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고대 신전
“으하하하하! 자, 마셔, 마시라고. 오늘 한 번 코가 삐뚤어지게 마셔 보자!”
가울푸스는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과 함께 흥겨운 술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그래도 명색이 무녀의 약혼자라는 사내가 양옆에 여자를 끼고 주무르는 모습이 썩 보기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그걸 탓하는 부하는 아무도 없었다.
“이제 조만간입니다, 대장. 놈들이 미치지 않은 이상 구르칸 산맥으로 기어 올라갔을 리는 없으니 토미도 곧 우리 손에 들어오겠지요. 그렇게 되면 라니아 그 계집도 지금처럼 고집을 부리지는 못할 겁니다요.”
“크하하하! 그렇겠지. 토미만 손에 넣는다면 신전에 쌓여 있다는 보물도 우리의 것이다!”
부하의 아부에 가울푸스는 기분 좋게 웃으며 탐욕에 젖은 눈동자를 번뜩였다.
두 사람을 쫓던 부하들은 아직 토미와 탈론이 구르칸 산맥으로 올라갔다는 사실을 보고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대장, 혹시 라니아의 말처럼 신전 안에 보물이 없으면……. 아, 죄송합니다. 제가 말을 잘못 꺼냈나 보네요. 하하하…….”
조바심이 났던 부하 하나가 말을 잘못 꺼내는 바람에 자리의 분위기가 차게 식었다. 부하는 자신이 실수한 것을 인정하고 어떻게든 어설픈 웃음으로 무마시키려 했지만…….
“야, 술맛 떨어진다. 누가 흥 좀 올려 봐라.”
“제가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분위기를 망쳐, 이 병신 새끼야!”
퍽퍽퍽퍽퍽!
“잘못했습니다! 제발 살려만…… 커헉!”
“으하하하하! 잘한다. 잘해! 탈론 그 새끼는 꼭 살려서 데려와야 한다. 그 녀석은 내 손으로 반드시 저렇게 만들어…….”
“자, 다 덤벼라! 이 개자식들아!”
순간, 밖에서 터져 나온 익숙한 목소리에 가울푸스의 인상이 크게 일그러졌다.
“방금 그 목소리는 탈론이랑 비슷한 거 같은데…… 혹시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에이, 설마요. 그 새끼가 미치지 않고서야 제 발로 돌아올 리가…….”
“잔소리 말고 빨리 나가서 확인해 보란 말이다! 너희 둘은 혹시라도 탈론이 헛짓거리를 꾸미고 있을 수도 있으니 두 년을 제대로 확인하고 감시해라.”
“알겠습니다. 대장…….”
갑작스러운 난동에 술자리가 깨지자 명령을 받은 두 사람은 아쉬움이 먼저 앞섰지만 그래도 군말 없이 라니아와 그녀의 어머니가 갇혀 있는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 * *
감옥으로 향하는 도중 두 사람은 신세를 한탄하며 가울푸스의 명령에 대해 투덜거리고 있었다.
“하아……. 술은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데 이게 무슨 사달이냐.”
“하여간 대장은 걱정도 팔자야.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의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거지새끼를 도와서 이곳까지 찾아올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러게 말이야. 내가 왜 그 녀석들을 도와준다고 한 걸까?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단 말이지.”
“응?”
별안간 처음 듣는 목소리에 두 사내가 깜짝 놀라 서로를 쳐다보았다. 두 사내는 서로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대답한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럼 대체…….”
두 사내의 시선이 딱딱하게 뒤로 돌아가는 순간, 요한은 그들을 향해서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안녕? 길 안내 고마웠다.”
퍽, 퍽!
가볍게 두 사내를 주먹으로 기절시킨 요한은 그 길로 지하 감옥을 향해 내려갔다.
감옥 앞에는 경비병 두 명이 지키고 있었는데 처음 보는 요한이 접근하자 창을 겨누며 그를 위협하였다.
“웬 놈이냐! 정체를 밝혀라!”
“그건 알 거 없고, 그거 내려놓고 조용히 꺼지면 딱 한 번만 봐줄게.”
“개소리 집어치워!”
“나도 그럴 줄 알고 한 번 해 본 소리야.”
쾅쾅!
경비병 둘이 동시에 자신을 향해서 달려들자 요한은 가볍게 창을 피한 뒤, 두 녀석의 머리를 잡아 땅에 심어 주었다.
그렇게 굳게 닫힌 철문을 강제로 뜯어내 안으로 들어가자 아니나 다를까…….
“어째 예상했던 그림 그대로냐?”
“움직이지 마! 거기서 한 발자국이라도 더 움직이면 이년의 목숨은 없다!”
“크윽!”
안에서 대기 중이던 가울푸스의 부하가 라니아를 붙잡고 그녀의 목에 단검을 가져다 대며 요한을 협박했다.
단검이 그녀의 피부를 벤 것인지 그녀의 목에서는 살짝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라니아는 개의치 않고 소리쳤다.
“상관없어요! 당신이 누군진 모르겠지만 부탁드려요! 제발 이 비열한 자들을 쓰러트려 주세요! 이들이 이곳에 남아 있는 이상, 제 동생과 그 사람은 절대로 마을에 돌아올 수 없을 거예요. 그러니 제발……!”
“닥쳐, 이 썅…….”
턱.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라니아의 입을 막기 위해 부하가 그녀의 입을 단검으로 찢으려 했지만 그의 손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요한이 그의 손을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어, 언제……?”
“이러려고 날 보낸 건데 여기서 이 여자가 다치면 내 체면이 뭐가 되겠냐?”
으드득!
“크아악!”
요한이 살짝 힘을 주자 부하의 팔이 부러지면서 그가 쥐고 있던 단검이 자연스럽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휙, 쿵! 털썩…….
요한이 더 이상 관심 없다는 듯 녀석을 아무렇게나 집어 던지자 벽에 머리를 부딪친 녀석이 바닥으로 떨어져 완전히 기절해 버렸다.
“괜찮아요? 라니아 무녀님 맞죠? 이쪽은 무녀님의 어머님 되시고.”
“네, 그런데 당신은……?”
요한은 갇혀 있는 동안 기력이 많이 쇠한 그녀의 어머니를 엘레노아의 티아라의 능력으로 치유하면서 라니아의 질문에 대답했다.
“저는 알파라고 합니다. 당신의 동생과 탈론이라는 전사가 저를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더군요.”
“알파 경이요? 그분은 분명 뇌전의 마나를 다루시는 아바타라고…….”
“아, 이거요?”
파지직, 파직!
요한은 손가락 끝으로 뇌전의 마나를 피워 보였다.
“저야 익숙하지만 아직도 남들이 보기에 신기한 힘이긴 하죠. 뭐, 이런 녀석들을 상대로 쓸 힘은 아니지만요.”
뇌전의 마나를 확인한 라니아의 두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잠깐 스며들었다가 사라졌다.
“동생은요? 토미는 무사한가요?”
“제가 신뢰할 수 있는 경호원과 함께 있으니까 안심하십쇼. 물론 탈론 경도 함께 왔고요.”
“그 사람은…… 괜찮아요? 많이 다친 곳은 없던가요?”
탈론을 걱정하는 라니아의 두 눈에는 진한 감정이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걱정되시면 함께 가시죠.”
요한은 잠든 그녀의 어머니를 부드럽게 안아 들고는 라니아와 함께 밖으로 향했다.
* * *
“이런 망할 것들! 고작 저 한 놈을 처리 못 해서 이 모양 이 꼴이 됐단 말이냐!”
밖으로 뛰쳐나온 가울푸스는 쓰러져 있는 부하들과 숨이 찼을 뿐, 아직 멀쩡해 보이는 탈론을 보며 도끼눈을 부릅떴다.
“가울푸스, 못 보던 사이에 배에 기름기가 잔뜩 꼈구나. 이제 네 세상이 됐다고 착각한 건 아니겠지?”
“이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새끼가……!”
탈론의 도발에 가울푸스는 직접 검을 빼 들고 그를 향해 빠른 속도로 뛰어갔다.
“안 돼!”
“괜찮아요. 안심하시고 지켜보시죠.”
숨어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라니아는 깜짝 놀라 뛰쳐나가려고 했지만 요한이 만류하여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탈론을 걱정하는 그녀의 마음은 더욱 커져만 갔다.
챙챙챙챙!
탈론과 가울푸스가 맞붙으며 두 사람은 빠르게 검격을 나누었다.
체격과 체중이 큰 가울푸스가 힘에 의존한 검격으로 탈론을 밀어붙일 때마다 탈론은 한 걸음씩 밀려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가울푸스가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이죽거렸다.
“전사의 의식 결승전의 재현이로구나. 탈론! 그때 네놈의 숨통을 끊지 못한 걸 아직도 후회하고 있었는데 오늘에야말로 네놈의 목을 딸 수 있겠구나. 크하하하!”
“글쎄…… 나와는 생각하는 결말이 전혀 다르군.”
분하지만 타고난 역량은 가울푸스가 탈론의 위였다. 탈론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역량이 뛰어난 것과 승부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타합!”
‘동귀어진? 멍청한 놈! 네놈의 모가지부터 날려 주마!’
방어를 도외시하고 자신의 목을 노리는 탈론의 일격에 가울푸스는 비웃음을 날리며 똑같이 응수해 주었다.
당연히 가울푸스가 자신한 만큼 그의 검이 먼저 탈론의 목을 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깡!
‘깡?’
분명 맨살이 보이는 목을 쳤는데 어째서 ‘서걱’이 아닌, ‘깡’ 소리가 들린 것인지 가울푸스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그 의문을 풀 길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몸에서 분리된 그의 머리는 바닥을 구르고 있었으니까.
“하아, 하아…….”
“탈론!”
탈론이 승리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뛰쳐나간 라니아가 탈론의 품에 안겼다.
“무녀님!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멍청아, 무녀님이 뭐야. 예전처럼 라니아라고 불러.”
“하지만……. 읍!”
탈론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라니아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을 막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화끈한 무녀님이시구먼.”
요한은 그 모습을 뒤에서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 * *
사건이 정리되고 가울푸스를 따르던 부하들도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을 받았다.
죄의 자질이 무거운 자들은 사형에 처하기도 하는가 하면, 말단 끄나풀들은 감옥에서 몇 개월 썩는 것으로 죗값을 치르기도 하였다.
“좋냐.”
“네. 요한 형! 아, 아니. 알파 경! 정말로 감사합니다! 경이 아니었다면 우리 누나랑 엄마…… 그리고 매형은 절대로 무사하지 못했을 거예요.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를 도대체 어떻게 갚아야 할지…….”
피식.
요한은 너무 큰 은혜를 입어 되레 미안해하는 토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렇게 은혜를 갚고 싶으면 앞으로 누나 말도 잘 듣고 열심히,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 그거면 된다. 그럼 형은 간다.”
“잠시만요!”
그렇게 축제 분위기인 마을을 뒤로하고 요한이 돌아가려는 순간, 라니아가 달려와 요한을 붙잡았다.
“할 말이 더 남았나요?”
“그게 아니라…… 아바타 님에게 보여 드려야 할 게 있어서요.”
“저에게요?”
“네. 저희 군트람 산을 지켜 온 무녀들이 대대로 이어 받아온 숙명이 바로 당신과 관련이 있거든요.”
“……?”
요한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회귀 전에도, 회귀 후에도 군트람 산에 대해서 보고 들은 건 맹세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자신과 관련이 있다면…….
“부탁드릴게요.”
“네. 저를 따라오시면 돼요. 두 사람은 여기 있어 줄래?”
라니아의 부탁에 토미와 탈론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무녀와 아바타에 관한 일이라면 자신들이 끼어들 영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라니아를 따라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신전의 입구였다.
“여긴…….”
“군트람 신전이에요. 저희 무녀들의 역할은 이 안으로 빛의 권능을 가진 분들을 인도하는 것이랍니다.”
“빛의 권능요? 그게 저라는 말씀인가요?”
“저도 확실히는 잘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한번 확인해 보시겠어요? 제가 사람을 잘못 본 거라면 사과하겠습니다.”
요한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도 흥미가 좀 생기네요. 과연 무녀님이 말씀하신 그 존재와 제가 관련이 있을지. 방법은요?”
“신전 입구에 손을 대고 마나를 주입하시면 됩니다. 선택받은 그 존재가 맞다면 문이 반응할 거라고 하더군요.”
꽤나 쉬운 방법에 요한은 곧장 신전 문에 손을 대고 뇌전의 마나를 끌어 올렸다.
파지직, 파직!
그렇게 그의 손바닥에 전류가 방출되며 밝은 빛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오던 순간.
쿠구구구구궁…….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고대 신전의 문이 요한에게 길을 허락해 주었다.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