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남부 연합군
연회가 끝나고 삼국의 국왕이 한 자리에 모였다.
정확히는 벨로반, 뮤탄, 레반돌프, 존타나 사국의 왕이 한 자리에 모였지만 한 명과 다른 세 명의 위치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뮤탄, 레반돌프, 존타나의 지도자가 위대하신 벨로반의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그래, 설마 이런 식으로 귀하들을 만나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군. 기분이 어떤가? 아주 개 같지 않은가? 우리 요한 대공과 세자가 아니었다면 나와 내 식솔, 내 국민들이 자네들처럼 바닥을 기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조금 생겨나려던 동정도 차게 식는구먼.”
‘크윽……!’
포라드는 팔걸이에 팔을 세우고는 턱을 괴더니 얼음장보다 차가운 눈빛으로 세 국왕을 내려다보았다.
세 국왕은 포라드의 경멸 어린 조롱에도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처박은 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세 나라의 청소는 끝이 났는가, 대공?”
“예, 전하. 아주 깔끔하게 치워 뒀으니 염려 놓으셔도 됩니다.”
“그렇군. 고생했네. 자네가 이 나라에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요즘에는 자네가 이 나라에 없는 꿈만 꿔도 경기를 일으키며 일어난다네. 하하하하!”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요한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포라드의 치하에 답했다.
그는 가니온을 이용해서 삼국을 좀먹고 있던 그림자들의 수장을 언데드로 만들어 그림자들에 대한 모든 정보를 획득할 수 있었다.
게다가 국왕에게 충성하는 귀족들 역시 귀향을 보내거나 참수하여 삼국 왕들의 사지를 그야말로 전부 잘라 버린 것이다.
포라드는 그렇게 껍질만 남은 왕들을 뒷방으로 보내 버리고 대신 실질적인 통치기구인 총독부를 각 나라에 설치하여 나라를 관리할 인재들을 파견하였다.
한마디로 벨로반 왕국은 뮤탄, 레반돌트, 존타나를 아우르는 거대한 영토를 보유하게 된 것이다.
이는 북부 대륙에 활발하게 정복 전쟁을 벌이고 있는 로한 제국의 뒤를 이어 대륙에서 두 번째로 거대한 나라임과 동시에 남부 대륙 최강국의 탄생을 의미했다.
이에 대해서 남부 대륙 각 왕국의 수뇌들은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벨로반과 식민지 왕국들을 제외한 남부 대륙의 나머지 왕국들 대부분의 왕들이 모여 긴급 회동을 갖은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를 어쩐단 말이오? 벨로반을 치기는커녕 치러 갔던 놈들이 죄다 정복당해 버렸으니…….”
“하여간 병신 같은 새끼들! 2 : 1도 아니고 3 : 1로 침공했으면 눈 감고도 먹었어야지. 병신같이 당하기나 하고 말이야.”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세 나라가 침공을 해도 역으로 정복을 할 정도로 벨로반의 저력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세 나라를 정복하고 덩치고, 군사력도 이전과 차원이 달라진 상태예요. 만약 이놈들이 밀고 들어온다면 혼자서 감당할 나라가 있습니까?”
어떤 왕의 외침에 다른 왕들이 침묵을 고수했다.
솔직히 말해서 누구도 작금의 벨로반을 당해 낼 수 있는 왕국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먼저 도와달라는 말도 쉽게 나오지는 않았던 것이다.
만약 먼저 도와 달라고 했다간 연합군의 비용을 그 나라가 가장 크게 부담할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것도 시간 문제였다.
‘결국 가장 급한 건 발등에 불이 떨어진 국가…… 즉, 최남단인 존타나를 제외한 뮤탄, 레반돌프와 국경을 마주한 왕국들일 수밖에 없지.’
“젠장! 무슨 눈치를 설설 보고 있단 말인가! 이게 지금 남의 일 같은가? 우리가 무너지면 다음은? 자네들은 무사할 수 있을 거라 보는가?”
“그거야…….”
“보고에 따르면 그놈들은 전장에서 언데드 몬스터들까지 사역했다고 하더군. 죽은 자들을 되살려 전장에 이용한 걸세! 그런 놈들이 물불 가릴 것 같나?”
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데이른 왕국의 국왕이 소리치자 대부분의 왕들이 그에게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하기야, 위에서는 로한 제국이 내려오고, 아래에서는 벨로반이 올라오는 와중에 우리끼리 단합하지 않을 도리가 없지.”
“하면 한시적으로 힘을 모으도록 하지. 우리는 지금부터 운명 공동체일세. 동맹국의 몰락은 곧, 자신들의 몰락이라는 걸 명심하도록.”
“그럼 이제 연합국의 의장을 뽑아야 하지 않겠는가?”
“나부터 추천하지. 연합의 의장으로는 브라흐잔 왕국의 라키만 왕을 추천하는 바일세. 동의하는 사람은 거수해 주게나.”
누군가 라키만 왕을 추천하자 다른 왕들의 손이 빠르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사실 이번 회담은 사전에 물밑에서 조율이 다 끝난 회담이었다. 무려 열일곱 개가 넘어가는 왕국들의 연합인데 이토록 진행이 빠른 이유는 이었다.
그것은 각 왕국에 숨어든 그림자들과 왕들의 의견이 우연찮게 하나로 통일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 *
벨로반 왕성 카일 왕세자의 전용 접객실, 그곳에는 객실의 주인인 카일과 요한, 그리고 카일의 여동생인 루나리아도 함께 자리해 의논을 나누고 있었다.
“의견의 통일? 그게 무슨 말인가, 대공.”
카일이 요한에게 묻자…….
“그림자들의 목적은 내부 분란을 통한 국력의 약화, 혹은 장악입니다. 그리고 현재 남부 대륙의 왕들은 우리 벨로반 왕국을 굉장히 적대시하는 분위기죠.”
“우리가 생각 이상으로 거대한 힘을 가졌기 때문인가?”
“하지만 그건 우리 잘못이 아니잖아요?”
루나리아가 억울함을 토로하자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리아 공주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저들에게 중요한 건 과정이 아니라 결과죠. 누구도 강대한 힘을 가진 우리나라가 타국을 침공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을 테니까요. 특히 지금과 같은 시국이라면 더더욱 말이죠.”
“지금과 같은 시국이라면…….”
“로한 제국이 정복 전쟁을 시작하고, 각 나라가 내전을 일으킨 지금과 같은 시국을 말하는 거겠지. 그런 상황에도 우리는 삼국을 발아래에 둔 셈이고. 솔직히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자신들의 왕국을 침략하지 않는다는 게 저들은 더 신빙성이 없는 얘기로 들리겠지.”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않을 거잖아요. 설마 아바마마의 생각은 다르신 건가요?”
루나리아가 우려 섞인 목소리로 묻자 카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바마마 역시 쓸데없는 분란은 원치 않으신다. 오히려 다른 나라가 우리나라의 확장을 보고 스스로 자제하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을 거라고 말씀하시더군.”
“그래서 그림자들이 분란을 조장할 겁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왕국이 약화되면 내란이든 외란이든 상관없는 종자들입니다. 자국의 국력을 소모하면서 로한 제국을 적대하는 우리를 견제 및, 타격을 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겠죠.”
“게다가 하나로 똘똘 뭉친 연합군이 만에 하나라도 우리나라를 점령한다면 그보다 좋을 수가 없을 거고.”
카일의 추론에 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이 힘을 합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연합군을 결성하면 놈들은 반드시 먼저 움직일 겁니다. 위쪽에서 로한 제국이 내려오고 있으니 그들로서도 우리라는 후환을 남겨놓고 싶지 않겠죠.”
그때였다.
“저하! 그리고 대공 각하! 전하께서 긴급하게 두 분을 호출하셨습니다! 서둘러 그랜드 홀로 집결해 주시옵소서.”
포라드의 부름에 카일과 요한은 그랜드 홀로 향했다. 그곳에서 미리 모여 있던 귀족들과 포라드 국왕을 만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전하.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요한의 질문에 포라드가 심각한 얼굴로 대답했다.
“국외에서 활동 중인 첩자들의 최근 보고가 지금 막 도착했네. 대공의 말대로 남부 대륙의 열일곱 왕국들이 연합했다고 하더군.”
웅성웅성…….
설마설마했던 일이 현실이 되자 귀족들은 웅성거리며 두려움과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솔직히 삼국을 방어했다는 것만 해도 기적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삼국을 넘어서 열일곱 개의 국가…… 남부 대륙의 모든 국가들이 자신들의 적이란다.
“남부 대륙의 모든 국가들이 전부 연합에 가담한 건 아닙니다. 단 한 나라…… 라마콘 왕국만큼은 연합에 가입하기를 거부했다고 하니까요.”
“라마콘 왕국이면…… 일전에 대공께서 도움을 주신 엘프의 숲과 맞닿아 있는 나라가 아닙니까?”
“지금은 엘프들과의 교역을 통해서 오히려 엘프들을 노예로 취급했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부를 축적했다고 하더군요.”
“그 나라의 국왕도 대공께 많이 교육을 받았을 테니까요.”
라마콘은 비록 벨로반과 거리가 굉장히 멀리 떨어진 나라이긴 했지만, 이 일이 있기 전부터 엄연한 벨로반의 동맹국으로 사신들도 몇 번 왕래가 있었던 나라다.
당연히 연합국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가입 요청을 거부하고 벨로반과의 동맹을 지킨 라마콘이 고깝게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그때였다.
다급히 그랜드 홀을 찾아온 기사가 포라드에게 경례를 올린 뒤 다급하게 보고했다.
“전하! 연합군이 현재 라마콘 왕국을 침공 중에 있다는 전령의 소식을 받아 왔습니다.”
“뭐, 뭐라고?”
“그게 정말인가?”
기사는 굳은 얼굴로 상황을 설명했다.
“예! 전서구가 연합군이 풀어 놓은 매들 때문에 전부 차단당해 버린 탓에 전령이 직접 말을 타고 달려와 보고한 사실입니다.”
“전령이 오는데 걸린 시간은?”
“일주일 정도입니다.”
“일주일? 하면 라마콘 왕국이 연합군에게 침략당한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는 말인가?”
“그, 그렇습니다…….”
소식을 가져온 사신은 주먹을 불끈 틀어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모든 귀족들과 왕족들의 시선이 요한에게 향했다.
* * *
막 라마콘 왕국의 침략 전쟁이 시작되던 당시.
라마콘의 새로운 국왕 헤블론은 시종의 도움을 받아 갑주를 갖춰 입으며 근위 기사장에게 물었다.
“백성들의 피난은 어떻게 됐나?”
“대부분 엘프의 숲으로 피난을 완료했습니다. 나머지는 왕국을 지키겠다고 자원해서 남은 사내들뿐입니다.”
“그나마 다행이군. 엘프들과의 관계를 개선하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백성들을 사지로 몰아넣었을 테니 말이야.”
헤블론이 안심한 듯 미소까지 띄며 읊조리자 기사장은 다소 딱딱한 얼굴로 국왕에게 물었다.
“전하, 무엄한 질문인 줄은 아오나 한 가지만 여쭙고 싶습니다.”
“하게. 어차피 죽을 마당에 무엄이고 자시고가 어디 있겠나?”
“엘프들과 관계를 개선하지 않았다면…… 벨로반과 수교를 맺지 않았다면…… 연합국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이런 위험을 초래할 필요도 없었던 게 아닌지요?”
“음…… 듣고 보니 맞는 말이군.”
기사장은 자신의 설득이 먹혔다 생각하고 곧장 헤블론을 설득했다.
“그럼 지금이라도 벨로반과의 수교를 끊고 연합국의 가입 권유를 받아들이심이 좋을 듯싶습니다.”
“그렇군. 그러면 자네나 나나 지금의 위치를 유지하면서 목숨도 지킬 수 있겠어.”
“하오시면 지금 당장 전령을 보내도록…….”
“하지만 그러면 예전으로 돌아가 버리는 게 아닌가? 우리 왕국의 ‘은인’이 찾아와 이 썩어 빠진 나라를 고쳐 주기 이전으로 말일세.”
“전하…….”
헤블론은 단호한 얼굴로 대답을 이어 나갔다.
“나는 인간도, 엘프도 함께 웃고 떠들 수 있는 지금의 라마콘을 지키고 싶네. 이제는 엘프들도 내 백성들이자 자식들이야. 다시 형제들끼리 싸우고, 죽이고, 원망하는 세상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전하! 엘라임에서 엘프 원군들이 도착하였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를 형제로 생각하는 건 우리뿐만이 아니었던 듯싶으니 말이야.”
다급히 찾아온 병사의 보고에 헤블론의 얼굴에는 미소가 피었다.
“기사장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아직도 인간 백성들만이 우리가 지켜야 할 백성이라 생각하나?”
“저는 언제나 전하의 의지를 따르며 전하의 명령을 지킬 뿐입니다.”
“그것 참 든든하구먼. 자, 우리도 나가세. 왕이 앞장서서 싸운다면 병사들도 그만큼 힘을 내서 싸울 게 아닌가.”
그렇게 헤블론은 근위 기사장과 함께 왕실근위병들을 이끌고 전선으로 향했다.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