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낙뢰가 떨어지다
라센성을 눈앞에 둔 이번 라마콘 왕국 정벌군의 총사령관 뷜러는 책사 쟝으로부터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눈앞의 저 성만 먹으면 이 지긋지긋한 술래잡기도 끝이 난단 말이지? 이유는?”
“제가 추측한 바로 헤블론은 시간을 벌기 위해서 이런 짓을 꾸민 게 아닐까 싶습니다.”
쟝의 대답에 다른 지휘관들은 황당하다는 듯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시간을 벌어? 원군을 기다린다는 말입니까?”
“그건 말이 안 되죠. 라마콘에서 띄운 전서구들은 저희 쪽에서 다 잡지 않았습니까? 설령 운 좋게 살아남아서 벨로반에 도착했다 치더라고 거기서 원군을 구성해 여기까지 쫓아오려면 얼마나 걸리는 줄 아십니까?”
“맨몸의 전령이 말을 타고도 일주일 정도. 당연히 군대를 편성해서 온다면 아무리 빨라도 한 달 이상은 걸리겠죠.”
“아니면 벨로반 이외에 라마콘을 도와줄 다른 나라가 존재한단 얘깁니까?”
지휘관들의 의문에 쟝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말한 시간 벌이는 원군이 아니라 백성들의 피난을 얘기하는 겁니다.”
“백성들의…… 피난?”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 시간을 벌었다는 말입니까?”
솔직히 이들의 입장에서 백성들을 피난시키기 위해 시간을 번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반대로 왕을 지키기 위해 백성들을 희생시키는 거라면 모를까.
“이해하기 어렵군요. 병력에 도움이 되는 청장년들이라면 모를까, 피난을 도와 봤자 할 줄 아는 거라곤 식량만 축내는 것뿐인 노인, 아이, 부녀자들까지 피난을 돕다뇨?”
“이래서는 되레 장기 농성도 고려하기 힘들 텐데요?”
“하지만 그것 말고는 답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난 일주일동안 라마콘의 서부 4성을 점령했지만 영지에 남아 있는 백성들의 숫자는 생각보다 적었지요. 게다가 오는 도중에 피난민들을 구경하지도 못했고요.”
쟝의 의견에 뷜러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래서, 라센성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이유가 무엇인가? 자네 말대로라면 불리해질 경우, 또 다음 성으로 도망치면 될 게 아닌가?”
“제가 계산해 봤는데 피난민 수용에 한계를 고려하면 라센성이 마지막 보루입니다. 만약 이 상황에서 기존의 피난민들과 라센 영지의 사람들까지 모두 다음 영지로 피난한다면 영지의 사정이 버티지 못하고 내부부터 무너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애초에 거기까지 모두 피난이 가능하다는 전제하에 얘기입니다만.”
당연한 얘기지만 군집은 커질수록 행동이 느려진다.
지금 출발한다고 해도 라센성을 함락하고 진군하면 다음 영지에 피난민이 도착할 때까지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는 것이다.
“그나마도 이 정도로 피난이 깔끔하게 성공한 건 헤블론 왕이 처음부터 라센성을 최후의 보루라 생각하고 백성들의 피난을 지시했기 때문이겠죠.”
쟝의 대답에 뷜러는 고개를 주억였다.
“정말로 백성을 자식처럼 생각하는 왕이로군. 태평성대에는 좋은 성군이 되겠지만 난세에는 그보다 멍청한 암군이 또 없을 게야. 눈앞의 백성들을 신경 쓰다 결국 전쟁에서 버틸 기회도, 백성들을 지킬 기회도 결과적으로 모두 버린 셈이니 말이야.”
“각하.”
“전군 출전이다. 책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긋지긋한 술래잡기도 이걸로 끝이다.”
뷜러의 명령이 떨어지자 연합군은 빠르게 전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빨리빨리 움직여!”
“라센성에 이 나라의 인간들이 모두 모여 있다더라! 저기만 치면 재물도, 여자도 우리가 원하는 만큼 가질 수 있다고!”
“크하하하하! 벌써부터 가랑이가 근질근질하구먼!”
지금까지의 연전연승으로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전투를 준비하는 병사들의 움직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전군 출전이다!”
쿵쿵쿵쿵쿵쿵…….
출전을 알리는 깃발이 펄럭이고, 연합군의 군홧발이 지축을 뒤흔들었다. 그 소리는 당연히 라센성을 지키는 병사들의 귀에도 흘러 들어갔다.
그것은 병사들에게 끝없는 공포를 불러 일으켰고 병사들은 그것을 물러설 곳 없는 결의로 애써 삼켜냈다.
“여기서 놈들을 막아 내지 못하면 모든 게 끝장이다!”
“죽어도 지켜 내!”
“올 테면 와 봐라, 이 개자식들아!”
“궁수대 발사 준비!”
끼리릭, 끼릭!
“발사!”
슝슝슝슝슝슝슝슝슝……!
수많은 화살들이 허공으로 쏘아지자 연합군의 병사들은 비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멍청한 새끼들, 벌써부터 화살을 쏘기 시작한 건가?”
“겁에 질려서 판단을 잘못한 거겠지. 지금 쏴 봐야 여기까지 닿을 리가…….”
“어……?”
푹!
“닿을 리가…… 없어야 하는데?”
푹푹푹푹푹푹푹!
자신들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화살비에 연합군 병사들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무리 라센성 방향에서 순풍이 풀고 있다고 해도 성과 이곳까지의 거리는 무려 700미터가 넘었다. 그 거리를 뛰어넘어 화살 비를 뿌린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젠장!”
“서둘러! 화살의 위력이 장난이 아니다!”
“일반 방패는 뚫려 버린다고! 그냥 뛰는 수밖에 없어!”
어떤 병사의 절규처럼 화살의 사정거리도 사정거리거니와 그 위력이 워낙 뛰어난 탓에 화살이 방패를 뚫고 피해를 입히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나마 두껍고 거대한 타워 실드는 효과적으로 화살을 막을 수 있었지만 문제는 타워 실드가 너무 무거운 탓에 속도를 내기가 힘들다는 것이었다.
“확실히 효과가 있습니다. 전하!”
“엘프 궁병대가 선전해 주고 있습니다!”
“좋다! 이대로 계속 놈들을 밀어붙여라!”
“예, 전하!”
헤블론은 병사들의 사기를 위해서 애써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전황이 심각하게 불리한 상황임을 모르지 않았다.
확실히 엘프들의 강력한 강궁은 무시 못 할 무기임이 틀림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많아도 너무 많은 적들의 숫자였다.
엘프들의 화살에 당해 쓰러지는 병사들의 숫자도 많았지만 해일처럼 다가오는 병사들의 숫자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인 것은 사실이었다.
게다가 동료들이 당하자 연합군의 오기가 치밀어 오른 것도 크게 한몫한 듯 보였다.
“성문 앞에 나온 병사들은 없습니다!”
“수성에 전력을 쏟아붓기로 한 모양이군. 하기야, 이만한 성이라면 믿고 의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적군 기사들조차 인정할 정도로 라센성은 다른 성보다 성벽이 높고 두꺼웠으며 성문도 통짜 철문이라 어지간한 공성추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쪽은 여전히 70만이라는 대군을 보유한 군세였으니까. 아무리 높고 단단한 성이라도 숫자 앞에 장사는 없는 법이다.
“사다리를 연결해라!”
“공성차를 끌고 와! 빨리!”
수없이 많은 사다리가 연결되어 성벽 위에 걸리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려는 병사들과, 그걸 저지하는 병사들의 숨 막히는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거나 먹어라!”
치이익!
“크아악!”
“사다리를 끊어라!”
병사들은 끓는 물과 기름을 붓고, 바위를 떨어트려 사다리를 기어 올라가는 적들을 필사적으로 막아 냈다.
게다가 병사들만 필사적으로 전쟁을 치르는 것이 아니었다.
“기름 다 끓었어요! 얼른 가져가요!”
“또 바위 나를 거 어디 있어요?”
성문 아래에서는 부녀자들이 열심히 가마솥에 물과 기름을 끓였고 아이들은 힘을 모아 바위들을 병사들과 투석기의 근처로 옮겨 쌓았다.
“부상당한 병사들은 안쪽으로 옮겨요!”
“여기 약초랑 붕대 좀 더 가져다주세요!”
심지어 루비리드가 위생병 및, 엘프 부녀자들과 함께 부상병들을 전담해서 돕고 있었다.
엘프들이 라마콘 왕국의 병사들을 돌본다는……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역시 이 성이 함락되면 자신들도 끝장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헤블론 왕이 다스리는 이 나라를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컸다.
헤블론이 즉위한 이후로 라마콘 왕국은 정말 많은 것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공성추다!”
“두나스 장로님! 공성추를 옮기는 놈들만 저격할 수 있겠습니까?”
“식은 스프 먹기보다 쉬운 일이지.”
엘프 전사들을 이끄는 두나스는 시위를 당겨 공성추를 옮기는 병사들을 향해 화살을 조준했다.
엘프들이 작정하고 노리고 쏜다면 이 거리에서 화살들이 빗나가는 일은 일단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자, 잠깐!”
공성추를 밀고 있는 사람들을 확인한 기사단장이 크게 소리쳐 두나스를 비롯한 엘프들을 말렸다. 두나스 역시 기사단장이 왜 자신들을 말렸는지 직감했다.
간단한 방어구조차 없이 헐벗은 몸에 다리에 찬 쇠구슬까지…….
온몸에 고문으로 인한 부상을 입고 비참한 몰골로 공성추를 밀고 있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라마콘 왕국의 백성들이었던 것이다.
“크하하하하! 쏠 수 있으면 쏴 보라고! 공성추를 옮길 노예들이야 얼마든지 차고 넘치니까!”
연합군의 한 지휘관이 망설이는 그들을 발견하고는 앙천대소하며 그들을 조롱했다.
“이런 비열한 작자들이……!”
“비열? 전장에 비열이란 말도 존재했나? 이 지옥에서는 강자만이 정의다! 승리만이 모든 것이란 말이다!”
그때였다.
“그것 참 우연이네. 나도 그렇게 생각하거든.”
그렇게 큰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앙천대소한 지휘관의 고막에 확실히 때려 박혔다.
그리고 그게 그가 살면서 듣게 된 마지막 목소리가 되었다.
콰앙!
하늘에서 엄청난 기세로 떨어져 내린 그것은 문자 그대로 벼락이었다. 벼락이 떨어져 내린 곳은 이죽이던 지휘관의 머리 위…….
즉, 녀석은 타고 있던 말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아, 죽어 버렸네. 의외로 마음이 잘 맞는 녀석이라 생각했는데. 좀 아쉽군.”
요한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갑작스러운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 그런지 근처에 있던 병사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을 향해 집중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 참, 멍청하게 쳐다보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파지직, 파직!
“크아아악!”
“으아악!”
그 순간, 요한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뇌전의 마나가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갔다.
뇌전에 감전당한 병사들은 온 몸에서 연기를 뿜으며 사시나무처럼 떨다가 순식간에 숨을 거두었다. 주변이 온통 적군들뿐이니 굳이 뇌전의 마나를 통제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당연히 그 광경을 지켜보던 연합군의 병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뇌, 뇌전의 마나?”
“아바타다! 아바타가 나타났다!”
요한의 출현에 병사들이 기겁했다. 아바타의 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대체 어떻게 놈이 여기에…….”
“방금 하늘을 날아서 온 것처럼 보이지 않았냐?”
“말이 되는 소릴 해라. 어떻게 인간이 하늘을 날아?”
요한이 하늘을 날아온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누구도 그 사실을 믿지 못했다. 이는 요한에 대한 정보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이 출현했을 때에 대한 대비도 전혀 되지 않았다. 지금 당황하는 병사들의 반응이 바로 그 증거였다.
“그럼 어디 한번 제대로 놀아 볼까?”
요한의 입꼬리에 잔혹한 미소가 걸렸다.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