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마지막 약속
“당최 어디 갔나 했더니 천하의 뇌신(雷神)께서 청승맞게 혼자 낚시질이나 하고 있었냐? 그것도 이런 아무도 없는 호숫가에서?”
어느새 요한의 곁으로 찾아온 가루칸이 그의 옆에 철푸덕 자리를 깔고 앉았다.
“이상한 별명으로 부르지 마라. 그리고 난 혼자 낚시하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냐?”
“내가 그랬냐?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니까 나도 따라 부르는 거지. 그리고 대륙을 구한 영웅 정도 됐으면 그 정도 별명은 있어야 폼이 살 게 아니냐. 크하하하!”
“아, 그러셔요. 투왕(鬪王) 님.”
“으하하하! 싸움의 왕이라니, 나한테 이보다 잘 맞는 별호가 어디 있을까? 안 그러냐?”
빈정댈 생각으로 부른 별명이었는데 가루칸은 되레 흡족한 듯했다. 그 사실에 살짝 삐진 요한이 신경을 끄고 낚시대에 시선을 주었다.
“하루에도 너 찾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네 얼굴 한 번 보려고 대륙을 횡당한 사람도 있다고. 언제까지 그 사람들을 피해 다닐 작정이냐?”
“눈에 안 보이면 언젠가 사람들은 관심을 끄기 마련이다. 세상은 살아 있는 생명과 같아서 사람들의 흥미를 잡아끄는 사건 사고들은 끊이지가 않거든.”
“그래서 릴리안 그 처자도 피하는 거고?”
“…….”
“하아…….”
요한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런 요한을 쳐다보던 가루칸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 친구야. 이제 슬슬 자신을 용서해 주는 게 어떻겠나? 너는 할 만큼 했다. 아니, 차고 넘칠 만큼 열심히 했어. 이제 네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 살아도 된다는 말일세.”
“솔직히 겁이 나서 그래. 내가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확신이 안 들거든.”
“하여간 그런 부분에서 네놈은 너무 오만하단 말이다. 어떻게 너 혼자서 다른 사람의 행복을 책임질 수 있겠느냐? 나야말로 마누라만 열한 명에 자식새끼들만 쉰 명이 넘는다. 그들 모두가 힘을 모아도 행복을 지키기가 어려운데 너 혼자서? 웃기는 소리지.”
가루칸은 근엄한 표정으로 요한에게 경고했다.
“행복은 둘이서 만들어 가는 거다. 하지만 후회는 네놈 혼자서도 충분히 만들 수 있지. 어느 쪽이건 한 번 선택하면 결코 되돌릴 수 없으니 자신 있는 쪽으로 선택해. 네가 하고 싶은 건 뭐냐? 요한.”
“…….”
그저 멍하니 호수를 바라보던 요한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떠나가는 친구의 등 뒤로 가루칸이 소리쳤다.
“릴리안은 로한에 있다. 거기서 로한의 잔당들을 소탕하고 있다더군.”
“……고맙다. 가루칸.”
“고마우면 나중에 술이라도 사든가.”
파지직!
그렇게 요한이 뇌전과 함께 사라지자 가루칸은 요한이 사용하던 낚시대를 들어 올렸다. 거기에는 얼마나 물고 늘어졌는지 진이 빠진 고기 한 마리가 축 늘어져 있었다.
“나 참…… 하여간 그렇게 신경 쓰였으면 후딱 좀 움직이든가. 이 미련한 녀석 같으니…….”
* * *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로한의 잔당이 오늘밤 데샹 마을의 외곽에 있는 폐가에서 집결한다는 소식입니다.”
“틀림없는 정보야?”
“믿을 만한 스파이가 남긴 정보입니다. 틀림없을 겁니다.”
잔당 소탕 조직의 일각을 이끌고 있던 릴리안은 단원들을 훑어보았다. 다들 실력 있는 기사들로 자신을 믿고 따라 주는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좋아. 그럼 오늘밤, 우리도 이곳으로 움직인다. 다들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준비하도록.”
“예. 단장님.”
그날 밤.
릴리안은 단원들과 함께 스파이가 알려 준 장소를 찾아갔다.
스파이의 말처럼 데샹 마을의 외곽에는 버려진 폐가 한 채가 외롭게 세월을 버티고 서 있었지만 사람의 흔적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쾅!
릴리안과 단원들은 망설임 없이 폐가를 급습했다. 그런데…….
“잠깐, 뭔가 이상한데? 인기척이 느껴지질 않아.”
‘포위망을 느끼고 인기척을 줄였다는 수준이 아니야. 여기에는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어. 이건……!’
“어서 피……!”
함정임을 깨닫고 릴리안이 서둘러 소리를 쳤지만 이미 때는 늦어 버렸다.
슉슉슉슉슉슉!
바깥쪽에서 날아온 불화살들이 비처럼 쏟아져 폐가에 박혔다. 집 자체의 나무가 깡말라 있던지라 화기를 받은 폐가는 무섭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젠장, 역시 매복이었나? 이렇게 되면 섣불리 밖으로 나가는 건 위험하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어봤자 무너지는 폐가를 관짝 삼아 이곳에서 죽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불은 둘째 치고 연기 때문에 호흡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곳을 빠져나간 후였다. 바깥에는 틀림없이 매복이 기다리고 있을 터. 연기를 마시고 정신없이 나간 순간, 죽음이 찾아올 터였다.
“아가씨, 여기는 저희가 뚫겠습니다! 저희들의 뒤를 바짝 쫓으십쇼!”
“안 돼! 클레번!”
클레번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망설이지 않았다. 그의 사명은 오로지 단 하나, 릴리안을 지키는 것뿐이었으니까.
그것은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단장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죽음도 불사하고 바깥으로 몸을 날렸다.
한 곳으로 힘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지며 매복한 자들의 시선을 분산시킨 것이다.
“놈들이 나왔다!”
“쳐라!”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로한 제국 부흥의 초석을 여기서 놈들의 피와 시체로 세울 것이다!”
매복하고 있던 반란분자들이 독기를 품고 튀어나와 이들을 공격했다. 그 숫자가 보고되었던 것보다 배는 많았다.
‘우리가 철저하게 속았구나. 이 미련한 년! 몇 번이고 확인을 했어야지 마음만 급해서는…… 내가 이들을 전부 죽인 거야. 내가!’
그렇게 단원들에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사죄하며 죽음을 받아들인 순간.
하늘에서 기적이 떨어져 내렸다.
번쩍! 콰르릉!
“뭐, 뭐야?”
“갑자기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니…….”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서 벼락 한 줄기가 떨어져 내리자 저항군은 조금씩 공포가 마음을 지배하며 몸이 움츠러들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지는 이 황당한 상황에 가장 어울리는 존재가 그들 머릿속에서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다.
“서, 설마…….”
“아, 아닐 거야! 그자가 왜 여기에…….”
그러나 불안은 낙뢰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한 사내를 눈으로 발견한 순간, 순식간에 절망이 되었다.
“뇌, 뇌신이다!”
“벨로반의 괴물이 나타났다!”
“으아아아!”
반란군들은 작전도, 계획도 모두 잊고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쒜에엑! 쒜엑!
이제는 요한의 상징과도 같은 오리하르콘 무구들이 금빛을 번쩍거리며 반란군들을 뒤쫓았다. 녀석들이 무구를 피해서 도망칠 가능성 같은 건 요한의 등장과 함께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대, 대공 각하?”
“괜찮아요? 다친 곳은 없어요?”
요한은 릴리안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불에 살짝 재가 그을린 것 말고는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더, 덕분에요. 그런데 어떻게 이곳에…….”
“제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후회를 감당할 자신이 없으면 노력해 보라고. 이미 사라진 미래를 걱정해서 도망치는 짓은 그만할래요. 이런 상황에서 할 얘기는 아닌지 모르겠지만…….”
요한은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고백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습니다. 이건 진심입니다.”
“아아…….”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고백에 처음에는 혼란스러워하던 릴리안이 이내 요한의 말을 가슴으로 받아들이자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나 참…… 하여간 이렇게 간단한 일을 멀리도 돌아왔다니까. 이 두 사람은.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으면서 보는 사람 마음 조리게 하기는…….’
“자, 다들 뭐합니까. 눈치 없이 계속 남아 있을 생각은 아니죠?”
“아…….”
클레번은 서로를 꼬옥 끌어안고 있는 두 사람을 위해 서둘러 단원들을 데리고 자리를 비켜 주었다.
* * *
벨로반 제국을 중심으로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특히 벨로반 제국이 노예 제도를 전면 폐지하기 시작하면서 다른 왕국들도 울며 겨자 먹기로 노예 제도를 폐지하기 시작했다.
벨로반 제국에게 밉보여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제국 역시 선의만으로 노예 제도를 폐지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노예 제도를 폐지함으로 그동안 억압받고 핍박받던 아인종 노예들이 해방되어 고향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덕분에 벨로반 제국과 아인종들의 관계는 크게 개선되었다.
“약속을 지켜 주셨군요. 대공.”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대장로님.”
그렇게 아인종들과의 교역을 시작함으로써 벨로반 제국은 아인종을 노예로 부렸을 때보다 더 큰 이익을 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전부 벨로반 제국의 치세에 복종하는 건 아니었다.
제국의 눈이 닿기 힘든 오지의 변경 마을에서는 제국의 치세와 상관없이 여전히 노예들이 성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밥버러지 같은 새끼들! 빨리빨리 안 움직여? 오늘도 저녁을 굶고 싶다면 그렇게 굼벵이처럼 움직여라, 이 쓸모없는 새끼들!”
촤악! 촤악!
털썩…….
한 소년이 채찍을 맞고 쓰러져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며칠이나 굶고 학대당한 데다 심한 노동을 강요받은 상태에서 채찍까지 얻어맞자 결국 버티지 못하고 쓰러진 것이다.
“어쭈, 이제 꾀병까지 부린다 이거지? 얼른 안 일어나?”
하지만 노예 감독관은 그런 소년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이 채찍을 들었다. 그러자 뒤 따르던 여인이 다급히 쓰러진 소년을 감싸며 주인에게 사정했다.
“죄, 죄송해요! 오늘 얘, 얘가 몸이 좀 아, 안 좋은가 봐요. 이 아, 아이의 몫까지 제, 제가 더 열심히 하, 할게요. 그, 그러니까 조금만 사정 좀 봐, 봐주세요. 부, 부탁드려요.”
여인은 자신도 힘들 텐데 애써 웃으며 감독관에게 사정을 호소했다. 그러나 긴장과 공포는 감출 수 없었던 탓에 말을 더듬는 것으로 표출되고 말았다.
노예 감독관은 그것이 너무 짜증이 났다. 노예답지 않게 평소 헤실헤실 웃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 답답하게 말까지 더듬으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안 되겠다. 일이고 뭐고 너희 둘은 그냥 죽어라.”
그렇게 노예 감독관이 채찍을 휘두르려는 순간, 여인은 소년을 꼭 끌어안아 끝까지 그 아이를 보호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채찍은 떨어지지 않았다. 이상해서 여인이 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 보니 귀족 차림의 한 남자가 감독관의 팔을 잡고 있는 게 아닌가?
“뭐, 뭐야, 너는?”
“나? 이런 사람.”
파지지직!
요한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뇌전에 감독관이 바싹 익어 쓰러지자 주변에 있던 노예 감독관들도, 노예들도 하던 일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았다.
“헉?”
“뇌, 뇌전의 마나?”
“뇌신이다! 뇌신이 나타났다!”
겁에 질린 노예 감독관들은 채찍도 버리고 부리나케 도망쳤지만 그들은 모두 밖에서 대기 중이던 군사들에게 잡혀 처형장으로 끌려갔다.
한편 요한은 쓰러진 여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며 물었다.
“괜찮아? 다친 곳은 없어? 데이지.”
“어, 어떻게 제 이, 이름을…….”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네가 그때의 나를 살렸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줬다는 거지.”
“네? 그게 무, 무슨…….”
요한은 그녀의 몸에 따뜻한 이불을 덮어 주며 그녀와 소년의 몸을 치유했다.
“너를 구하겠다는 내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게 해 줘서 정말로 고마워.”
“아아…….”
데이지는 요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가 안아 주자 왠지 모르게 밀려오는 포근함과 온기에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잠들었다.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