 왕좌에 카일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정작 그 자리의 주인인 롬멜러와 왕가의 모든 식솔들, 그리고 귀족들이 전부 카일의 앞에 무릎 꿇고 엎드려 고개를 조아렸다.
“지금 보니 왕가의 식솔들보다 귀족들의 숫자가 훨씬 적군. 재산을 싸들고 벌써 국외로 도망친 건가?”
“그, 그러하옵니다. 저하…….”
롬멜러는 치욕을 삼키며 더욱 깊이 고개를 조아렸다.
패망한 왕족들은 타국으로 도망쳐 봤자 쓸데없는 알력 다툼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노예가 되거나 사형으로 인생이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보통은 나라와 운명을 함께한다는 그럴듯한 대의명분을 앞세워 도망치지 않는 경우가 많았지만 귀족들은 달랐다.
재산과 능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타국에서도 관직을 얻고 풍요롭게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 남은 귀족들은 왕가에 충성하는 충신들뿐인 것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듣자하니 뮤탄 왕국에도 나라를 좀먹는 그림자들이 많다고 하던데, 국왕은 알고 계셨소?”
‘……!’
“그림자? 그게 무엇입니까?”
그림자라는 말이 나온 순간,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귀족과 왕족 몇몇이 움찔거리며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카일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확인할 수 있었다.
순간, 그의 입꼬리가 씨익 말려 올라갔다.
“어리석은 왕을 선동하여 전쟁을 일으키자고 주도한 무리 말입니다. 그들이 작당 모의하여 나라의 운영을 좌지우지하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을 텐데 국왕은 모르고 계셨습니까?”
“그, 그런 무도한 자들이……! 아니, 믿을 수 없습니다! 우리 왕국에 그런 자들이 있었다면 과인이 몰랐을 리가……!”
“국왕도 알고 계실 것이오, 우리 왕국의 검이라 불렸던 가니온이 반란을 획책했었다는 사실을. 왜 그랬을 것 같소?”
“설마…… 가니온 그 작자도 그림자인지 뭔지 하는 암부였단 말입니까?”
“걱정 마시오, 국왕. 지금부터 내가 직접 이 나라에 숨어 있는 그 병부들을 도려내 줄 테니. 진짜 본론은 그 다음에 얘기하도록 합시다.”
“으아아아!”
그 순간, 결국 자신의 최후를 직감한 그림자들이 일어나 품속에 가지고 있던 비수를 꺼내 들고는 카일을 향해서 달려들었다.
그 숫자가 제법 됐는데 그들이 이 나라에 남아 있었던 건 나라에 대한 애정이나 왕실에 대한 충정 같은 게 아니었다.
‘우리의 임무는 자신이 맡은 나라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것! 그 임무에 실패한 이상, 설령 다른 나라로 도망친다 해도 같은 그림자들에게 암살당하겠지!’
결국 도망치지 않은 게 아니라 도망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자신들만 입 다물고 있으면 카일이 무슨 수로 타국의 그림자들을 찾아낼 수 있겠는가?
여기서 멍청하게 자수하는 놈이 나오지 않는 이상, 자신들의 안위는 보장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아, 아니, 저자는……?”
“베니스 경?”
“잘 아는 사이 같으니 소개는 따로 필요하지 않겠구려. 이 자가 지금부터 내게 이 나라를 좀먹고 있던 옛 동료들의 이름을 가르쳐 줄 것이오. 부디 자신의 이름이 불리지 않길 바라오.”
그림자들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