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구원
“젠장! 기름이 부족합니다!”
“바위도 거의 다 떨어졌습니다!”
“기름이 부족하면 옷가지라도 불 질러서 뿌려! 바위가 없으면 시체라도 던지란 말이다!”
“성벽 18구역으로 적병 침입 중!”
“당장 막아!”
라마콘의 귀족 러셀은 악다구니를 지르며 적병이 침입하고 있다는 18구역으로 전력을 다해서 뛰어갔다.
그러나 한 번 사다리가 걸리기 시작하자 마치 금이 간 둑처럼 걷잡을 수 없이 전황은 악화되기 시작했다.
“놈들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막으라고!”
촤악! 서걱!
러셀은 빠르게 적병을 베어 남기면서도 시선은 사다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저 사다리를 끊지 않는 이상, 몰려드는 적병을 막을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딜 보고 있냐! 놈!”
“이런……!”
까앙!
그러다 보니 덩치 큰 적 기사의 공격을 바로 대응하지 못하고 빈틈을 보이고 말았다.
다행히 간신히 쳐내긴 했지만 무리해서 검을 놓치지 않으려다 보니 몸이 비틀리고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보아하니 네놈이 이 성벽 위의 책임자로구나! 네놈의 목을 따서 성벽 가장 높은 곳에 걸어 주마!”
“크윽……!”
덩치 큰 기사는 비열한 웃음을 머금은 채 그대로 전투 도끼를 눌러 러셀을 압박했다. 그걸 본 부하들이 러셀을 구하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소용없었다.
사다리를 타고 꾸역꾸역 밀려드는 적군들이 그들을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크하하하! 쓸데없는 반항을 하는구나. 이제 그만 편해지거라.”
“끄으윽!”
결국 아무리 힘을 줘도 점점 모가지에 가까워지는 도끼날을 보고 결국 러셀은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정녕 이 나라는 여기서 끝이란 말인가! 신이시여…… 제발 라마콘을 굽어 살피소서!’
러셀은 속으로 신에게 기도를 드렸다. 자신은 이 자리에서 운명을 다하더라도 라마콘의 운명만큼은 조금 더 지켜달라고…….
그의 소원을 신이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전장에 떨어진 한 줄기의 낙뢰가 그의 기도에 응답하였다.
무오오오오!
“뭐, 뭐야 저건? 검은 미노타우로스?”
“갑자기 저런 게 어디서 튀어나온 거냐고!”
“지금 그게 중요해? 놈을 막아!”
성벽 위에 돌연 모습을 드러낸 검은 미노타우로스…… 블랙을 보고 연합군과 라마콘 왕국군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블랙이 두른 흉갑을 확인한 라마콘 왕국군의 표정은 크게 밝아졌다. 흉갑에는 동맹국인 벨로반 왕국을 의미하는 심볼이 뚜렷하게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블랙은 한껏 포효한 뒤에 연합군의 병사들만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크아악!”
“미, 미친! 평범한 미노타우로스가 아니야!”
연합군은 달려드는 블랙을 상대로 어떻게든 사다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달려들었지만 부질없었다.
후웅! 콰작!
가볍게 주먹을 휘두르기만 해도 수 명의 병사들이 한꺼번에 피떡이 되어 나뒹구는가 하면…….
콰아아앙!
아다만티움 몽둥이를 휘둘렀을 땐 그 충격파로 십수 명의 명사들이 허공을 날아 다시 성벽 아래로 떨어지는 경우도 빈번했다.
“검은 미노타우로스는 우리 편이다!”
“미노타우로스를 따라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는 라마콘 왕국의 지휘관들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사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지금 이 절망적인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라마콘 왕국은 블랙을 따라 다시 일어서며 그의 뒤를 쫓았다.
“어어……?”
“으아아악!”
블랙이 길을 트면 병사들은 빠르게 달려가 필사적으로 사다리를 끊었고, 그렇게 사다리가 끊어지면 사다리를 올라오던 수십 명의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아래로 떨어졌다.
“이게 어떻게 된……!”
다 된 빵에 재를 뿌려도 유분수지. 러셀의 목숨을 빼앗기 직전이었던 기사는 갑자기 반전된 전황을 보고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순간.
턱. 훙!
“허억……!”
어느새 그에게 접근한 블랙이 그의 어깨를 그러쥐더니 그대로 당겨서 기사를 날려 버렸다.
몸무게와 전신 판금 갑옷, 무기와 장비류를 다 합쳐 200kg이 넘는 거구의 기사가 하늘을 훨훨 날아 성벽 아래로 떨어지는 모습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괜찮은가.”
“마, 말도 할 줄 안다고? 아니…… 아시오?”
“더 싸울 수 있다면 자리를 부탁하지. 나는 마스터의 명령대로 이 성벽 위를 사수해야 하니까.”
“맡겨만 주시오!”
“15구역이 뚫렸다!”
그렇게 대꾸한 블랙은 돌파당한 성벽을 찾아 라마콘 왕국군을 돕기 시작했다.
* * *
한편, 성벽 아래에서도 전황은 빠르게 변화를 거듭하고 있었다. 물론 그 중심에는 다름 아닌 요한이 있었다.
슉슉슉슉슉슉슉슉슉……!
엄청난 속도로 비행하는 오리하르콘 무구들이 병사들과 공성병기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썰어 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감히 요한에게 접근하고자 하는 병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미, 밀지 마!”
“그럼 어쩌라고? 저대로 보고만 있으란 말이야?”
“그렇게 자신 있으면 네가 앞장서든가!”
조금만 무구들의 비행 영역 안으로 들어가도 순식간에 몸뚱이가 조각이 나는데 감히 그 안으로 파고들어 요한을 상대할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에이, 비켜라! 이 쓸모없는 놈들!”
결국 한 오러 엑스퍼트의 기사가 전신의 오러를 전력으로 끌어 올리며 용감하게 몸을 던졌다.
오러를 이용한 신체 강화와 검에 핀 엑스퍼트 오러는 능히 초인의 영역을 자랑했지만…….
촤촤촤촤!
영역에 들어서자마자 육체가 조각나는 건 일반 병사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음…… 이래서는 시간이 좀 오래 걸리겠군. 무엇보다…….”
‘귀찮아.’
요한이 죽인 연합군의 숫자가 벌써 천을 넘어갔지만 남아 있는 병사들의 숫자는 죽인 숫자와 비교가 불가능했다.
요한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때마침 멈춰선 공성차 주변에서 이편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던 라마콘 왕국의 백성들과 눈이 마주쳤다.
인질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따로 인질을 관리하는 기사단과 병사들 뒤로 쇠고랑을 찬 채, 노예처럼 끌려 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요한은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마치 한가롭게 정원을 산책하는 것처럼…….
그의 노림수를 눈치챈 병사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달려들어 그를 저지하기는커녕 오히려 거리를 두고 지켜볼 뿐이었다.
이 정도면 굳이 썬더 호넷을 사용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이는 침공군이기에, 그리고 연합군이기에 고칠 수 없는 단점이기도 했다.
애초에 많은 나라들이 참여한 군대이다 보니 연합군에 대한 소속감이 옅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침공군이기에 여기서 자신이 희생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라를 빼앗기거나 가족들이 죽는 경우도 아니었기 때문에 굳이 희생을 감당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인질들을 관리하고 있는 기사단 앞에 다가간 요한이 한마디로 자신의 요구 사항을 전달했다.
“꺼져.”
“그게 무슨……!”
“안 꺼져?”
당치도 않은 요한의 요구 조건에 기사가 반발하려 하자 요한의 심기가 살짝 거슬린 모양이었다.
그가 눈썹을 살짝 치켜뜨는 순간, 잠잠했던 무구들이 다시 웅웅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크윽! 철수한다!”
그렇게 소리친 기사단장이 말 머리를 돌려 돌아가려 하자 단원들이 그를 말렸다.
“단장님, 하지만……!”
“하지만이고 자시고! 저 괴물 새끼를 우리끼리 어떻게 상대하란 말이야? 네가 할래?”
“그건 아니지만…….”
“잠깐.”
그 순간, 요한의 나직한 한마디가 기사단장을 불러 세웠다. 그는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요한을 쳐다보았다.
“서, 설마 나 말인가?”
“아무리 내 명령이 아니꼬워도 사람 얼굴에 침 뱉고 가는 건 좀 그렇지. 안 그래?”
“내가 무슨 침을……?”
어쩌면 철수하자고 외쳤을 때 침방울이 튄 것으로 꼬투리를 잡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기사단장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아니, 됐다. 미안하게…….”
그 정도야 충분히 사과하면 넘어갈 수…….
서걱!
“시종일관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일세. 그래도 혼자 가기는 뭣하니까 부하들도 같이 보내 줄게.”
“자, 잠깐!”
“살려 주세요!”
그러나 자비는 없었다. 오리하르콘 무구들이 다시 비행을 시작하자 죽은 단장의 뒤를 이어서 단원들까지 끔찍하게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쳐도 피할 수 없는 죽음에 그 광경을 지켜보던 다른 병사들은 더욱 더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고작 침 몇 방울 튄 걸로 표정 하나 안 바꾸고 기사단원 수십 명을 그 자리에서 몰살시키는 인간이라니…….
‘미친놈도 이런 미친놈이 없잖아?’
‘젠장, 기사단 하나를 눈 깜짝할 사이에 전멸시킬 수 있는 미친놈이라니……!’
‘이건 재앙이야!’
요한을 지켜보던 연합군 모두의 생각이었다.
한편, 요한은 불안에 떠는 인질들을 향해 소리쳤다.
“라마콘 왕국의 백성들은 나를 따르라! 뭐, 여기서 죽고 싶은 거면 그냥 있어도 되고.”
그렇게 외친 요한이 앞장서 성문으로 걸어가자 인질들도 서로의 눈치를 살피더니 빠르게 요한의 뒤를 따랐다.
요한의 정체는 알 수 없었으나 정황상 자신들의 적이라기보다는 연합군의 적이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수많은 인질들을 데리고 성문으로 다가가는데도 그 누구도 요한의 앞을 막거나 인질들을 건드리지 못했다.
기사단을 참살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연합군에게 더욱 큰 공포를 심어주어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그 결과, 마치 홍해의 기적처럼 연합군이 갈라지며 요한은 간단하게 성문 앞에 설 수 있었다.
“저기! 문 좀 열어 줄래?”
“당장 문을 열어라! 어서!”
그그그그극……!
러셀의 명령이 떨어지자 두꺼운 성문이 좌우로 열리면서 요한과 인질들에게 길을 터주었다.
“밀지 말고 차례를 지켜요! 다 들어올 수 있으니까 다치지 않게 질서 좀 지킵시다!”
그렇게 요한이 인질들을 모두 들여보내고 마지막으로 자신도 들어가려던 차에 뒤를 돌아보더니 아직도 멍하니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수많은 연합군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차, 맞다. 이 녀석들이 남아 있었지. 가니온.”
가니온을 호출하자 리치킹의 목걸이에서 소환된 가니온이 요한의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부르셨습니까, 로드.
“나 대신 이 녀석들 좀 정리해 놔. 알았지?”
-로드의 말씀대로…….
그그그그극…….
그렇게 요한마저 들어서자 붉은 안광을 텅텅 빈 해골 안구 속에서 불태우는 가니온만이 전장에 남아 연합군을 훑어 볼 뿐이었다.
“뭐, 뭐야 저건?”
“해골? 어떻게 해골이 살아 움직이는 거지?”
“그러고 보니 들은 적이 있어. 벨로반은 저주받은 언데드 몬스터들을 사역한다고…….”
“그럼 저게 설마?”
연합군의 병사들과 기사들 중에는 언데드 몬스터를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연히 그 위험에 대해서도…….
물론 가니온은 그 언데드 몬스터들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축에 속했지만 말이다.
-[소환 : 언데드 군단]
가니온은 자신이 부활시킨 언데드 군단의 일부를 이 자리에 소환시켰다. 그 중에는 데스 나이트로 거듭난 베니스와 이실로데도 포함되어 있었다.
-모조리 쓸어버려라.
크어어어어어!
가니온의 명령이 떨어진 순간, 성벽 위에서 지켜보던 병사들의 눈에 지옥도가 펼쳐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언데드 군단이 살아 있는 연합군을 뜯어 먹고, 죽은 연합군의 시체가 차례대로 폭발하며 뼈와 이빨 조각, 오염된 피 등이 주변에 있던 인간들을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상황이 역전되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후퇴하라!”
“서둘러 후퇴하라!”
방금 전까지 라센성의 점령을 눈앞에 두고 있던 연합군이, 이제는 후퇴에 전심전력을 쏟아붓고 있었던 것이다.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