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연합군의 결단
알에서 태어난 그것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일정한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인간에 가까운 형상으로, 누군가는 한없이 이질적인 형상으로 이 땅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형상은 달라도 그들의 공통점은 한 가지였다.
그것은 끝을 알 수 없는 공포와 분노였다.
“뭐, 뭐지? 왜 이렇게 몸이 떨리지?”
딱딱딱딱……!
그들의 모습을 쳐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제국의 병사들은 턱이 떨려 치아끼리 부딪히고,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도망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었던 건 그들이 용감해서가 아니라 그저 몸이 굳어 움직일 수 없었을 뿐이었다.
그나마 헥토르의 직속 부하들은 마나를 한껏 끌어 올려 공포에 대항하긴 했지만 그들의 이마에서도 식은땀이 비 오듯 흐르기는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저놈들은 뭐길래 처음 보는데도 이토록 두려움에 영혼까지 떨린단 말인가?’
한편, 형상을 갖추고 헥토르 앞에 선 다섯 존재들은 헥토르를 찬찬히 살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뭐야, 그분인 줄 알았더니 아직 반쪽짜리도 되지 못한 쭉정이잖아?”
“그래도 그분의 향기가 진하게 나는 걸 보니 어느 정도 의지의 동화는 이뤄진 모양이군.”
“그게 아니었다면 우리를 소환하는 것도 불가능했을 테니까.”
“그렇다고 우리를 다스릴 수준은 안 될 것 같은데…… 그냥 먹어 버릴까?”
“참아. 지금 여기서 녀석을 먹어치웠다간 다음 그릇을 찾을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다섯 존재들은 마치 품평하듯 헥토르에 대한 의견을 꺼냈다. 그들은 등장 때와 마찬가지로 의견은 제각각이었으나 헥토르를 얕잡아 보는 듯한 말투만큼은 동일했다.
그런데…….
“시끄럽군.”
쿠구궁……!
“……!”
헥토르의 나직한 한마디에 다섯 존재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을 존중한 게 아니라 강제적으로 입이 닫힌 것이다.
“종들이 주인 앞에서 너무 시끄럽게 떠드는군. 오랜만에 바깥 세상에 나와서 기분이 들뜨는 건 이해한다만 이제 슬슬 예의를 갖추는 게 어떻겠는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섯 존재들의 무릎이 굽혀지며 고개를 조아렸다. 무릎이나 고개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존재는 그 나름의 예를 취하며 경외의 자세를 보였다.
당연히 다섯 존재들은 이 상황에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분명 느껴지는 의지는 그분의 것이 아닌데 왜 우리가 놈의 말에 복종하는 거냐고!”
“아무래도 우리가 착각한 모양이군. 이분께서 우리 신의 의지를 각성하지 못한 게 아니다. 우리 신께서 이분의 의지에 동화하신 것이지.”
“어떻게 그런 일이…….”
“우리가 그것까지 헤아려 판단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우리 신의 충실한 종복. 그분께서 말씀하신다면 우린 그저 순종하면 그뿐.”
그렇게 말한 인간 남성체를 꼭 빼닮은 존재가 자신의 의지로 고개를 숙이자 다른 존재들 역시 자신의 의지로 헥토르에게 고개를 숙였다.
“암흑의 종들이 주인님을 뵙습니다.”
“너희는 어둠 속에서 준비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쓸 것이다.”
“주인님의 명을 받듭니다.”
그렇게 다섯 존재는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긴 채 헥토르의 명령을 기다렸다.
* * *
“이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오?”
“다 틀렸습니다. 우리만으로는 절대로 역부족입니다.”
카체스 광야의 대전이 끝난 지 6개월이 지났다.
카체스 광야에서의 패전은 연합군에 큰 타격을 주었고 그것 때문에 연합군은 크게 힘 한번 써 보지 못하고 연전 연퇴 중이었던 것이다.
하나 연합군이 크게 힘을 쓰지 못하는 이유는 몇 가지가 더 있었다.
하나는 평야전뿐만 아니라 공성전도 의미 없게 만드는 공성차와 기랑대의 조합이 있었고 또 다른 하는 군량만 전문적으로 털어 가는 요한의 존재였다.
“또 그놈이 나타났다!”
“젠장, 이번만큼은 반드시 막아 내야 한다!”
이제는 연합의 일이 아닌, 자신들의 일이 된 기사들과 병사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요한에게 덤벼들었지만 소용없었다.
쥐가 죽음을 각오하건 말건 고양이에게는 그저 가소로울 뿐이었으니까.
“이번에도 풍년이네. 고맙다, 자식들아. 잘 쓸게!”
“기다려! 제발 군량만큼은 두고 가라! 차라리 우리 목을 베고 가라고!”
“이번에도 사망자는?”
“……0명입니다.”
적군측 지휘관은 사망자가 0명이라는 소식에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틀어쥐었다.
요한의 능력이라면 군량 창고를 털어 가면서 덤비는 모든 적들을 몰살시키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아니, 적군의 숫자를 한 명이라도 줄이는 게 벨로반 입장에서는 이득으로 이어질 터였다.
하지만 요한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충분히 죽일 수 있는 적들도 일부러 살려 두었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눈에 요한이 그리는 그림이 선명하게 보였다.
요한의 식량 약탈은 갈수록 심해지고 집요해지는 데 반해 아군 병사들의 희생은 거의 없다. 즉, 먹일 식량은 크게 줄어드는데 먹는 입이 줄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그런 상황에서 벨로반 군은 성을 포위한 채 결코 공격하지 않는다. 방어하는 쪽이 해야 할 농성전을 오히려 공격하는 쪽이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전투가 일어나지 않으니 당연히 병사들이 소모될 일도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그나마도 바닥을 보이는 식량을 하루하루 먹어치우는 일밖에 없었다.
결국…….
“더 이상 버티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영주님!”
“이미 버틸 수 있는 한계치입니다. 병사들 중에는 굶어 죽은 동료를 구워 먹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내일 당장 폭동이 일어난다고 해도 무리가 아닙니다. 부디 결단을……!”
“……성을 버리고 후퇴한다.”
영주는 성을 버리고 후퇴하기로 결심했다. 제대로 칼 한 번 휘두르지 못하고, 화살 한 번 쏴 보지 못하고 그대로 성을 버린 채 도주한 것이다.
벨로반 군은 충분히 그들을 추격하여 척살할 능력이 있었지만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그들 역시 군입이 될 테니까요?”
“그렇지. 이제야 뭘 좀 아네.”
물론 그런 이유만으로 병사들을 살려 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도 충분히 이유라고 할 수 있었기에 요한은 부정하지 않았다.
“대공은 진짜 악마이십니다. 세상에 전쟁에서 창칼도 아니고 먹는 걸로 이렇게까지 대승을 거둔 녀석은 대공밖에 없을걸요.”
블랑카가 질렸다는 듯이 요한을 칭찬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가루칸이 고개를 저었다.
“녀석아, 창칼이 아니라 식량이라서 이렇게까지 대승을 거둔 거다. 괜히 전쟁에서 1순위도 군량, 2순위도 군량이라는 줄 아느냐? 전쟁에서는 창칼이 없어도 싸울 수 있지만 먹을 게 없으면 싸울 수 없는 법이란다.”
그러면서 가루칸은 질렸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그만큼 군량 창고나 군량 호송은 진영에서 가장 삼엄하고 철저하게 지키기 때문에 노리기가 거의 불가능한 게 사실이지. 그런 의미에서 적 군량을 마치 제 주머니에서 사탕 꺼내듯 꺼내 가는 이 녀석은 확실히 괴물이라 불릴 만한 거고.”
“그런데 그렇게 모은 식량들은 전부 어쩔 생각이십니까? 지금 아공간 창고 안에 들어 있는 식량들도 장난 아니죠?”
“걱정 마. 다 계획이 있으니까.”
요한은 최근 나노 크리에이터와 합작해 제노스의 망토와 연결되어 있는 아공간 창고의 규모를 수십 배로 확장하는데 성공했다.
사실 아공간 그 자체는 무한의 영역이었다. 때문에 아공간 창고의 크기는 거기서 어느 정도나 컨트롤할 수 있느냐에 따라 창고의 크기가 결정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기존보다 수십 배나 확장한 아공간 창고였지만 그마저도 거의 절반 이상이 식량만으로 가득 찰 정도로 요한이 털어버린 적의 군량은 어마어마했다.
* * *
한편 연합군 측도 수시로 군량을 털리다 보니 결국 연합 회의장에서도 갑론을박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이렇게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처음부터 우리 군량에 독을 푸는 겁니다! 그럼 놈들이 가져가서 우리 군량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제 발등에 도끼를 찍는 격이 아니겠습니까?”
“허, 참나……! 지금 그 말씀이 우리가 군량을 당연히 뺏길 거라는 걸 전제로 한 말씀이라는 걸 알고는 계십니까?”
“아니면요? 그렇게 마땅찮으면 본인께서 군량을 지킬 방법과 계획을 말씀해 주시면 되지 않소? 설마 아무런 방도도 없는데 딴지를 거는 건 아니겠지요?”
독극물 작전을 주장한 의원이 도끼눈을 뜨고 되묻자 반박한 의원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설령 그 계획이 성공하건 실패하건 우리는 지금 이 상황에서 황금보다 아까운 군량은 통째로 버릴 수밖에 없소! 그런 일을 병사들이 납득이나 할 것 같소?”
“그러니 2중 함정을 파야지요! 진짜 우리가 쓸 군량과 함정으로 쓸 군량을 따로 준비하자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군량을 숨긴 적이 없어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오? 군량을 숨기는 족족 놈은 그걸 전부 찾아냈으니 하는…….”
“자 자, 진정들 하시고……. 우리, 이쯤 했으면 의장님의 말씀을 경청해 보는 것이 어떻겠소?”
그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의장에게 향했다. 의원들의 의견이 중구난방이더라도 결국 결정은 연합군 의장, 라키만 왕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라키만은 잠시 고민하더니 전황을 담당하고 있는 의원에게 상황을 물었다.
“라마콘 왕국 정벌군의 상황은 어떻소? 조금이라도 진전이 있소?”
“이쪽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등을 돌리면 뒤쫓아 오는 언데드군에 전멸당하는 상황이라 쉽게 움직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설령 그들의 도움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뾰족한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문제는 식량을 털어 가는 아바타를 막을 수 없다는 게 문제니까요.”
벌써 국가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오러 마스터들이 군량 도둑을 잡으려다가 열 명이 넘게 당했다.
더 이상의 오러 마스터 투입은 부담스러운 데다 죽을 걸 뻔히 알면서 순순히 나설 오러 마스터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구려.”
“역시 독극물을……!”
“제국에 도움을 요청합시다.”
……!
라키만 왕의 결단에 많은 의원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 지금 뭐라고 말씀하셨소, 의장? 제국의 도움을 받자니? 사자를 막자고 용을 불러들이자는 말이오?”
“입장 차이를 생각하자는 말입니다. 벨로반에게 우리는 적대국이오. 놈들이 이 전쟁에서 이기면 우리의 입장은 어떻게 될 것 같소?”
“제국은 다를 거라는 얘깁니까?”
“그걸 가지고 흥정을 해 보는 수밖에 없지. 어차피 귀하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 아니오? 이대로 가다간 결국 전쟁은 로한 제국과 벨로반 왕국의 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가망 없는 전쟁에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라키만은 눈빛에 한층 더 힘을 실었다.
“좀 더 생존 가능성이 높은 쪽에 배팅을 하는 것뿐이오. 내 말이 틀렸소? 아니, 틀렸다고 해도 상관없소. 만약 연합이 내 결정을 무시하겠다면 우리 브라흐잔 왕국은 연합을 탈퇴하여 제국 측에 우리의 사활을 걸 테니까.”
“하아, 이것 참…….”
“나는 의장의 의견에 찬성이오. 이대로 벨로반의 손에 왕실이 멸망당하느니 제국에게 협력하여 최소한의 지위라도 보장받겠소.”
“하면 나도…….”
그렇게 라키만에게 동조하는 왕들의 목소리가 많아지자 라키만은 속으로 비웃음을 금치 못했다.
어쩌면 트리스탄 제국의 그림자가 왕으로 앉아 있는 나라에게 의장국을 맡긴 연합의 올바른 결말일 수도…….
“이러고 있을 줄 알았지.”
그 순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의문의 목소리에 왕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선 죽은 경비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피를 온몸에 잔뜩 묻힌 채 미소와 함께 걸어오는 요한의 모습이 보였다.
“쥐새끼 같은 인간들. 한참 찾아 다녔네.”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