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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126화 (126/150)

126. 쌓여만 가는 은혜

와아아아아아아!

“이겼다! 연합군 놈들이 후퇴한다!”

“사, 살았다! 살았다고……!”

후퇴하는 연합군을 보며 성벽 위의 병사들이 소리를 지르자 이 소식은 금세 라센성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갔다.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기쁨의 환호성을 내질렀고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서로를 끌어안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아직 전쟁이 끝난 게 아니다! 방심하지 마라!”

“시신들은 잘 수습해서 따로 보관하고 부상병들은 서둘러 의무대로 옮기도록!”

지휘관들은 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울고 있는 병사들을 크게 나무라진 않았지만 서둘러 다음 전투를 준비했다.

이것으로 연합군이 포기하고 물러날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병사들도, 뒷수습을 지휘하는 지휘관들도, 실려 가는 부상병들도 모두 한 가지 공통된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

도대체 자신들을 도와준 은인은 누구인가?

그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요한은 현재 기사들의 안내를 받아 헤블론 왕을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

그렇게 헤블론을 대면하자 요한은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전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귀공이 우리 왕국을 절망에서 구원한 은인이구려. 그런데 귀공은 과인을 아시오?”

“확실히 이 모습보단 이 모습이 더 익숙하시겠죠?”

“아……!”

요한은 품속에서 가면을 꺼내 살짝 얼굴을 가렸다. 그 모습에 작은 탄성을 내지른 헤블론이 크게 웃었다.

“뇌전의 마나를 썼다길래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알파 경이었구려. 이 나라를 한 번도 아니라 두 번씩이나 구해 주다니…… 도대체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짐작조차 되지 않소.”

헤블론의 대답에 요한은 가면을 다시 품속에 갈무리하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전하께서는 잘해 주고 계십니다. 저와의 약속을 잘 지켜 주시고 계시잖습니까. 저는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거야 군주로서 당연히 해야 할 덕목이고, 알파 경, 그대에게 개인적으로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소. 아참, 가면을 벗었으니 더 이상 가명으로 부르는 건 실례겠구려, 요한 크림포드 대공.”

“편한 대로 불러 주시면 됩니다, 전하.”

“그럴 수는 없지. 이제는 악명보다 명성이 더 자자한 구르칸 산맥의 주인이자 남부 최강국으로 우뚝 솟은 벨로반 왕국의 대공이 아니오? 입지로만 봐도 과인보다 높았으면 높았지 결코 낮지 않은데 함부로 대할 수는 없지.”

요한이 다시 만난 헤블론은 여전했다.

“아직도 생각이 변하지 않으신 겁니까?”

“무엇이 말이오?”

“백성들이 ‘흙’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물론이오.”

요한은 헤블론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당시 방계 왕족 중에서 라마콘의 새로운 왕 후보를 고르던 요한은 그들에 왕과 백성의 관계에 대해 물었다.

거기서 헤블론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라를 나무로 비유하자면 왕은 과실이요, 귀족은 뿌리이며, 백성들은 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뿌리는 흙에서 적당한 양분을 흡수해 나무에 공급해야 하고 나무는 열매를 맺어 그 과실을 흙으로 돌려줘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흙이 기운을 얻고 나무가 더 잘 자라 더 좋은 과실을 맺어 더 좋은 기운을 흙으로 돌려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과실은 주기만 하고 얻는 것이 없을 텐데?

-그렇기 때문에 왕은 위대한 것입니다. 제가 만약 보위에 오를 수 있다면 저는 이 나라에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위대한 왕이 될 것입니다.

요한은 그날, 헤블론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지금 와서 보니 그때 저의 판단은 정답이었던 것 같습니다. 전하.”

“말씀은 감사하지만 아직 멀었소. 지금도 보시오, 백성들에게 고통만 안겨 주는 왕이 무슨 위대한 왕이란 말이오.”

“제가 볼 때 지금까지 전하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만약 전하의 입장에서 더 많은 백성들을 구하고자 했다면 전하와 같은 판단을 내렸겠죠. 모두를 구할 수 있는 건 신밖에 없으니까요.”

“내게는 대공이 그런 것처럼 말이구려. 하하하하!”

헤블론의 대꾸에 요한은 어색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 * *

재회를 마친 요한은 헤블론과 함께 라센성의 식량 창고로 향했다. 식량 창고를 두 사람에게 보여 준 라센성의 영주, 빌 라센 후작은 미안함을 금치 못했다.

“송구합니다. 전하……. 소신의 능력이 부족한 탓에 벌써 식량이…….”

“그게 어떻게 자네 탓인가, 오히려 지금까지 버텨준 것만 해도 기적에 가까운 것을. 고생했네.”

헤블론의 말처럼 나라 안에서 여분의 식량을 긁어모았다고 해도 이곳에는 무려 네 개 성의 영지민들이 모여 있는 것이다.

게다가 20만이 넘는 병사들까지……. 오히려 식량을 아껴 가며 여기까지 버텨 준 빌이 칭찬받아야 마땅할 터였다.

그때, 요한이 텅 빈 창고 안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식량이 문제라면 당분간은 걱정 없을 겁니다.”

“네? 그게 무슨…….”

그 순간, 제로스의 망토가 개방되면서 그 안에 보관 중이던 엄청난 양의 식량이 무지막지하게 쏟아져 나왔다.

요한은 금세 텅텅 비어 있던 식량 창고 열 동을 순식간에 식량으로 채워 버렸다.

“지금처럼 식량 창고 열 동 정도는 앞으로 스무 번은 더 채울 수 있으니까 이 정도면 당분간은 문제없겠죠, 빌 경?”

“무, 문제가 없다마다요! 감사합니다. 대공! 정말로 감사합니다!”

빌이 몇 번이고 거듭 고개 숙여 고마움을 전했지만 헤블론은 걱정이 먼저 앞섰다.

“아니 대공께서는 도대체 이 많은 식량을 어디에서…… 혹시 우리를 돕기 위해 벨로반이 무리를 한 것은 아닙니까?”

“그건 아닙니다, 전하. 사실 이 식량은 벨로반 침공 전쟁 때 오가며 주운 것들이랑 여윳돈으로 틈틈이 사서 비축해 놨던 것들이라…….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참, 아공간 창고에서는 식량이 썩지도 않으니 유통 기한은 안심하셔도 좋고요.”

“오가며 주웠다라…… 정말로 대공은 볼 때마다 사람 놀라게 하는 재주가 많으십니다.”

“그런 소리도 자주 듣죠.”

두 사람이 이동한 곳은 의무대였다. 이곳 역시 전투가 끝난 이후에도 쉬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곳이었다.

“대장로님! 병상이 부족합니다! 어떡하죠?”

“기존 중상자들 중에 체크해서 부상이 조금이라도 더 회복된 환자들 순서대로 병상을 옮기도록 해요.”

“약초와 붕대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약초는 지금 숲에서 최선을 다해 조달하는 중이에요. 당장은 약효가 덜하더라도 두 번 우려서 사용하고 붕대도 깨끗하게 빨아서 재사용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힘들지만 모두 조금만 더 노력해 줘요.”

“네! 대장로님.”

이곳의 수장은 놀랍게도 루비리드였는데 그녀는 직접 이곳까지 찾아와서 부상당한 병사들과 아픈 피난민들을 돌보고 있었다.

심지어 얼마나 바쁜지 그들은 요한과 국왕이 직접 행차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치료에 전념하는 중이었다.

“제가 직접 가서 알리겠습니다.”

“아니, 놔두게.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방해할 수는 없지 않은가.”

헤블론이 자신의 행차를 알리려는 기사단장의 행동을 만류하자 곁에 있던 요한이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그럼 방법은 간단하네요.”

대답한 요한이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화악!

요한의 손바닥 위에서 나타난 티아라의 형상이 푸른빛을 뿌리더니 의무대 전체를 빛으로 휘감았다.

그 빛은 눈부시다기보다 영롱한 느낌에 더 가까웠는데 어느새 의무대 전체에 물방울들이 보글보글 생기기 시작했다.

‘무, 물방울? 이게 어디서…….’

물방울은 부상당한 병사들의 상처나 피난민들의 환부에 이끌리듯 날아가더니 부딪치자마자 펑 터지며 사라졌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비눗방울이 터질 때마다 부딪힌 상처와 환부가 빠르게 호전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요한이 빛을 거둬들이자 더 이상 의무대에서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휘우…….”

‘역시 광역 치유 마법은 마나 소모가 차원이 달라. 무슨 밑 빠진 항아리에 물 붓는 줄 알았네.’

“전하? 알파 경?”

“고생이 많소, 대장로.”

“오랜만이에요, 대장로 님.”

환자들이 어느 정도 차도를 보이고 한숨 돌릴 기회를 얻자 비로소 루비리드는 요한과 헤블론을 확인하고 반갑게 맞이할 수 있었다.

요한은 자신이 챙겨 온 어마어마한 양의 신선한 약재와 깨끗한 붕대를 기부하고는 헤블론, 루비리드와 함께 따로 자리를 가졌다.

“설마 요한 경께서 직접 라마콘을 돕기 위해 찾아오실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저야말로 대장로님께서 대공의 정체를 알고 있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소. 역시 하이 엘프로구려.”

“죄송해요, 전하. 속일 생각은 아니었는데…….”

“아니오. 필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 생각하니까. 그리고 지금은 그 이유가 어느 정도 짐작이 되고 말이오. 대공께 묻겠소. 혹시 지난번에 대공께서 이 나라의 귀족들을 갈아엎을 때 사형시켰던 자들 모두 그림자라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이오?”

헤블론이 진중하게 묻자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들 모두가 이 나라에 숨어 있던 로한 제국의 그림자…… 트리스탄 제국의 후예들이죠.”

“역시나…… 경이 아니었다면 우리도 저들 연합군과 똑같은 길을 걸을 뻔했구려. 이거 참, 빚을 갚기도 모자랄 판국에 은혜만 쌓이고 있으니…….”

“그건 저희도 마찬가지랍니다. 전하, 듣기로는 엘븐 글로리아에도 다녀오셨다면서요? 데메테리안 님은 만나 보셨나요?”

“네, 많은 얘기를 나눴죠. 도움도 많이 받았고요. 덕분에 든든한 원군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연합군이구려. 아무리 대공이 대단하다 해도 상대는 70만에 달하는 대군이니……. 과연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아니면 우리가 버티는 사이에 벨로반이 치고 올라올 계획이오?”

헤블론의 질문에 요한은 앞에 놓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전하.”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게 무슨 뜻이오? 어떤 얘기가 맞고 어떤 얘기가 틀렸다는 것이오?”

“먼저 제가 이곳에서 버티고 있는 동안 벨로반이 움직일 계획은 맞습니다. 그들이 분에 넘치는 전력으로 라마콘을 침공한 이유도 자신들에게 협력하지 않고 우리 왕국의 편을 고집한 보복성 침공이니까요. 라마콘을 무너트린 이후엔 반드시 우리 왕국을 침공했을 겁니다. 실제로 그 징조도 여기저기서 많이 포착되었죠. 아예 감출 생각이 없더군요, 놈들은.”

요한의 대답에 헤블론은 황당스러워하며 되물었다.

“그럼 틀렸다는 얘기가 설마…….”

“버틸 생각은 없습니다. 놈들을 이곳에 묶어 두는 거죠. 본보기를 보여 주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녀석들이 70만이라는 대군을 이곳으로 보낸 이유는 그만큼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70만의 군세는 연합군 입장에서도 상당히 부담스러운 병력이니까요.”

“붙잡아 둘 수 있는 것이오? 70만 대군을?”

혼자서 70명도 아니고…… 70만 대군을 묶어 놓겠단 소리를 너무나도 태연하게 대답하는 요한의 모습에 헤블론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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