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거절할 수 없는 부탁
“그래, 배는 좀 찼고?”
“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이름은?”
“토미입니다.”
“반갑다. 난 요한이라고 한다.”
요한은 옆에 있던 의자를 토미가 누워 있는 침대 옆까지 끌어당겨 앉았다.
“그래, 보아하니 모험가나 용병은 아닌 것 같고…… 그 위험한 곳에서 캠핑을 하려던 것도 아닌 것 같던데 거긴 왜 있었던 거냐?”
“저, 저기 저랑 함께 있던 사람은 어떻게 됐나요?”
“그 친구는 너무 걱정하지 마. 지금 푹 쉬고 있을 테니까. 다행히 큰 부상은 없어서 정신만 차리면 자리를 털고 일어날 거다.”
“다행이다…….”
토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가 요한에게 사정을 털어놓았다.
“사실 저희는 이 나라에 있는 어떤 분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어떤 분? 그게 누군데?”
“알파 경이라는 분인데 혹시 알고 계신가요?”
“알파라…….”
“알파라면 도련님을…… 흡!”
요안나는 요한이 자신을 쳐다보며 슬쩍 고개를 젓자 자신의 입을 막으며 눈치를 살폈다. 그 모습에 토미는 확신했다.
눈앞의 남자가 알파라는 인물을 확실히 알고 있을 거라고.
“부탁드립니다! 그분을 알고 계시면 저를 그분과 만나게 해 주세요! 그분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뭣 때문에 만나게 해 달라는 건지 내용은 들어 봐야 판단할 수 있을 거 아냐. 얘기해 봐, 목숨 걸고 그 녀석을 찾아온 이유가 뭔지.”
“……저는 군트람 산에서 왔습니다. 군트람 산은 대략 1만 5천 명 정도의 군트람 부족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이죠. 작은 부족 국가라 주변 대국들에게 인정도 못 받는…… 그런 나라입니다.”
‘군트람이라……. 확실히 들어 본 기억은 없군. 그림자가 연관되어 있다면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그림자들조차 취급하지 않을 정도로 작은 부족 국가인가 보군.’
“그래도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니에요. 워낙 가진 것도 없고, 볼 것도 없는 산 주제에 험하기는 주변에서 제일가다 보니 나라가 약소해도 침공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지금까지 평화롭게 살 수 있었던 거고요.”
토미의 대답을 듣고 요안나가 귓속말로 요한에게 속삭였다.
“그게…… 좋은 점인가요?”
“당사자가 사는 데 불편함 없고 행복하다면 충분히 장점이 될 수 있지. 애초에 싸울 걱정 없는 나라에서 사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데.”
“그건 그러네요.”
요새 벨로반의 정세만 봐도 그렇다. 물론 진짜 위험한 일들은 요한이 모두 막아 주었지만 세 나라가 침공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의 분위기가 한껏 무겁고 우울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평화로운 부족에 무슨 문제가 있어서 알파를 찾아온 거지?”
“저희 부족은 예전부터 신을 모시는 무녀와 부족 최고의 전사가 혼인을 맺는 풍습이 있거든요. 이번 대의 무녀는 우리 누나가 됐는데 최고의 전사란 게 하필이면 가울푸스 그 녀석이 되는 바람에…….”
토미는 고개를 숙이며 무거운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처음에야 누나에게 관심 있고 좋아하는 줄 알았죠. 하지만 전사의 의식에서 최고의 전사에 등극하여 누나와 약혼을 맺자 가울푸스는 본색을 드러냈어요. 녀석의 목적은 누나가 아니라 신내림을 받은 무녀들만 열 수 있는 신전이 목적이었던 거예요.”
“신전?”
“네. 부족에 전해 내려오는 뜬소문 같은 건데 그 신전 안에는 한 사람이 평생을 펑펑 써도 티도 안 날 만큼 금은보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나 봐요. 물론 그건 문을 열 수 있는 무녀 본인도 몰라요. 예언의 주인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무녀라도 함부로 문을 열 수 없다더라고요.”
“흠…….”
결국 토미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녀석의 눈가에서는 슬픔과 분노가 방울져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가울푸스는 그 뜬소문만 믿고 누나를 협박했어요. 하지만 누나는 완강히 거절했죠. 아버지는 그런 가울푸스를 말리려 했어요. 그러자 그 개자식은 누나와 제가 보는 앞에서 아버지를…….”
“됐다. 그 이상은 얘기하지 않아도 돼. 그래서 부족을 탈출해 이곳까지 찾아온 거냐? 알파에 대해서는 또 누구한테 들었는데?”
“가끔 저희 부족을 찾아오는 엘프분들이 있거든요. 알파 경의 전설 같은 일화에 대해서는 그분들께 들었어요. 엘프 분들은 알파 경이야말로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진정한 영웅이라고…….”
“진정한 영웅이라……. 틀린 말은 아니네요. 그렇죠, 도련님? 아니, 각하?”
요안나가 은근히 묻자 요한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그럴 거면 그냥 편하게 불러. 그리고 진정한 영웅 같은 거 아니야. 그 녀석은…… 그냥 목적과 계획이 어쭙잖게 맞아떨어졌던 거지.”
“어쨌거나 결과는 똑같잖아요? 그럼 된 거 아니에요?”
“됐다. 말을 말자. 그건 그렇고 왜 그렇게 위험한 산맥을 넘으려고 한 거야? 추적자들을 피하기 위해서?”
“그게…… 다른 곳은 전쟁 때문에 도저히 발을 들일 수조차 없어 보여서…….”
“아…….”
하기야, 북쪽도 동쪽도 남쪽도 모두 전쟁 중이었으니 이들의 선택지는 울며 겨자 먹기로 구르칸 산맥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돈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으니 제대로 된 교역로를 사용하는 것도 무리일 테고.
“다시 한번 부탁드릴게요! 꼭 좀 알파 경을 만나게 해 주세요! 그게 안 되면 제 얘기라도 그분께 전해 주세요! 전 반드시 엄마와 누나를 구하고 아빠의 복수를 해야 한단 말이에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머리 숙여 부탁하는 토미의 모습에 요한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꾸했다.
“알았다. 일단 얘기는 해 두마. 뭐, 그렇다고 크게 기대하지는 말고. 그 친구가 요새 좀 바쁘거든.”
요한은 머리를 긁적이며 방을 나섰고 요안나는 그 모습을 쳐다보다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토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 마. 알파 경께서 반드시 네 엄마와 누나를 구해 주실 테니까.”
“그게 정말이에요?”
“그럼! 알파 경은 누구보다 가족을 사랑하고 아끼는 분이시거든. 그런 분께서 가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자신을 찾아온 소년의 부탁을 거절할 리가 없지.”
‘나 참, 쓸데없는 소리 하기는…….’
한편, 문밖에 기대서서 요안나가 하는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요한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어디 보자…… 그러고 보니 내가 가면을 어디다 뒀더라……?”
* * *
“세상에……!”
그날 저녁. 요한은 오랜만에 알파의 가면을 착용하고 토미의 앞에 나타났다. 토미는 알파가 자신을 찾아오자 너무 놀라고 기뻐서 제대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저, 정말 알파 경이세요? 제 부탁을 들어 주시려고 오신 건가요?”
“그렇다, 토미 소년. 내 친구 요한에게 얘기는 모두 전해 들었다. 기특하고 장하구나. 가족을 지키고자 하는 네 마음 내가 반드시 도와주도록 하마.”
토미는 감격에 차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런데 목소리가 요한이라는 친구분과 되게 비슷하네요?”
“기분 탓이다.”
“그러고 보니 체격도 비슷한 것 같고…….”
“그 또한 기분 탓이다. 그런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군트람 산의 위치는 어디쯤인지 가르쳐 주겠나?”
“그건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새로운 목소리의 주인은 탈론이었다. 기력을 회복한 탈론이 말끔하게 새 옷으로 갈아입고 등장한 것이다.
“움직일 수 있겠나?”
“배려해 주신 덕분에 충분히 쉬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래, 한 시가 바쁜 상황이니 일단 움직이도록 하자고.”
요한은 화이트의 등에 두 사람을 태웠다.
“와! 진짜 신기하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새하얀 늑대도 처음보고, 늑대를 타보는 것도 처음인데 그 늑대가 갑자기 날개를 만들어 펼치자 두 사람의 놀라움은 멈추지 않았다.
“꽉 잡고 있어. 놓치면 큰일 나니까.”
“예!”
뒤에 탄 탈론이 앞에 탄 토미를 끌어안듯 고정하여 단단히 고삐를 움켜쥐자 화이트가 날개를 펄럭이며 순식간에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럼 다녀올게.”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화이트가 날아오르는 것을 확인한 요한도 요안나의 배웅을 받으며 그렇게 밤하늘로 훌쩍 날아올랐다.
* * *
높은 상공의 밤하늘을 빠른 속도로 비행하는 탓에 추위는 상상을 초월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견디지 못할 수준의 추위였지만 토미와 탈론은 아무렇지 않았다.
요한이 두 사람에게 나노 크리에이터를 입혀 한기로부터 보호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한 번의 휴식도 없이 빠르게 군트람 산으로 도착한 세 사람은 곧장 마을에 내려서지 않고 근처 수풀에 숨어들었다.
“다시 한 번 확인하지만 최우선 사항은 복수가 아니라 엄마와 누나의 구출 맞지?”
“물론입니다.”
토미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고 있다가 신호를 주면 나와. 그 전에 나는 먼저 두 사람을 구출할 테니까. 그런데 두 사람이 갇힌 곳 말이야. 어딘지 짐작 가는 곳 있어?”
“거기라면 아마 가울푸스의 집일 확률이 가장 높습니다. 놈은 타인을 절대로 신뢰하지 않으니까요.”
“안내 좀 부탁할게. 화이트 너는 여기서 토미를 지키고 있어.”
“예, 마스터.”
“헉! 너 말도 할 줄 알아?”
대답하는 화이트와 놀라는 토미를 뒤로하고 요한과 탈론은 빠르게 가울푸스의 집으로 향했다.
가울푸스의 저택은 야심한 밤에도 경비가 꽤나 삼엄했다. 그래 봤자 이 부족 수준으로 삼엄하다는 뜻이었지만.
“네 말대로 토미의 엄마와 누나가 여기 갇혀 있는 게 맞는 모양이네.”
“제가 미끼가 되겠습니다. 그사이에 알파 경께서는 두 분을 구출해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굳이…….”
요한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얘기하려던 순간, 탈론의 얼굴을 보고 말을 삼켰다.
‘이 녀석…… 남자구먼.’
요한은 가면 속으로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사실은 누구보다 두 사람을 구하러 가고 싶은 건 자신일 텐데…… 그 소중한 기회를 가장 가능성이 높은 자신에게 맡긴 것이다.
‘나노, 그 녀석 죽게 하지 마라.’
[네. 마스터]
“그럼 부탁하지. 무운을 빈다.”
“알파 경도요.”
대답을 마친 탈론은 망설임 없이 가울푸스의 집 앞으로 달려가 소리쳤다.
“가울푸스 이 짐승만도 못 한 새끼야! 면상 좀 보자! 아니면 쫄아서 나오지도 못하겠냐?”
갑작스러운 이변에 가울푸스의 집 앞을 경계하고 있던 병사들도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뭐야, 저건? 탈론 아니야?”
“탈론? 저 새끼, 토미랑 같이 도망친 거 아니었냐?”
“뭐가 됐든 제 발로 나타나 주면 우리야 땡큐지. 저 놈이랑 토미를 놓쳐서 가울푸스한테 깨졌던 걸 생각하면……. 어후!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네!”
“저 새끼 당장 잡아!”
병사들은 험상궂은 기세를 거침없이 발산하며 탈론을 향해 달려들었다.
‘젠장,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야 한다!’
검을 꺼내 든 탈론은 마른침을 삼키며 자세를 취했다. 무슨 방법을 썼는지 모르겠지만 그동안의 피로가 전부 씻겨 내려간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하지만!
촤악! 쒜엑!
군트람의 전사들은 수가 작아도 용맹하고 뛰어난 전사들이다. 물론 개인적인 실력은 탈론이 좀 더 높더라도 숫자의 이점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챙챙챙챙!
“뒈져라!”
“이런……!”
결국 서너 명의 병사들과 정신없이 검을 나누던 와중에 기습적으로 뒤를 노리고 달려드는 한 녀석의 창을 막아 내지 못하고 옆구리를 내주었다.
탈론은 이를 악물며 다가올 격통에 대비했다.
그런데…….
빠각!
“헐?”
“뭐, 뭐야? 왜 몸은 멀쩡하고 창이 부러지는 건데?”
전력으로 찌른 창은 부러지고 옆구리는 생채기하나 나지 않은 것이 아닌가?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탈론은 이 기회를 살려 크게 소리쳤다.
“자, 다 덤벼라! 이 개자식들아!”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