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블랙 & 화이트
무드산 평야를 중심으로 각각 200만의 대군이 대치하고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을 넘어 엄숙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이번 전쟁의 결과에 따라 대륙의 운명이 뒤바뀔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 누구도 쉽사리 승부를 점칠 수 없을 터.
하나 그럼에도 많은 호사가들은 북부 대륙의 우세를 점했다.
“그도 그럴게 로한 제국은 이번 전쟁에 자신들의 숨겨진 전력들까지 모두 투입했잖아? 세상에 무슨 그랜드 오러 마스터가 네 명에 오러 마스터만으로 이뤄진 기사단이라니……. 그만한 전력을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던 로한 제국의 인내심에는 혀를 내두를 판이네.”
“누가 아니라나. 게다가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벨로반 제국 측에서는 명성도 자자한 전력들이 대거 불참했다면서? 듣기로는 남부 대륙 정벌전의 1등 공신들이라던데 대체 무슨 사정으로 이번 전쟁에 불참한 거지?”
“아무튼 중요한 건 이번 전쟁의 승패에 따라 대륙을 일통한 통일 제국의 이름이 달라진다는 걸세.”
사람들은 두 명 이상 모이면 이번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지 않을 만큼 대륙의 모든 눈과 귀는 무드산 평야에 집중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셨습니까, 전하.”
“또 여기 있었나.”
요한은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는 카일을 확인하고는 가볍게 목례를 하였다.
한순간에 일국의 왕세자에서 황태자가 되었는데 카일은 변한 자리에도 부족함 없는 모습을 신하와 백성들에게 보여 주었다.
“여기가 놈들의 동태를 살피기 가장 좋은 자리거든요.”
“아직까지 별다른 움직임은 없고?”
“지금 당장 움직이지는 않을 겁니다. 녀석이 기다리는 건 따로 있을 테니까요.”
“녀석이라면…… 헥토르 황태자를 말하는 건가? 그가 무엇을 기다린다는 거지?”
“절망. 우리에게 줄 절망이라는 선물입니다.”
카일은 요한이 말한 절망이란 이름의 선물이 어떤 것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태연해 보이는 그의 모습이 조금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걸 알면서도 전혀 아무렇지 않은 모양이군. 가끔 보면 대공은 대범한 사람인지 무신경한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니까.”
“믿는다고 해서 걱정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다만 걱정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죠. 그러니까 믿을 사람은 신중하게 선택하고 믿기로 결정했으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몫을, 저는 저의 몫을 다 하면 그뿐이니까요.”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벨로반과 로한, 양측에 사신이 각각 도착하기 시작했다.
“급보입니다! 현재 엘븐 글로리아에서 정체불명의 침입자를 격퇴하고 남하 중! 드월븐 팩토리아에서도 같은 상황이라는 소식입니다!”
“급보입니다! 구르칸 산맥을 침공하던 정체불명의 적들을 가루칸 대족장이 격퇴! 마찬가지로 크림포드 공작가를 기습했던 의문의 침입자도 마자현 경께서 쓰러트리셨다는 보고입니다!”
당연히 로한 제국에서는 이와 반대되는 소식을 접했을 것이다.
낭보를 들은 카일의 입꼬리가 올라갔지만 동시에 걱정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다른 이들은 무사한가?”
“충분히 휴식을 취하면 회복하실 것 같지만 지금 당장 전쟁에 참여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습니다.”
“그런가…….”
카일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들이 무사한 건 기쁜 소식이지만 그들이 전쟁에 불참한다면 아군으로서는 큰 전력의 손실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그걸 노린 것일까?
로한 제국은 곧바로 군을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에 맞춰서 벨로반도 전쟁 준비를 서둘렀다.
“우리만으로 충분할지 걱정일세.”
“상관없습니다. 동료들은 자신들의 몫을 충분히 해 줬으니까요. 이제부터는 제 몫입니다.”
요한은 전령들이 가져온 신기를 다시 착용하며 대답했다.
“또다시 대공에게 큰 짐을 지우는 것 같아서 미안하네. 마지막으로 이번 한 번만 부탁해도 되겠나?”
“그럴 생각입니다. 그럼 무운을 빕니다, 전하.”
“대공 역시 무운을 빌지.”
그렇게 요한과 카일은 훗날을 약속하며 각자의 전장에 섰다.
* * *
이윽고 양쪽의 병사들이 달리기 시작하면서 대륙의 역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본대가 상황을 주시하고 양측의 50만의 병력들이 먼저 달려 나와 충돌했지만 그 숫자만 무려 합해서 100만이 넘어갔다.
와아아아아아아아!
“벨로반의 허수아비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가서 쓸어버려라!”
“트리스탄 제국의 잔당! 로한의 더러운 무리들을 끝장내자!”
쿠구구구구구구구……!
100만에 달하는 병사들이 달려 나가기 시작하자 지축이 흔들리면서 무드산 평야 일대에 지진이 일어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벨로반 왕국의 선두에 선 무리들은 다름 아닌 블랙과 화이트, 그리고 미노타우로스와 웨어 울프의 아인종 군대였다.
그 수는 적지만 일기당천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의 무력은 막강했다. 다만 상대하는 로한 제국의 선봉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드디어 우리의 힘을 세상에 증명할 차례다!”
“더 이상 참지 마라! 너희들의 힘을 벨로반 놈들에게 영혼까지 각인시켜 주는 거다!”
“전원 발검!”
유일하게 말을 타지 않았으면서도 기마대보다 훨씬 빠르게 전장을 질타하는 기사단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황금사자 기사단이었다.
발검한 그들의 검과 창에는 오러 마스터를 상징하는 퍼펙트 오러가 눈부시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황금사자 기사단의 숫자는 무려 스무 명. 그들 전원이 오러 마스터로 구성되어 있던 것이다.
그러한 황금사자 기사단을 이끄는 기사단장이 바로 알렉스였다.
“그래도 좀 근성 있는 녀석들이 있었으면 좋겠구먼. 적어도 재미는 볼 수 있게 말이야. 크하하하!”
기사단의 선두를 빠르게 치고 나가는 알렉스. 그런 알렉스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기사단의 눈빛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건 알렉스가 자신들 중에 가장 강한 기사라는 사실을 모두가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호라, 저 녀석들…….”
그렇게 앞장서 치고 달리던 알렉스의 시야에 마주 달려오던 순백의 웨어 울프와 새까만 미노타우로스가 눈에 들어왔다.
블랙과 화이트의 강함을 한 눈에 알아본 알렉스는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외쳤다.
“저건 내 먹잇감이다. 아무도 건드리지 마라!”
그렇게 엄포를 내린 알렉스는 순식간에 블랙과 화이트에게 달려들며 검을 휘둘렀다. 하나 평범한 검격이라면 블랙과 화이트에게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
쒜엑!
하지만 블랙과 화이트는 알렉스의 검격을 최선을 다해 피해야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알렉스의 검을 휘감고 있는 건 의심할 여지없는 앱솔루트 오러였기 때문이다.
“호오, 이걸 피해? 그럼 이건 어때?”
알렉스의 검격이 빨라지기 시작하자 블랙과 화이트의 움직임도 덩달아 가속하기 시작했다.
분명 블랙과 화이트 또한 오러 마스터급 중에서는 최상위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호문쿨루스였지만 그랜드 오러 마스터의 강함은 그야말로 차원이 달랐다.
쾅쾅쾅쾅!
그래도 날렵하게 알렉스의 공격을 회피하는 화이트와 다르게 블랙은 아다만티움 몽둥이에 퍼펙트 오러를 무장해서 알렉스의 검을 방어했다.
보통 퍼펙트 오러로 무장된 아다만티움 무기 정도 되면 그 위력은 일반적인 퍼펙트 오러를 무참히 박살 낼 수 있을 정도가 되지만…….
‘충격 흡수조차 힘든 건가.’
앱솔루트 오러로 무장된 알렉스의 검은 그런 블랙의 몽둥이를 압도적인 위력으로 밀어붙였다.
검과 몽둥이가 충돌할 때마다 퍼펙트 오러가 크게 흔들리면서 그 충격이 고스란히 블랙에게 축적이 되었던 것이다.
그나마도 아다만티움 몽둥이가 아니었다면 블랙의 무기는 진즉에 부서져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황이 크게 나쁜 것만도 아니었다.
“치잇! 귀찮게 구는구먼!”
알렉스는 자신의 빈틈을 노려서 집요하게 파고드는 화이트가 거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블랙과 다르게 반사 신경과 민첩함이 매우 뛰어나서 어지간한 자신의 공격은 위협 거리도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화이트에게만 신경을 집중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 방의 파괴력이라면 스쳐 맞는 것도 무시 못 할 정도로 블랙의 파괴력이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막말로 제대로 맞는다면 앱솔루트 오러로 방어해도 위험할 수 있다!’
앱솔로트 오러라고 해도 만능은 아니었다. 특히, 상대는 오러 마스터 최상급의 괴물들.
평범한 인간도 오러 마스터 최상급이면 괴물 중의 괴물이라 불리는데 상대는 오러가 없어도 위협적인 괴물들인 것이다.
“인간이 너희 같은 괴물들에게 대항하려고 손에 넣은 힘인데 그걸 네놈들이 쓰면 반칙이지!”
투덜거리는 말투와 다르게 알렉스의 입꼬리는 한껏 더 말려 올라가 있었다. 그와 동시에 흘러넘치는 자신감만큼이나 기세도 크게 상승하였다.
그러자 알렉스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지금까지 블랙과 화이트의 협공에 애를 먹던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였던 것이다.
촤악! 촤촤촤!
화이트는 함부로 빈틈을 파고들었다가 되레 카운터를 당해 큰 부상을 입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물론 마나를 쓰면 자가 재생이 가능했지만 말 그대로 마나를 사용해야 하기에 부담이 없을 수 없었다.
그렇게 화이트의 기습이 신중해지다 보니 블랙이 감당해야 하는 부담이 훨씬 커졌다. 검격의 수는 배로 늘어난 것 같았고 그만큼 블랙의 몸에 생기는 부상들도 훨씬 많아졌다.
만약 두 사람이 인간이었다면 이 승부는 진즉에 결정이 났을 터였다. 그만큼 그랜드 오러 마스터와 오러 마스터 간의 격차는 절망적이었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크르르르륵!
무오오오오오!
“일대일로 대응하지 마라. 상당히 귀찮아진다.”
“진형을 유지해.”
블랙과 화이트 대 알렉스의 전투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해일처럼 밀려들던 양측의 군세가 한 지점에서 충돌하였다.
마치 밀려드는 해일과 해일이 부딪치는 듯한 충격에 선봉에 선 기마대와 철갑부대가 허공으로 비산하며 그 충격의 여파를 여실히 증명해 보였다.
그리고 양측 선봉의 핵심 전력으로 손꼽히는 황금사자 기사단과 호물쿨루스 부대도 당연히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문제는 황금사자 기사단의 대응이었다.
촤촤촤!
3세대 호문쿨루스라면 모를까, 2세대 정도의 호문쿨루스라면 두세 마리가 합심해서 오러 마스터 한 명을 상대하는 건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상대 역시 셋 이상이 조를 짜서 유기적으로 대응한다면? 2세대 호문쿨루스라도 대항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다.
블랙과 화이트도 이 사실을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였다.
황금사자 기사단은 강하다. 그리고 위험하다. 이대로 놔둔다면 필시 호문쿨루스들이 전멸할 것이고 선봉 싸움에서 크게 밀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들을 도우려면 먼저 눈앞의 괴물보다 더 괴물 같은 알렉스를 쓰러트리는 수밖에 없었다.
-방법이 있나, 화이트.
-마스터의 명령을 최우선으로 수행한다면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지.
-…….
블랙은 화이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그들은 텔레파시로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무엇을 꾸미는지 알렉스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부하들만 신경 쓰다간 순식간에 목이 달아날 거다. 괴물들!”
알렉스의 말이 맞았다. 지금도 호쾌하게 소리치며 달려드는 알렉스의 검격은 폭풍을 일으키고 사방을 찢어발겼다.
화이트와 블랙이 전력을 다해도 정면에서 알렉스를 감당하는 건 매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따로 상대할 때의 얘기였다.
-지금이다!
“어딜……!”
촤촤촤촤!
콰아아아앙!
최선의 빈틈을 노려 화이트와 블랙이 동시에 합공을 시도했다.
물론 이 정도로 알렉스에게 큰 피해를 줄 수는 없었지만 녀석의 자세를 무너트리고 시간을 벌기에는 충분한 위력이었다.
그사이 화이트의 몸이 꾸물거리더니 마치 하얀 찰흙처럼 순식간에 블랙의 몸을 휘감았다.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