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수상한 이인조
“도련님! 조금만 더 버티시면 됩니다! 힘을 내십쇼!”
“나는 괜찮으니까…… 탈론 경이라도 어서 가세요! 여기서 둘 다 죽으면 누가 누나를 구할 수 있겠어요. 후욱…… 후욱…….”
토미의 안색은 창백했고 정돈되지 않은 호흡은 턱 끝까지 차올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절박한 표정과는 달리 한계 이상의 체력을 소진하여 축 늘어진 몸뚱이는 더 이상 움직일 생각도 하지 못하는 듯했다.
배신자들의 추격을 피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천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도망쳐 왔으며 쉬지도 못하고 이곳, 구르칸 산맥에 들어왔다.
오로지 자신의 누나를 구하기 위해서…….
열다섯 살 소년이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벅찬 짐이었지만 토미는 불평 한 번, 힘든 내색 한 번 표현하지 않았다.
탈론은 그게 너무 안타까웠다. 한창 부모님께 투정부리고 친구들과 겁 없이 뛰어 놀아야 할 시기에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 버린 것 같아서…….
그나마도 산골 부족 국가 출신이라 평지의 또래보단 체력이 남달랐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크르르르!
“이런……!”
어느 순간에 자신들을 포위한 트롤 무리를 확인한 탈론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트롤 한두 마리라면 어떻게든 처리해 보겠는데 접근하는 트롤 무리의 숫자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열 마리가 넘어 보였기 때문이다.
“꽉 잡으십쇼, 도련님!”
“탈론 경? 저는 됐으니까 혼자…….”
“그런 소리 마십쇼. 설령 그분들의 도움을 구한다 해도 저 혼자 돌아갔다간 무녀님께서 저를 용서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리고 저 역시 도련님을 이대로 내버려두고 떠날 순 없습니다. 세상에 동생을 버리고 혼자 살겠다고 도망칠 형은 없으니까요.”
그렇게 토미를 등에 업은 탈론은 끈으로 토미를 꽉 고정하더니 이를 악물고 달리기 시작했다.
물론 탈론의 상태도 정상은 아니었다.
오히려 추격자들과 숱한 전투를 치르며 도망친 데다 구르칸 산맥에 도착해서도 수시로 몬스터들과 사투를 벌였으니 어떤 의미론 토미보다 더 심각한 상태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리 꺼져!”
촤악!
탈론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선 트롤의 목을 단숨에 베어 버렸다.
어디서 그런 힘이 솟구쳐 오르는지는 모르겠지만 트롤의 목을 단숨에 베어 버린 탈론은 가파른 비탈길을 정신없이 뛰어 올라갔다.
크르륵! 크아아!
동료의 죽음을 확인한 트롤들은 울부짖으며 무서운 속도로 탈론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구르칸 산맥이 안전한 것도 오크족들이 지키는 교역로와 그 주변에 한해서지, 그 외에는 아직도 악명 높은 구르칸 산맥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 주었던 것이다.
‘젠장, 젠장!’
탈론은 토미를 업고 전력으로 뛰면서 절망했다. 이미 호흡을 지속할 수 없을 만큼 지쳐 버린 지 오래다. 언제 발이 멈춰서 넘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 트롤들을 따돌리기는커녕 사람 냄새를 맡은 몬스터들의 숫자만 갈수록 늘어나고 있었다.
너무나도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탈론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정신력은 아직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헉!”
털썩!
그의 정신력과 반대로 체력은 이미 한계의 한계를 넘어선 상황이었다. 어이없이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진 탈론은 더 이상 일어나지 못했다.
“제발, 제발……!”
“이제 그만 노력해도 돼요. 탈론 경…… 아니, 형. 그동안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마지막까지 지켜 드리지 못해서…….”
주먹으로 허벅지를 아무리 내려쳐도 경련이 일어난 다리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탈론은 다가오는 몬스터 무리를 돌아보며 토미를 끌어안더니 결국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 순간!
“응? 어쩐 일로 여기에 사람이 다 있대?”
* * *
한창 카일이 정벌군을 이끌고 침공국들을 순회하던 그때, 요한은 구르칸 산맥에서 수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콰콰콰콰콰쾅!
“좋습니다, 주군. 이전보다 훨씬 마나 로드의 컨트롤에 여유가 생기고 자연스러워지신 것 같습니다.”
“아직 멀었어!”
요한과 마자현이 서로 충돌할 때마다 번개가 작렬하고 불꽃이 타오르며 산맥을 넘실거렸다.
두 사람이 이곳을 훈련장으로 사용하는 이유는 평범한 훈련장에서 겨뤘더니 순식간에 훈련장이 대파되었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민폐를 부릴 수 없었던 요한은 마자현과 함께 남들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구르칸 산맥으로 자리를 옮겨 수련을 계속했다.
콰우우우우우우!
마자현이 무기를 휘두르자 엄청난 기세를 품은 화염의 파도가 성난 말처럼 뛰쳐나가 요한을 집어삼켰다.
그런데 마자현의 무기가 이상했다. 평소에 사용하던 박도가 아니라 오리하르콘 블레이드였던 것이다.
마나의 전도율이 금속 중 최고라는 오리하르콘답게 마자현이 그것을 가지고 초식을 펼치자 같은 마나로도 평소보다 1.5배는 더 강력한 초식을 전개할 수 있었다.
그 위력에는 마자현 본인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허투루 낭비되는 마나가 굉장히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한편, 덮쳐오는 화염의 파도에 대항하여 요한은 손을 곧게 피더니 관수를 내질렀다.
콰르릉!
관수 끝에서 발출된 뇌전은 빠르고 날카롭게 화염의 파도를 가르며 마저현에게 쇄도했다.
마자현은 블레이드로 날아오는 뇌전을 쳐내 흘렸지만 그 여력만으로도 손이 저릿저릿하고 온몸이 마비가 되는 게 느껴졌다.
“합!”
하지만 기합으로 순식간에 몸속을 침투한 뇌전의 마나를 튕겨낸 마자현은 곧장 빠르게 쇄도하는 요한을 상대로 블레이드를 어지럽게 휘둘렀다.
콰콰콰콰콰콰콰쾅!
분명 오리하르콘 무구와 맨손이 부딪히는 것일 텐데…… 오히려 밀리는 쪽은 마자현이었다. 마자현의 표정을 보면 그렇다고 그가 요한을 봐주고 있는 건 절대 아니었다.
그렇게 한동안 이어지던 두 사람의 경천동지할 수련이 끝나자 마자현은 요한에게 자신이 사용했던 무기를 돌려주려고 했다.
“응? 이건 왜? 이제부터 이건 네 거라니까?”
“이 무구가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 않습니다. 속하에게는 분에 넘치는 무기라 여겨지니 부디 가져가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화염의 마나를 다루는 그랜드 오러 마스터한테 오리하르콘 무구가 분에 넘친다면 그걸 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신경 쓰지 말고 가져. 난 그거 말고도 차고 넘치니까.”
“하오나…….”
“정 그렇게 돌려주고 싶으면 날 이긴 다음에 억지로 내 손에 쥐어 주든가. 자꾸 이렇게 떼쓰면 네 딸한테도 한 자루 쥐여 줄 거야. 요새 아빠 따라서 무공 수련에 열심이라면서?”
딸 마소연에게도 오리하르콘 무구를 선물하겠다는 요한의 협박 아닌 협박에 마자현은 결국 피식 웃으며 요한의 선물을 받아들였다.
“가문의 가보라 생각하고 소중히 다루겠습니다.”
“소중히 여기지 말고 팍팍 써. 망가지면 또 줄 테니까. 나한테 그런 거보다 네 목숨이 백만 배는 더 소중하다고. 만약 그거 아끼다가 다치기만 해 봐. 아주 그냥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명심하겠습니다.”
마자현은 자신이 섬길 주군을 정말 잘 선택했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심득에 대해서는 진척이 좀 있으십니까? 주군께선 재능이 뛰어나신 만큼 마나 로드의 컨트롤에 대해선 거의 완벽하게 터득하신 것 같으신데 말입니다.”
“네 말대로 그건 확실히 요령을 터득했어. 덕분에 지금은 고통도 짧게 끝낼 수 있고, 하지만 이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해.”
“무엇이 말입니까?”
“애초에 내 몸이 견딜 수 있는 위력에는 상한선이 있어. 뇌전의 마나야 항상 고통이 따랐지만 전에는 가볍게 다룰 수 있었던 수준의 마나도 지금은 거의 목숨을 걸어야 하거든. 물론 이전에도 위험할 정도의 마나라면 지금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상황이고.”
한마디로 전체적인 위력은 상승했지만 가용 가능한 마나의 범위는 대폭 줄어든 셈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심득의 두 번째 구결을 해결해야 하더라.”
“두 번째 구결이라면…….”
“금강체(金剛體). 구결에는 그렇게 쓰여 있더군. 금강 이상으로 단련된 몸은 더 이상 뇌전이 해할 수 없으며 오히려 뇌전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경지라지.”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겠습니까?”
요한은 고개를 저었다.
“아쉽지만 이건 나 혼자서 어떻게든 해결해 봐야지. 그리고 이걸 해결하지 못하면 마지막 구결은 시도조차 못 할 테니까. 그런데…….”
요한의 시선이 어느 쪽으로 향하자 마자현의 시선도 덩달아 그곳으로 향했다.
“이건 분명 사람의 인기척이 맞지?”
“예. 기척이 꽤나 미약한 게 제법 위험한 상황 같습니다. 불법 통행일까요?”
“글쎄. 가 봐야 알겠지?”
파지직! 화르륵!
거리는 상당히 멀었지만 두 사람에게는 그리 먼 거리도 아니었다. 그렇게 요한과 마자현은 인기척이 느껴지는 장소를 향해 빠르게 몸을 날렸다.
“응? 어쩐 일로 여기에 사람이 다 있대?”
그렇게 인기척이 느껴지던 장소에 도착하자 요한과 마자현은 몬스터들에게 포위당한 두 사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 명은 제법 잘 단련된 무인 같고, 다른 한 명은 아이인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흐음…….”
사실 구르칸 교역로의 가격이 비싸다 보니 개통 초반에는 이런 식으로 산맥을 돌아 넘으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교역로 이외의 산맥은 여전히 지옥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돈을 아끼려고 목숨을 거는 상인들의 숫자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무엇보다 상인처럼 보이지도 않단 말이지.’
“불법 통행이건 뭐건 일단 사람은 살리고 봐야지. 데려와.”
“존명.”
화륵!
복명한 마자현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탈론과 토미의 눈앞에 나타난 순간, 몬스터들은 마자현을 보고 눈을 부릅뜨며 한 걸음 물러섰다.
“꺼져라.”
단 한마디였을 뿐이다. 하지만 마자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끔찍한 기세에 깜짝 놀란 몬스터들이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다친 덴 없나?”
“하아, 하아…… 감사…….”
툭.
살았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결국 토미와 탈론은 긴장의 끈을 놓치고는 정신을 잃어버렸다.
“기절했습니다. 몸에 큰 부상은 없고 기력은 많이 쇠한 상태입니다.”
“일단 내 별장으로 옮기자.”
두 사람을 진맥한 마자현의 보고에 요한은 히로벤칼 자작령에 위치한 자신의 별장으로 두 사람을 이송하였다.
* * *
“으윽…….”
옅게 신음을 흘리며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토미였다.
“여긴……?”
“어머, 정신이 드셨어요?”
자리에서 일어난 토미는 주변을 둘러보다 낯선 여인을 발견하고는 잔뜩 경계했다. 요안나는 미리 준비해 둔 스프를 난로에 살짝 데워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걱정 마세요. 여기는 안전해요. 많이 굶으신 모양인데 이것 좀 드시고 계세요. 도련님…… 아니지, 대공 각하를 모시고 올게요!”
“아…….”
그렇게 요안나가 자기 할 말만 하고 떠나 버리자 토미는 물끄러미 수프를 내려다보았다.
꼬르륵!
꿀꺽…….
수프에 무슨 수작을 해놨다고 의심하기에는 수프에서 올라오는 고소한 냄새와 허기진 배를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결국 요한이 도착했을 땐 이미 그릇은 설거지가 필요 없을 정도로 깨끗하게 비워진 후였다.
“어, 벌써 다 먹었네. 부족하면 더 줄까?”
“……부탁드립니다.”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