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뒤집어진 전황
그날 밤.
-일어나라, 망자의 군대여……!
해가 지고 달이 뜨며 양기가 저물고 음기가 차오르기 시작하자 잠잠하던 죽음의 마나가 힘을 얻고 날뛰기 시작했다.
가니온은 날뛰는 죽음의 마나를 모두 흡수하여 망자의 군대를 불러 일으켰다.
크르르르르…….
그의 강제적인 부름에 응답한 망자들은 결국 영면에서 깨어나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저, 저길 봐!”
“정말로 죽은 자들이 되살아나고 있잖아?”
“저게 되살아난 것처럼 보이냐? 그저 죽지 못해서 움직이는 거지…….”
성벽 위에서 그 모습을 관찰하던 병사들 중에 누군가 언데드에 대한 가장 비슷한 정답을 내놓았다.
그들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것이 아니다. 그저 죽음을 허락받지 못했을 뿐. 이 차이는 매우 컸다.
누군가는 사지 중 한 부위가 잘려 나간 채로, 누군가는 찢어진 뱃가죽에서 내장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울부짖었다.
그들의 눈에는 살아 있는 인간의 총기가 아닌, 썩은 생선 같은 혼탁함만이 감돌뿐이었다.
“이들이 대공께서 말씀하신 전력이오?”
“그렇습니다, 전하.”
헤블론 역시 성벽 위에서 요한, 루비리드와 함께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헤블론은 죽음의 군세를 내려다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그가 느끼는 거북함은 하이 엘프인 루비리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죄송해요! 저 먼저 내려갈게요.”
결국 언데드 군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죽음의 마나를 참지 못한 루비리드가 구역질을 하며 성벽에서 내려갔다.
“아무래도 하이 엘프 대장로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광경이었던 것 같소, 대공.”
“이해합니다. 만약 저들이 제 군대가 아니었다면 가장 먼저 저들에게 화살을 겨둔 사람은 누가 뭐래도 대장로였을 테니까요.”
“과인 역시 대장로만큼은 아니지만 저들에게 느끼는 거북함이 상당하오. 아니, 살아 있는 생명체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느끼겠지. 과연 저들을 이용해 연합군을 치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일이겠소?”
“그거 아십니까? 전하, 전쟁이야말로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불합리하다는 것을요. 과거 엘프들이 엘프라는 이유만으로 라마콘의 핍박을 받았듯, 그리고 지금 라마콘이 라마콘의 백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약탈과 죽임을 당하듯, 전쟁은 불합리의 결정체 같은 것입니다.”
요한은 저 멀리 진을 치고 있는 연합군의 진영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 불합리를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전쟁을 끝내는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그 속에서 적어도 내 사람들이 다치지 않는 길을 선택할 생각입니다. 설령 그것 때문에 제가 악마로 불린다 하더라도요.”
“……미안하오. 대공, 내가 너무 어리광을 부렸구려.”
“각자 맞는 역할이 있는 것이겠지요. 전하께서는 이 나라 백성들의 희망이 되십시오. 저들의 절망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절그럭절그럭…….
요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니온을 필두로 언데드 군세가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 숫자만 대략 10만! 그들 모두가 가니온과 그가 소환한 언데드 군세에 당한 이들이었다.
한편 언데드 군단에게 호되게 당한 연합군 진영은 밤이 되자 더욱 긴장한 모습으로 라센성을 감시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언데드 군단의 태동을 감지한 건 성 근처를 배회하며 정찰하던 정찰병들이었다.
“헉! 언데드 군대가 움직인다!”
“서둘러 움직여라! 이 사실을 상부에 보고해야 한다!”
하지만…….
쒜엑…… 퍽!
어디선가 화살들이 날아오는 족족 정찰병들의 머리에 바람구멍을 뚫었다.
“아직은 좀 이르거든. 그러니까 거기 얌전히 있어 달라고.”
요한은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다시 한번 시위를 당겼다.
정찰병들은 누군가 자신들을 저격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서둘러 말을 달렸지만 소용없었다.
가늘고 푸른 빛줄기와 함께 직선으로 뻗어 나간 화살이 목표물을 놓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렇게 모든 정찰병들이 허망하게 쓰러지고, 언데드 군단은 그들의 주검을 넘어 진격을 이어 나갔다.
물론 죽은 정찰병들이 일어나 군단에 합류한 것은 아주 사소한 변화에 속했다.
“응……?”
“무슨 소리 안 들려?”
“무슨 소리? 그러고 보니…….”
라센성 쪽을 감시하고 있던 경비병들은 성 쪽에서 들려오는 기묘한 소리와 울림에 긴장감을 끌어 올렸다.
“이상하다? 이변이 생겼으면 정찰 쪽에서 연락이 오지 않았을 리가…….”
“헉! 저건 뭐야?”
“어, 언데드 군단이다!”
“정찰 새끼들은 대체 뭘 한 거야?”
댕댕댕댕!
경비병들은 미친 듯이 종을 울려 비상사태를 알렸지만 이미 늦었다. 언데드 군단은 이미 코앞까지 접근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크아아아아아!
살아 숨 쉬는 인간들을 발견한 언데드 군단은 증오와 분노를 표출하며 짐승처럼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제 막 저녁을 먹고 휴식을 취하고 있던 연합군 입장에서는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뭐, 뭐야?”
“크아아악!”
달려든 언데드가 목을 물어뜯고, 손톱으로 뱃가죽을 찢어 내장을 꺼내 씹어 삼켰다. 파도처럼 몰려던 놈들로 인해 진영이 지옥도로 변하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웬 소란이냐!”
“가, 각하! 피하셔야 합니다!”
“언데드입니다! 언데드 군단이 습격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소동에 막사에서 나온 뷜러는 병사들의 다급한 보고를 받고 상당한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언데드 군단이 습격해? 그게 무슨…….”
“이럴 때가 아닙니다! 언데드에게 당한 우리 병사들까지 언데드로 부활하여 놈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속히 피하셔야 합니다!”
“이런 황당한 경우가 있나……. 쟝!”
뷜러는 다급하게 쟝을 돌아보며 외쳤다.
“언데드 놈들을 물리칠 방법은?”
“몇 가지가 있긴 하지만 지금 당장 준비된 것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벨로반에서 언데드 군대를 이용하여 존타나를 격퇴했단 정보를 입수하긴 했지만 설마 이곳에서 보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까요.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쟝은 똥 씹은 표정으로 뷜러에게 고개를 숙였고 뷜러는 그의 사과보다 당장의 대책이 더 중요했다.
“턱없이 부족하다는 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현재 연합군의 기사들 중 일부러 미스릴제 무구를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미스릴이라면 언데드 놈들에게 충분한 위력을 볼 수 있습니다.”
“하면 미스릴제 무구를 모두 수거하여 브라인 기사단과 버나게움 기사단에게 전량 지급한다. 그들이 버티는 동안 우리 군은 후방 몽테성까지 퇴각한다!”
하나 이런 상황에서도 뷜러의 판단에 반대하는 지휘관들이 있었다.
“자, 잠깐만요! 각하! 브라인 기사단이라니? 우리 브라인 기사단을 언데드의 먹잇감으로 던져 주자는 말입니까?”
“버나게움 기사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결코 그 명령을 납득할 수 없습니다!”
‘하아, 이 빌어먹을 구더기들…… 평화에 찌들었더니 대가리에 똥만 찬 건가…….’
쟝은 눈을 살짝 감으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 역시 제국에 소속된 그림자들이었지만 그동안의 평화와 권력에 찌든 탓인지 감을 많이 잃은 듯싶었다.
자신들의 권력과 이번 전쟁에서 공로를 인정받기 위해 왕국 최강의 기사단을 데려온 것이 설마 이런 식으로 이용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것이겠지.
쟝은 눈을 떠 뷜러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러니까 지금, 내 명령에 불복하겠다는 건가?”
“불복이 아니라 더 현명한 방법을 찾아보자는…….”
서걱!
“헉……!”
말대꾸를 하던 브라인 기사단 책임자의 목이 단칼에 잘려 나갔다. 그의 목을 벤 사람은 다름 아닌 뷜러였다.
“전시 상황 중에 명령 불복종은 군법에서도 엄히 다스리는 바. 또 다른 의견이 있는가?”
“어, 없습니다!”
버나게움 기사단의 책임자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고 결국 브라인 기사단과 버나게움 기사단이 미스릴 무기를 지급받은 채 황급히 지원을 나섰다.
촤악! 서걱!
“진짜네? 미스릴 검으로 베니까 놈들이 재생을 못 하잖아?”
“그렇다고 방심하지 마라!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언데드다!”
두 기사단은 미스릴 무기를 가지고 언데드 병사들을 베어 넘겼다. 기사단이 미스릴 무기를 장비하자 상황은 판이하게 달라졌다.
방금 전까지 죽음을 모르는 불사의 군대였다면 지금은 맹목적으로 돌격할 뿐인 짐승들일 뿐이었던 것이다.
“확실히…… 인간을 초월한 완력은 대단하지만 지능은 짐승 이하다! 조급하게 상대하지 말고 신중하게 놈들의 목을 날려라!”
“예! 단장님.”
단원들은 단장의 지시에 따라 언데드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물론 언데드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 승기를 잡았다고는 우스갯소리로도 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남은 병사들이 도망칠 시간은 조금이나마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녀석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서걱!
“커헉!”
“뭐, 뭐야?”
“마스터 오러? 무슨 언데드가 마스터 오러를…….”
죽음의 마나로 이루어진 검붉은 오러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마스터 오러였다. 오러의 주인 베니스는 검을 휘두르며 사정없이 기사단을 찢어발겼다.
“젠장, 무슨 힘이……!”
베니스는 가볍게 검을 휘둘렀을 뿐인데 익스퍼트 오러로 무장된 미스릴 검과 함께 기사의 팔이 종잇장처럼 잘려 나가 버렸다.
“커헉……!”
그런데 팔이 잘려 나간 부위부터 빠르게 썩어 들어가기 시작하더니 금세 죽은피를 토하며 처참한 몰골로 죽어 버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평범한 언데드가 아니다!”
“섣불리 접근하지 마!”
-신중하면 없던 방법이 생기나?
서걱! 촤악!
베니스는 공포에 질린 인간들을 조롱하며 무자비하게 검을 휘둘렀다. 문제는 이 자리에 베니스뿐만 아니라 이실로데도 함께 있다는 것이었다.
-좋군. 아주 좋아. 이런 힘이 있는 줄 알았다면 진즉에 목숨을 바쳤을 텐데 말이야. 몸속에서 끓어오르는 힘을 주체할 수가 없단 말이지.
-누가 아니래. 이건 가니온 경과 로드께 아무리 감사해도 부족하겠어.
-그럼 누가 더 많이 죽이는지 내기 하겠는가, 이실로데?
-좋지.
그렇게 이실로데와 베니스가 기사단에게 쇄도하자 두 사람을 따르는 듀라한 기사단들까지 돌진하며 순식간에 두 기사단을 박살 내 버렸다.
“이건 뭐, 내가 나설 필요도 없겠구먼.”
한편, 하늘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요한은 피식 웃으며 성으로 돌아왔다.
연합군은 몽테성까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는데 그곳에 진형을 구축하고 농성을 하기 시작한 이유는 다름 아닌 언데드 군대 때문이었다.
“놈들이 내륙으로 진출하면 저희는 벨로반과 라마콘, 양쪽에서 협공을 당하는 형국이 됩니다. 절대로 그것만큼은 피해야 합니다.”
쟝은 요한의 생각대로 뷜러에게 간언했고 뷜러 역시 쟝의 의견을 수렴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귀찮은 언데드 군세를 이곳에 묶어둘 수만 있다면 충분히 해 볼 만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거야말로 나와 벨로반을 너무 무시하는 처사긴 하지만 뭐…….’
요한은 농성을 시작한 뷜러 연합군을 확인한 뒤 피식 웃으며 성으로 돌아갔다.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