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신마의 진실
“지금 이거…… 열린 거 맞죠?”
“그런 것…… 같은데요?”
“그런데 저보다 놀라시는 것 같네요? 열릴 거라 생각하고 안내한 거 아니었어요?”
“그건 그런데 좀 얼떨떨해서요. 저희 무녀들의 임무는 선택받은 존재를 이곳으로 안내하는 안내인 같은 거거든요. 임무를 마치면 저희는 숙명에서 벗어날 수 있답니다.”
그렇다는 건 군트람 무녀의 명맥은 이것으로 끝이라는 뜻인가?
“괜히 미안해지네요.”
“아뇨. 전혀요. 오히려 감사드리죠. 저 이후로 더 이상 이 산에 속박당할 사람은 생기지 않을 테니까. 군트람의 무녀는 이 산을 떠날 수 없거든요.”
“그런가요. 그건 또 다행이네요. 그럼 안쪽으로 들어가 보죠. 같이 가실래요?”
“그게 제 마지막 임무니까요.”
요한은 횃불대신 검지 끝에 뇌전의 마나를 아주 조금씩 방출했다. 그게 횃불보다 훨씬 더 밝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일까? 두 사람은 통로부터 그려진 벽화를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이건…….”
“벽화가 보기보다 훨씬 끔찍하네요. 왜 이런 걸 그렸을까요?”
벽화를 둘러보던 라니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곳에는 전부 죽고 죽이고, 고통을 주고 고통을 받는 그림들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고통을 받는 대부분의 존재들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고통을 주는 대 부분의 존재는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것과 비슷한 벽화를 다른 곳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어디서요?”
“해저 신전요.”
“해저 신전? 혹시 바다 밑에 이곳과 비슷한 신전이 존재한다는 말씀이세요?”
“그곳 사람들도 이곳에 대해 설명해 주면 똑같이 반응하지 않을까요?”
“아, 그렇겠네요. 그럼 그곳도 이런 그림과 비슷한 벽화가 있었나요?”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의 주인은 그 신전이 신마시대에 세워진 거라더군요.”
“그렇다면 이곳도……?”
“아마 그렇겠죠?”
요한은 입구에서부터 그려진 벽화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입구에서부터 인간들을 죽이고 고통을 주던 존재는 등에 날개가 달린 천사 같은 종족이었다. 그러다 중반쯤 되자 전신을 새까맣게 칠한 검은 존재들이 이 세계에 등장했다.
등에 날개가 달린 천사들과 검은 존재는 전쟁을 시작했고 그들의 발아래에서 인간과 아인종들은 죽음과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곳이 신전의 끝인가 봐요.”
“그런 모양이네요.”
요한은 신전의 끝이자 가장 거대한 홀의 벽면에 그려진 마지막 그림을 올려다보았다.
세상은 이미 불지옥이 되어 있었다.
그 지옥 위에서……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번개를 양손에 쥔 존재와 검은 무언가에 휩싸인 존재가 자신들을 따르는 수많은 무리와 함께 마지막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지막 전쟁…….’
두근!
“크윽……!”
“알파 경! 괜찮으세요?”
“으으윽……! 오지 마요!”
파지직, 파직!
요한은 자신을 걱정하며 다가오려던 라니아를 멈춰 세웠다. 그의 몸에서는 끌어 올린 적도 없는 뇌전의 마나가 솟구치며 방전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은 요한의 의지가 아니었다.
‘뇌전의 마나가…… 그림에 반응한다고? 이런 젠장…….’
요한의 머릿속을 덮쳐 오는 수많은 기억들.
그 역시 요한의 기억이 아니었다. 뇌전의 마나가 가지고 있는 태고의 기억…….
바로 그림과 관련된 신마시대의 기억이었던 것이다.
인간과 차원이 다른 능력을 보유한 그들은 인간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거나 다스리지 않았다. 그저 괴롭히고, 핍박하고, 가지고 놀며 즐거워할 뿐이었다.
-인간은 하등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다. 떠올려라! 놈들을 가지고 놀면서 느꼈던 그 쾌락을……! 네놈이 원하기만 하면 모든 인간들을 네 발 아래에 무릎 꿇릴 수 있다. 마음에 안 드는 놈들은 죽이고, 원하는 년들은 모두 취할 수 있다! 이 세상의 쾌락과 환희가 전부 네 손아귀에 담겨 있단 말이다! 하하하하하!
“시끄러우니까 좀 닥쳐!”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요한은 겨우 날뛰던 뇌전의 마나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죄송해요. 방금 전에 머릿속에 쓸데없는 말이 들려서. 무녀님께 한 말이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아, 네……. 지금은 좀 괜찮으세요?”
요한은 머리를 가볍게 털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습니다.”
“죄송해요. 제가 괜히 신전에 와 달라고 해서…….”
“아뇨. 잘하셨어요. 덕분에 저도 몰랐던 제 자신에 대해서 많이 알 수 있었거든요. 비록 쓰레기 같은 기억들이긴 했지만.”
“기억요?”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옛 신들에게 인간은 고작 장난감이나 가축에 지나지 않았나 봐요. 그것도 다른 세계의 강대한 존재가 침입하는 바람에 서로 싸우다 잠시 휴전한 거고요. 이 군트람 신전은 그중 옛 신의 대장이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장소인 모양입니다.”
“그럼 저 예언이 언젠가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말씀인가요?”
“예언?”
요한은 라니아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거대한 벽화의 상단 우측에는 무언가 글이 써져 있었는데 요한은 그 글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나노, 혹시 해석 가능해?’
[신마시대의 문자라 해석에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해석을 시작할까요?]
‘그래, 부탁…… 잠깐!’
요한의 시선이 번개처럼 라니아에게 향했다.
“무녀님은 이게 예언이라는 걸 어떻게 아셨죠?”
“그야 읽었으니까요.”
“이 문자를 배운 적이 있으신가요?”
“아뇨. 그냥 보는 순간 이해가 되던데요? 그러면 안 되는 거였나요, 혹시?”
라니아가 불안해하며 묻자 요한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잘하셨습니다. 그런데 뭐라고 쓰여 있던가요?”
“사나운 빛과 탐욕스러운 어둠이 다시 부딪치는 그날, 시간의 무덤 속에 잠들어 있던 태고의 전쟁이 깨어나리라. 이렇게 적혀 있는데 마치 예언 같아서요.”
“같은 게 아니라 예언 맞네요. 사나운 빛이 아바타를 말하는 거라면 탐욕스러운 어둠은…….”
‘암흑의 마나의 주인…… 헥토르를 뜻하는 건가? 뭐야, 그럼 나와 헥토르가 싸우면 저 중간계를 불바다로 만들었던 태고의 전쟁이 다시 시작되는 거라고?’
물론 헥토르가 아닐 가능성도 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요한은 모든 일이 끝나고 난 후, 녀석이 찾아왔을 때 죽을 때까지 도망쳐 다닐 자신이 있었다.
아니, 설령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녀석과 싸우는 일은 절대로 피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예언에서 말하는 탐욕스러운 어둠이 헥토르가 맞다고 한다면…….
“무녀님, 만약 반드시 해야 할 일에 대가가 너무나도 크고 무거워서 감당하기 힘들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아요? 그 일을 할 것 같나요?”
“그 해야 할 일이 뭐냐에 따라 다르겠죠. 반드시 해야 할 일이고 하고 싶은 일이라면…… 일단 저질러 보고 그 뒷감당은 가서 생각할 것 같아요. 저라면 말이죠.”
“저랑 생각이 똑같네요.”
‘설령 예언의 어둠이 녀석이라 해도, 어차피 녀석을 막을 수 있는 건 나뿐이다. 헥토르가 세상을 지배하는 일만큼은 절대로 있어선 안 돼.’
* * *
요한이 다시 벨로반으로 돌아왔을 때는 카일도 과업을 완수하고 왕국으로 돌아온 다음이었다.
“국왕 전하 만세! 카일 저하 만세!”
손쉽게 정벌을 마치고 돌아온 카일을 환호하는 백성들의 인파로 거리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하늘에는 휘날리는 꽃가루가 마를 일이 없었다.
왕성의 테라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요한에게 블랑카가 씨익 웃으며 은근히 물었다.
“부럽지 않으세요? 원래 저 자리에서 헹가래를 받아야 할 사람은 저하가 아니라 대공 각하…… 끄아악!”
“그런 주둥아리가 분란을 낳는 거란다. 어디 가서 똑같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그때는 네 혀가 얼마나 가볍길래 그러는지 썰어서 무게를 달아 볼 테니까.”
“저야 뭐 아쉬워서 그러죠……. 아니, 어쩜 그렇게 사람이 욕심이 없으세요?”
“나? 욕심 되게 많은데? 다만 네가 생각하는 그런 욕심이 아닐 뿐이지.”
그렇게 카일이 왕성으로 들어서자 요한을 비롯한 포라드 국왕과 왕실 가족들, 그리고 귀족들이 두팔 벌려 카일을 환대해 주었다.
“다녀왔습니다, 아바마마.”
“어서 오너라, 왕세자야. 그래, 고생이 제법 많았다고 들었다.”
“고생은 수하들이 전부 했죠. 그들이 오랜 전투의 피로를 풀 수 있도록 윤허해 주시길 간청드립니다.”
“이를 말이더냐. 여봐라! 준비한 술과 고기를 마을 전체에 풀거라! 오늘 병사들이 먹고 마시는 술과 고기값은 모두 왕성에서 지불할 것이니 취하지 않은 병사가 있다면 끌고 가 치도곤을 내도록 하라!”
“어명을 받드옵니다!”
뮤탄, 레반돌프, 존타나. 이렇게 삼국을 정벌하고 강화 조약을 맺은 벨로반은 사실상 세 왕국을 식민지로 삼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 사실을 찝찝해하거나 불쌍히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다른 나라를 빼앗을 목적으로 침공했다면 당연히 자신의 나라도 빼앗길 각오를 했을 테니까.
그 덕분에 카일이 세 왕국을 정벌하고 돌아오면서 챙긴 전리품만 하더라도 기존의 왕실 곳간을 가득 채운 것도 부족해 새로 지은 곳간들까지 가득 채워 버렸다.
당연히 벨로반에 이만한 경사는 없었고 경사에 맞는 축제 또한 성대하게 벌어졌다.
“벨로반 왕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카일 저하와 요한 대공 등, 새로운 영웅들의 활약을 위하여!”
“건배!”
해가 지자 이윽고 거리 전체가 축제 분위기로 물들었다.
왕도 전체에 음식을 조리하는 소리와 노래 소리가 가득했고 잔에서 넘친 술방울들이 기분 좋게 허공에 흩날렸다.
당연히 이러한 축제 분위기는 왕성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머 어머, 저 두 분이 함께 계시는 거야?”
“완전 그림이다…….”
“저 사이에 딱 한순간만이라도 껴 봤으면…….”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귀족가의 처자들부터 시녀들까지…….
미혼 여성이라면 요한과 카일이 함께 술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자리를 쳐다보지 않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아니, 비단 여성들뿐만이 아니었다. 출세욕이 조금이라도 있는 젊은 귀족 남성들이나 노련한 중년의 귀족들도 두 사람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삼국의 침공으로부터 왕국의 도움도 없이 나라를 구한 불세출의 영웅과 왕국군을 이끌고 삼국을 정벌하여 돌아온 철혈의 왕세자.
누가 뭐래도 지금 남부 대륙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는 벨로반 왕국에서 태풍의 핵은 바로 저 두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와인 잔을 가볍게 부딪치며 건배를 나누었다.
“고맙네. 대공 덕분에 일을 수월하게 마칠 수 있었어. 대공이 아니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희생을 감내하고도 이만한 성과를 이룰 수 없었을 걸세.”
“아닙니다, 저하. 그저 신하된 자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하기에는 제가 한 일이 좀 대단하긴 하죠. 하하하하!”
피식!
“이제야 대공이 좀 사람처럼 보이는군.”
“그전까지는 사람으로 보지 않으셨던 겁니까?”
“사람이라기보다는 신(神)에 더 가까웠지. 완전무결하고 빈틈이 없는 그런 존재 말일세.”
신이라는 카일의 말에 요한의 표정에선 조금 씁쓸함이 묻어났다.
“신이라…… 글쎄요. 저하께서 말씀하시는 것만큼 그들이 완전무결하고 빈틈없는…… 그런 존재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마치 신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하는군. 뭐, 대공이라면 직접 신을 만나 봤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겠지만 말이야.”
“하하하! 그럴 리가요.”
그때였다.
“이거, 젊은 영웅들끼리 담소를 나누는 와중에 눈치 없이 껴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전하.”
“아바마마? 그리고 넌 또 왜……?”
“처음 뵙겠습니다. 대공 각하. 아바마마의 둘때 공주, 루나리아라고해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카일은 포라드와 함께 찾아온 자신의 여동생, 루나리아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