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숲의 악마
요한은 그 즉시 관도와 산길을 포함해서 가장 빠르게 엘븐 글로리아로 갈 수 있는 길을 찾아 따라갔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가지 않아 요한은 산비탈을 바람보다 빠르게 내달리는 릴리안을 목격할 수 있었다.
‘벌써 여기까지…… 어지간히도 마음이 급했나 보군.’
물론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가족들이 위험에 처했다면 자신이라도 저렇게 했을 테니까.
슈욱.
요한은 바람처럼 내달리던 릴리안의 앞에 내려섰다. 그러자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더니 다급한 표정으로 외쳤다.
“말리지 마세요! 제가 가지 않으면 동족들이 위험하다고요!”
요한은 말 대신 아공간 창고에서 활 한 자루를 꺼내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요정들의 보물, 실피드였다.
그리고 요한은 활과 함께 다른 무언가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두 가지의 보물을 손에 쥔 릴리안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가져가세요. 분명 쓸모가 있을 겁니다. 직접적으로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공주님.”
“아뇨, 스승님은 해야 할 일이 있으시잖아요. 스승님밖에 할 수 없는 일이요. 서로 해야 할 일을 반드시 완수하자고요.”
“힘내세요.”
요한은 다시 내달리기 시작하는 릴리안의 뒤를 지켜보며 주먹을 불끈 틀어쥐었다.
‘정신 차려라, 요한.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야.’
요한은 곧장 황성으로 향했다.
요한의 요청에 포라드 황제는 곧장 제후 및 귀족들의 긴급회의를 소집했고 요한은 거기서 군의 출정을 신청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로한 제국의 반응이 빠릅니다. 겨울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가는 자칫 우리 앞마당에서 전쟁을 치를 수도 있습니다.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테고요.”
“하지만 적들도 겨울인데 그렇게까지 무리하지는…….”
“할 겁니다. 제가 파악한 적의 사령관은 승리를 위해서라면 아군의 희생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작자니까요.”
이 자리에서 로한 제국과 헥토르에 대해 요한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다른 의견이 없으면 대공의 신청을 수락하도록 하리다.”
결국 그렇게 예상보다 빠른 벨로반 제국 출전식이 진행되었다.
그렇게 회의가 끝나고 하이든은 무거운 표정으로 요한을 찾아와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래, 릴리안 공주님은 잘 보내 드린 게냐.”
“예, 아버지. 공주님이라면 분명 잘해 내실 겁니다.”
“지금이라도 공주님을 지원하러 가는 건 어떻겠느냐? 너라면 분명 큰 도움이 될 텐데.”
하이든의 걱정에 요한은 고개를 저었다.
“헥토르도 그걸 원해서 엘프의 숲을 노렸을 겁니다. 제가 본진을 비우는 순간, 헥토르가 이곳을 찾아올 테니까요. 공주님도 그걸 알고 혼자 간 거고요.”
“하지만…….”
하이든이라고 그걸 왜 모르겠는가? 아인족 동맹은 요한에게 있어 전력의 보탬 이전에 새로운 미래라고 하였다.
그런 중요한 동맹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잃게 되면 아들의 상심이 얼마나 클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에 걱정한 것이다.
“저는 공주님을 믿습니다. 그녀는 강해요. 그건 제가 보장합니다.”
* * *
엘븐 글로리아의 국경선. 통칭 숲의 요람.
“참 지랄맞게도 높이 쌓아 놨네. 저게 의미가 있는 건가?”
수십 미터 높이의 장성을 내려다보던 여인이 고개를 저었다. 수호 결계도 아니고 그저 벽을 높이 쌓는 건 자신들의 시대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들어라, 하등한 숲의 벌레들아! 내 이름은 데이드라! 위대한 안식을 모시는 종이자 그분의 말씀을 가져온 사자니라! 지금부터 너희들에게 그분의 말씀을 전하겠다.”
데이드라가 출현 할 때부터 멍하니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던 장성 위의 전사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회색빛 피부에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데이드라는 검은 가시덩굴이 알몸을 감싸고 있는 듯한 고혹적인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났다.
하나 그 모든 요소들을 불안과 공포로 뒤덮을 만큼 그녀의 몸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기운은 무척이나 차갑고 불길하였다.
“벌레들이여! 스스로 영원한 안식을 선택하라. 그리하면 찾아올 고통을 피할 수 있으리라. 이것이 내 주인의 말씀이다.”
“쏴라!”
영원한 안식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고 알 생각도 없었지만 적어도 대꾸할 가치가 없다는 것만큼은 엘프 전사들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엘프 전사들은 화살에 마나를 실어 데이드라를 향해 쏘아 날리기 시작했다. 마나를 품은 엘프들의 강궁은 하늘 높이 비행하고 있는 데이드라를 향해서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하지만…….
팅팅팅팅.
데이드라의 주변에는 보이지 않는 보호막이 형성되어 있었고 그 보호막에 막혀 화살들은 조금도 그녀를 해할 수 없었다.
“그럴 줄 알았지. 하여간 숲의 벌레들이 꼭 따끔한 맛을 보기 전까지는 상황 파악이 안 된다니까.”
후우!
데이드라가 손바닥 위에 무언가를 숨결로 불어 날리자 검은 가루들이 빠르게 성벽 위로 흩어져 내렸다.
흩어지는 순간,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가루들이었기에 엘프 전사들이 그것을 인식하고 피하거나 막는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나 그 대가는 참혹했다.
“우욱! 우욱……!”
“커어억!”
“우웨엑……!”
“뭐, 뭐야?”
엘프 전사들의 몸이 조금씩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더니 얼굴의 모든 구멍에서 물이란 물은 전부 쏟아 내기 시작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툭 튀어나온 안구와 콧구멍, 입, 귀를 뚫고 몸 안쪽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온 것은 다름 아닌 검은 덩굴이었다.
덩굴은 자신이 잠식한 숙주를 속박하더니 그대로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양분을 흡수하였다.
그러자 머리 쪽 부분에서 순식간에 봉오리가 개화하더니 다시 한 번 꽃가루를 사방으로 날려 보냈다.
데이드라가 불어서 날려 보냈던 바로 그 꽃가루였다.
“꽃이 피기 전에 봉오리를 잘라 버려라!”
엘프 지휘관들은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소용없었다. 꽃가루의 전파력이 너무 뛰어나서 한 명을 막을 때 세 명이 감염되어 갔기 때문이다.
장성 위는 순식간에 검은 덩굴에 잠식당해 더 이상 서 있는 엘프 전사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뭐야, 고작 이 정도에 전멸한 거야? 예전에도 벌레였지만 지금은 비교도 할 수 없이 약해졌네. 쯧쯧……!”
데이드라는 그 모습을 구경하면서 천천히 숲 안쪽으로 향했다.
댕댕댕댕!
난데없이 나타난 침입자의 소식에 엘븐 글로리아 전체에 비상경보가 울려 퍼졌다.
“침입자의 숫자는?”
“한 명입니다! 하지만 그 한 명에게 요람을 지키던 수비대 전원이 학살당했습니다. 절대로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닙니다!”
“설마 제국 놈들의 소행인가……?”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 듣자 하니 북대륙 대부분의 인간 왕국은 정벌을 끝냈다고 하니까.”
장로들의 표정은 심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도 아니었다. 요한의 당부 덕분에 북대륙의 정벌 시기에 맞춰 전사들의 훈련을 전부 마쳐 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동안의 특훈 덕분에 엘븐 글로리아에도 오러 마스터가 무려 셋이나 탄생하게 되었다. 이는 분명 귀중한 전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먼저 기동성이 좋은 갈색 바람 부대와 칼날잎 부대를 보내서 놈을 최대한 저지하는 게 좋을 것 같소.”
“내 생각도 마찬가지요. 그사이에 서둘러 본진을 재구성하는 수밖에.”
“그렇게 하도록 하세요.”
장로들의 의견이 일치하고 데메테리안의 허가가 떨어지자 갈색 바람 부대와 칼날잎 부대가 선봉으로 빠르게 숲을 가로질렀다.
“적의 위치는?”
“요람을 지난 뒤로 지상으로 내려와 곧장 엘븐 글로리아를 향해 접근중이라고 합니다.”
“굳이 지상으로 내려왔다고?”
갈색 바람 부대의 대장 갈리올은 의구심을 감출 수 없었다.
공중으로 비행해서 접근 할 수 있다면 그게 훨씬 자신에게 유리할 텐데, 굳이 이점을 버리고 지상으로 내려올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래야 너희들이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모습을 좀 더 가까이에서 구경할 수 있잖아. 안 그래?”
“……!”
순간 자신의 귓가에 울려 퍼진 미성에 갈리올은 섬뜩함을 느끼며 반사적으로 거기를 벌렸다.
그에 대장을 따라 순식간에 산개하며 침입자를 포위하는 전사들. 그것만 봐도 이들이 얼마나 유능한 전사들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둘러보는 데이드라의 표정에는 가소로움만 보일 뿐이었다.
“뭐야, 이거? 전부 솜털이 보송보송한 아가들뿐이잖아? 이래가지고 내 발목이나 붙잡을 수 있겠어, 벌레들?”
슉슉슉슉슉슉슉!
그녀가 이죽거리는 사이, 갈리올이 살짝 손을 들어 올리며 주먹을 움켜쥐자 기다렸다는 듯이 전사들의 화살이 데이드라를 노리고 쏘아졌다.
엘드 전사들의 강궁이 고작 30미터도 안 되는 사방에서 쏘아진 것이다. 설령 오러 마스터라 해도 전부 대응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불쑥불쑥!
순식간에 땅에서 자라난 거대한 꽃들이 만개하더니 마치 방패처럼 엘프들의 화살을 막아 냈다. 단숨에 뚫고 날아갈 것 같은 얇은 꽃잎을 어떤 화살도 뚫지 못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퓻퓻퓻퓻퓻퓻.
꽃의 중심에서 발사된 독침이 포위망을 구성하고 있던 전사들에게 그대로 명중하였다.
너무 작고 빨라서 반응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물론 그 대가는 참혹했다.
“크으윽……!”
“커억!”
설령 급소를 피했다 하더라도 독침에 포함된 독은 그들에게 끔찍한 고통과 환각을 선사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숨을 거둔 전사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다시없을 공포에 질린 모습들이었다.
“크윽! 거기 멈춰!”
“너는 제법 끈기가 대단하구나? 물론 그래 봤자 고통이 더 길어질 뿐이지만.”
갈리올은 어떻게든 버티고 서서 그녀에게 다시 활을 겨눴지만 시위를 당길 수는 없었다.
격통도 격통이거니와 환각 때문에 제대로 조준조차 불가능했고 힘은 이미 전부 빠져 버린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털썩…….
결국 갈리올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자리에 쓰러졌다. 데이드라는 갈리올이 죽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다 그가 죽자 기분 좋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럼 어디, 산책을 계속해 볼까?”
데이드라는 콧노래를 부르며 느긋하게 산책을 즐겼다. 헥토르의 명령도 천천히 그들을 몰아붙이며 공포와 고통을 최대한 느끼게 하라는 것이었으니까.
“침입자가 접근 중!”
“모두 전투태세를 갖춰라!”
진형을 새로 구성하고 찾아온 엘프 전사들의 본대는 방금 전 그녀가 겪었던 선발대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야말로 숲 전체가 엘프들로 인해 가득 찬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압박감이었지만…….
“그래, 이 정돈 돼야 괴롭힐 맛이 나지 않겠어?”
오히려 데이드라의 입가에는 조금 열락이 감도는 미소까지 그리며 눈앞의 먹이…… 아니, 장난감들을 환영했다.
“그럼 지금부터 살짝만 제대로 놀아 볼까?”
그녀는 날카로운 검지 손톱 끝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그어 피를 냈다. 칠흑보다 까만 그녀의 피는 이윽고 땅에 떨어져 흡수 되었다.
그 순간…….
사아아아아…….
“무, 무슨…….”
“숲의 공기가…….”
“달라졌다!”
자신들의 터전이자 어머니라 할 수 있는 엘븐 글로리아의 숲이 달라지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당연히 엘프 전사들이었다.
한편 엘븐 글로리아의 세계수 아래에서 전사들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며 기도하고 있던 데메테리안은…….
“안 돼!”
숲에 데이드라의 피가 떨어지는 순간, 식은땀을 비 오듯 흘리며 눈을 부릅떴다. 그것은 숲이 보내는 구원 요청이자 마지막 비명이었다.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