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그때 다시 고백할게요
물론 이 상황에 가장 당황한 사람은 다름 아닌 요한이었다.
국왕이 혼기가 찬 공주와 함께 이런 공식적인 석상에서 자신을 찾아왔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정도로 요한은 어리숙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런 중요한 이벤트 전에는 당사자와 충분한 협의가 이루어졌어야 하는데 요한은 전혀 이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었다.
“먼저 당황했을 대공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전하는 바일세. 본래는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히 진행하려 했으나 앞으로의 상황이 그리 녹록치만은 않을 것 같아서 피치 못하게 이렇게 소개를 하게 되었군.”
“아닙니다. 전하, 저 역시 왕국에서 미모와 지모를 두루 겸비하신 루나리아 공주님을 이 자리에서 뵙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요한이 루나리아에게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하자 루나리아가 조신하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대공 각하. 아바마마께서는 사실 아무런 잘못도 없으세요. 제가 대공 각하를 하루빨리 만나 뵙고 싶다 어리광을 부린 탓에 아바마마께서 무리를 하신 것이랍니다.”
“이런, 그렇게 무리하지 않으셔도 부르셨다면 언제든지 제가 찾아뵈었을 텐데요.”
“그게 정말인가요?”
루나리아가 눈을 초롱초롱 반짝이며 되묻자 요한은 최대한 실례가 되지 않게 부드러운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고말고요.”
요한이 생각하는 루나리아는 온실속의 화초, 딱 그것이었다.
교양과 지식을 두루 겸비하며 성장했지만 그것은 왕성에서 지내며 책으로 쌓은 경험일 뿐, 그녀는 바깥세상이나 사람들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비단 그게 루나리아나 그렇게 키운 포라드의 책임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이 시대 공주와 귀족 여식들의 대부분은 그렇게 성장해 왔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왕가와 귀족가의 여식으로 태어났다는 건 곧, 정략결혼의 희생양이라는 뜻이었다.
남들보다 편하고 귀하게 자란 만큼, 가문과 가문의 정치를 위해서 원치 않는 상대에게 시집을 가는 것이 그녀들의 숙명인 것이다.
마치 과거의 리리아가 그랬던 것처럼…….
그런 의미에서 루나리아는 요한에게 딱히 관심이 없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관심이 너무 많아 보여서 탈이랄까?
“아바마마, 이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자칫 대공이 부담을 느껴 우리와 거리를 두게 되면 어쩌려고 이러십니까?”
카일은 슬쩍 포라드에게 다가가 그에게 넌지시 속삭였다. 요한과 왕가가 미묘하게 거기를 두게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현재 벨로반 왕가에서 가장 피해야 할 상황이며 원치 않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녀석의 말처럼 이번 일은 루나리아 본인이 내게 부탁한 것이다.”
“루나리아가요?”
“그래, 네 동생을 한 번 믿어 보자꾸나. 철부지 같아 보여도 속은 누구보다 깊은 아이가 아니더냐?”
말을 마친 포라드는 루나리아와 가볍게 담소를 나누고 있던 요한에게 말을 건넸다.
“이거 참, 오래 있고 싶지만 아무래도 기다리는 인사들이 한둘이 아니다 보니 먼저 실례해야겠군. 대공,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게.”
“모쪼록 루나리아를 잘 부탁하네, 대공. 루나리아 너도 대공께 실례되는 언행은 삼가도록.”
“오라버니도 참……. 대공께서 듣고 오해하실 만한 발언은 삼가 주실래요? 누가 들으면 제가 사고만 치는 사고뭉치인줄 알겠어요.”
그렇게 두 사람이 떠나가자 요한은 루나리아에게 작은 제의를 건넸다.
“여기서 얘기를 계속 나누기는 뭣하고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실까요?”
“물론 괜찮아요.”
그녀가 허락하자 요한은 루나리아와 함께 조용히 자리를 옮겼다. 한편, 그 모습을 멀리서 하염없이 바라보는 여인이 있었으니…….
“아가씨.”
“응? 아, 클레번. 불렀어?”
리리아는 자신을 부르는 호위 기사 클레번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뭘 그렇게 넋 놓고 쳐다보고만 있어요? 설마 상대가 루나리아 공주님이라 쫀 거예요?”
“쫄기는 누가 쫄았다고…… 애초에 난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이유로 본 게…….”
“아님 뭘 망설이고 있어요? 이대로 공주님께 대공 각하는 뺏겨도 좋아요? 그런 꼴을 보려고 용기내서 여기까지 찾아온 게 아니잖아요!”
클레번의 질타에 결국 리리아는 입술을 깨물며 눈시울을 붉혔다.
“하, 하지만 이제 와서 내가 무슨 염치로……. 난 그분에게 아무런 힘도 되어 드리지 못했고, 앞으로도 큰 도움은 되지 못할 거야. 하지만 루나리아 공주님은 달라. 분명 공주님과 맺어지는 게 그분에게도 큰 도움이…….”
“잘 들어요, 아가씨. 인생은 한 번이고 기회도 한 번이에요. 거절당하고 평생을 창피해하면서 살지, 거절조차 당하지 못하고 평생을 후회하면서 살지는 온전히 아가씨의 몫이라고요. 아가씨는 어느 쪽을 하고 싶어요? 대공 각하도, 공주님도 접어두고 먼저 아가씨를 생각해 보라고요.”
“…….”
클레번의 설득에 결국 리리아는 어딘가로 드레스를 끌며 달려갔다. 그녀가 향하는 방향은 요한과 루나리아가 조용히 사라졌던 바로 그 방향이었다.
‘하여간 사람 애 먹이는 데는 뭐 있다니까. 힘내요, 아가씨.’
클레번은 홀로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며 마음속으로 리리아를 응원했다.
* * *
시끄러운 축제 분위기 속에서도 왕실 후원은 달빛 아래에서 고즈넉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요한과 루나리아가 도착한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루나리아는 벤치에 앉아 눈을 감은 채 밤바람을 만끽하고 있었고 요한은 자신이 입고 있던 망토를 풀어 그녀의 어깨에 덮어 주었다.
“바람이 찹니다, 공주님.”
“고마워요. 대공께서는 참 친절하시네요. 당연히 어떤 여인에게든 지금처럼 친절하시겠죠?”
“이성들과는 크게 인연이 없는 편이라 잘 모르겠군요.”
“그건 듣던 중 반가운 얘기네요.”
루나리아는 활짝 웃었다. 그녀의 미소는 마치 달빛 아래 피어난 달맞이꽃처럼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본의 아니게 전하와 저하께서 나누시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를 만나고자 했던 건 공주님의 부탁 때문이라고요.”
“맞아요. 아바마마와 오라버니께 처음 대공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땐 솔직히 속으로 무슨 헛소리인가 싶었어요. 하지만 대공을 따르는 수하들과 함께 삼국을 홀로 막아 내셨을 때에는 감탄을 금치 못했죠.”
루나리아는 순순히 인정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다 대공께서 모든 공로를 왕가로 돌리셨을 때, 전 비로소 대공이 정말로 위대한 사람이란 걸 알고 존경하게 되었죠. 힘을 가진 사람이 타인을 찍어 누르고 위로 올라서는 건 쉬워도 자신의 업적을 타인에게 양보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아바마마도, 오라버니도 그 사실에 대해서는 정말로 깊이 감사하고 존경하고 있어요. 진심으로요.”
“그래서 공주님은 스스로 정략결혼의 희생양이 되기로 선택하신 겁니까? 왕권의 강화와 안정을 위해서?”
요한의 다소 차가울 수 있는 질문에 루나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물론 처음에는 그럴 목적으로 아바마마께 부탁드린 게 맞아요. 아바마마와 오라버니는 대공의 진심을 믿는다 해도 모든 왕족들과 귀족들이 대공의 진심을 믿는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대공과 왕가의 끈을 이어 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바로 그 끈이 되는 수밖에 없었죠. 어느 남녀의 사정을 듣기 전까지는요.”
루나리아는 요한을 올려다보며 부럽다는 듯이 미소를 그렸다.
“그 남자는 한때 자신의 약혼녀였던 여인을 위해 오명을 감수하며 그 여인을 지켜 줬다더군요. 심지어 그때까지 한 번 본 적도 없는 약혼녀를 위해서……. 그렇게 약혼이 깨졌음에도 암중으로 그녀를 보살펴 줬다는 얘기에 저는 결심했어요. 누군가의 훈장이나 트로피로 살아가야 하는 인생이라면 적어도 나를 아껴 줄 수 있는 사람의 트로피가 되자고.”
“공주님…….”
“이런 저는 별로인가요, 대공?”
루나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요한에게 다가가 뒤꿈치를 살짝 들어 올리며 눈을 감았다.
곧이어 그녀의 따뜻한 숨결이 요한의 숨결과 맞닿을 정도로 얼굴이 가까워지는 순간…….
“단언컨대 공주님은 누군가의 훈장도, 트로피도 아닙니다. 공주님은 공주님 그 자체로 누구보다 밝게 빛나실 수 있는 분이니까요.”
요한의 나직하지만 강한 그 한마디에 루나리아는 눈을 떴다. 그녀의 눈동자가 요한의 눈동자와 마주치자 요한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공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평가, 세상의 시선은 신경 쓰지 마세요. 공주님이 바라는 길, 원하는 일을 향해서 노력하다 보면 세상이 바라는 공주님이 아닌, 공주님이 바라는 세상이 되어 있을 테니까요.”
“…….”
그녀는 요한의 얼굴을 올려다보다 문득 자신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느끼며 깜짝 놀랐다.
“어머, 내가 갑자기 왜…….”
요한은 그녀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며 회귀 전,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벨로반의 레지스탕스를 이끌며 누구보다 용감하게 싸웠던 리더…….
끝내 처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긴 했으나 단두대에 목을 받치면서도 백성들에게 포기하지 말고 싸우라며 소리치던 그녀의 모습은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 그 자체였다.
“치사해요. 이런 상황에서 그런 얘길 하시면…… 제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루나리아는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요한은 그런 그녀에게 손수건과 함께 따뜻한 위로를 건넸다.
“제가 언제나 공주님의 편에 서 있을게요. 만약 전하나 저하가 그것 때문에 공주님께 잔소리라도 한다면 제게 말씀하세요. 제가 두 분을 혼내 드릴 테니까.”
“그런데 이걸 어쩌죠? 대공께서는 제가 정략결혼의 희생양이 되지 않기를 위해서 그런 말씀을 하셨지만 저는 대공 각하가 더 좋아져 버렸는걸요.”
“하하하, 그건 좀…….”
“알아요. 저도 더 이상 대공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거든요. 게다가 지금은 제가 대공의 마음속에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대공의 말씀처럼 절대로 포기할 생각은 없어요. 제 꿈도, 대공 각하의 옆자리도요.”
요한은 따뜻하게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회장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아니에요. 저 혼자 돌아갈게요. 지금은 조금 혼자 있고 싶어서요. 남성분을 거절한 적은 많아도 거절당한 적은 처음이라 솔직히 조금 부끄럽거든요.”
그렇게 루나리아가 돌아가자 연회장으로 다시 돌아가기 좀 뻘쭘했던 요한은 후원 근처를 돌아다니며 산책하였다.
그런데…….
“아가씨? 아가씨께서 왜 여기에…….”
후원을 산책하던 요한은 문득 자신의 앞에 나타난 리리아를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그러자 리리아가 다소 혼란스러워하며 요한의 질문에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그냥 도련님…… 아니, 대공 각하와 루나리아 공주님이 이곳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정신을 차리니까 여기 서 있었어요. 이상하죠? 전 대공 각하와 얼마 만난 적도 없는데…… 각하의 진짜 모습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어낸 모습만을 좋아했던 가증스러운 여자인데…….”
“리리아 아가씨…….”
“정말 모르겠어요! 그래도 도련님이 공주님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니까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도련님이 공주님을 향해서 웃어 주실 때마다 가슴을 바위가 짓누르는 것처럼 무겁고 힘들었어요. 전 그냥 그게 싫어서…… 그걸 싫어하는 내 모습이 너무 싫어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숙이는 리리아의 모습에 요한은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를 살포시 안아 주었다.
“모든 게 끝나고 우리가 제 자리를 찾으면…… 그때 다시 만나서 얘기해요. 그때는 서로 감추는 거 없이 모든 걸 다 고백할게요. 그러니까 그때까지 무사히 있어 줘요. 부탁이에요.”
“도련님도요…….”
서로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두 사람의 입술이 조용히 포개지는 순간이었다.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