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신검(9)
-우물우물
조유가 육포 주머니에서 육포 하나를 꺼내 운호에게 내밀었다.
딱딱하게 굳은 짜디짠 육포다. 그리 좋은 맛은 아니지만 그래도 영양을 보충하기 위해서는 먹어줘야한다.
운호가 고개를 저었다.
“소협, 몸이 그 모양인데도 정말 괜찮은 건가? 수련도 좋지만 이런 비상상황에서는 그래도 역시 고기를 먹어야······.”
“저는 괜찮습니다.”
조유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와중에도 그놈의 수련이 뭔지. 사람이 피를 잃어버렸으면 그만큼 영양을 섭취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것은 인간의 한계에 다다른 절정의 고수라고 해도 마찬가지일 터. 실제로 운호의 혈색은 영 좋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먹는 저 단환은 아무리 봐도 그리 양질의 영양을 공급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무슨 사람 안광이······.’
다만 저 안광.
저 형형한 안광은 시간이 갈수록 더 깊어져 간다. 깊은 산골에서 곡기를 끊고 수련에 몰두하는 사람이 저러할까?
하지만 어디 안광만 형형하다고 마인들이 알아서 물러간다던가. 결국 적을 찌르는 것은 날카로운 정신이 아닌 날카로운 검날이다. 그런 검을 쥐고 휘두르는 육체가 부실해서야 이도저도 되지 않는다.
-후우
운호가 깊게 날숨을 내뱉었다.
내상은 거의 다 회복됐다. 다만 부상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체력은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아쉽다면 아쉬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조유의 말처럼 다시 화식을 시작한다고 체력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오랜 시간 그런 종류의 음식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위장이 탈을 일으킬 확률이 훨씬 높다.
“그보다 그 이야기나 조금 더 해주시죠.”
“그 이야기? 아아······. 그거 말이로군.”
두 사람은 걷고 또 걸으며 제법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이야기 속의 조유 본인은 그리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깐깐했고 권위적이었으며 인정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이야기에서 자신을 꾸미지 않았다. 그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그 엄격함을 스스로에게도 적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의 엄격함은 그 자신에게 가장 심하게 적용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 참으로 얼빠져 보였을 거야. 부모님이 중매해줄 때는 그렇게 싫다고 뻗대던 놈이 정작 당사자를 만나자마자 넋이 나가버렸으니 말이야.”
“사랑이라는 것이 본래 그런 법이지요. 합리와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영역 아니겠습니까. 마치 상승의 무공처럼요.”
“허, 여기서 갑자기 상승의 무공이라······. 하긴 그런 곳에서까지 무공을 생각하고 있으니 그토록 젊은 나이에 고수가 된 것이겠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허허, 운이라. 나도 그런 운이 찾아왔으면 좋겠군. 만약 그렇다면······.”
말끝을 흐리는 조유에게 운호가 물었다.
“복수를 하실 생각인가요?”
“복수? 글쎄······. 영매의 마을을 몰살시켰던 작자들은 이미 모조리 거죽이 벗겨져 장대에 걸렸는데 내가 대체 누구에게 복수를 하겠나. 포달랍궁? 아니면 서장의 장족들?”
“장족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런 명령을 내린 건 포달랍궁 아니겠습니까.”
“글쎄. 너무 오랜 시간 생각을 해서 그런가? 사실 이제 난 잘 모르겠군. 명령을 내린 것이 포달랍궁인지. 아니면 오랜 영토의 회복을 바라는 장족의 열망을 포달랍궁에서 들어주고 있는 것인지. 잘못한 것은 이 땅을 빼앗았던 우리의 선조인지. 아니면 천년도 더 된 일로 이를 갈고 있는 장족인지······.”
참으로 답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조유가 특유의 냉막한 표정 그대로 입꼬리를 아주 약간 꿈틀거렸다. 오랜 시간 함께 걸었기 때문일까? 운호는 이제 그것이 조유 나름의 뒤틀린 웃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그 모든 것이 그저 포달랍궁이 워낙에 무서워 만들어낸 나의 변명일지도 모르지.”
운호가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를 이어가려는 찰나.
“소문주.”
“응?”
“전력으로 달리세요.”
이야기를 길게 이어가지 않았다.
조유가 되묻는 말 한마디 없이 운호가 가리킨 방향으로 빠르게 몸을 날렸다. 참으로 정이 없는 것 같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좋다. 괜히 죽지 않아도 될 사람까지 죽을 이유는 없었으니까.
조유가 몸을 날린 방향은 적들이 오는 정 반대 방향. 운호가 거기서 직각으로 움직였다. 조심스럽게 접근하던 마인들의 기운이 폭증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누구도 조유가 떠난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전술적으로 생각해보자면 어리석은. 하지만 그들의 목표가 오직 운호이며, 그들 모두가 경쟁자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당연한 움직임이다.
촌각의 시간.
조유가 충분히 빠져서 몸을 숨겼을까? 글쎄, 알기 힘들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제 곧 적들이 이곳에 도착한다는 점이었다.
굳이 더 달려 힘을 빼지 않았다. 경공은 주특기가 아니다. 한정된 힘을 쥐어짜 싸움에 모두 소비하는 것이 운호에게 더 유리하다.
-후우.
짧은 호흡.
잠깐의 시간 동안 전력으로 달리느라 소비된 기운이 빠르게 차오른다.
근육이 혹사당하고 회복되는 과정을 통해 강해지는 것처럼 경맥도 그런 것일까? 최근의 격전을 거치는 동안 체력은 떨어졌지만, 내부의 기운은 그 양이 커진 것은 아니지만, 움직임 자체가 조금 더 활기차진 것 같은 느낌이다.
-탁!!
마치 땅을 파먹고 사는 여느 농군들을 닮은 평범한 인상의 중년 사내가 운호 앞에 섰다. 그리고 그의 뒤로 흉흉한 마기를 내뿜는 마인들 일곱이 따라 섰다.
“기록이네?”
“기록? 무슨 소리지?”
“지금까지는 다섯이 최대였거든. 헌데 여덟이라니. 오합지졸 같은 마인 놈들도 대가리들이 좀 깨져보니 제정신이 들긴 드나 봐?”
가장 앞에 선 중년 사내가 호탕하게 웃었다.
“큭큭큭, 그래. 네 말이 옳다. 참으로 오합지졸들이지. 하지만 어쩌겠느냐. 그것이 사람의 본성이며 우리는 그것을 긍정하는 것을.”
“본성은 무슨.”
“왜? 너도 꼴에 도사 놈이라고 인간의 본성이 선함을 주장하는 것이냐?”
“멍청한 마인 놈이라 그런지 도교가 무엇인지도 모르는구나. 자연은 선함도 악함도 없다. 그저 본디 그러할 뿐이지. 그저 인간의 이성이 선함과 악함을 가르는 것이거늘. 이성이 아닌 본능만을 쫓으며 그딴 소리를 당당하게 지껄이다니. 참으로 통탄스러운 무지함이로다.”
“감히!! 어린 놈이!!”
“자랑할 것이 나이밖에 없는 자들이 흔히 하는 소리로구나. 심지어 그렇게 말하는 네놈도 거기서는 제일 어려 보이는데 왜? 그렇게까지 연장자를 우대하고 싶거든 지금이라도 뒤로 꺼지지 그러냐?”
-우우웅
파검이 검명을 참는 것조차 잊을 만큼 신을 냈다.
하여간 그가 사람 하나는 제대로 봤다. 운호 이 녀석 얼마 전까지 손녀사위와 좀 어울리더니 입담이 아주 제대로 터졌다.
“후, 혓바닥이 아주 매섭구나.”
“검은 더 매섭지.”
“흥, 과연 그럴지는 지켜봐야 알 일이지. 나는 내열비당의 부당주. 광비검 병조량이다.”
들어본 적은 없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감히 경시할 수 없다. 지금까지 운호에게 덤벼들었던 마인들은 그 경지가 심후하긴 했지만 대부분이 마교 본산에 소속되지 못한 어중이 떠중이들이었다. 같은 수준이라고 해도 마교 본산에 소속된 마인들은 다르다. 하물며 저자는 마교 내부 단체 중 하나인 내열비당의 부당주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별다른 기세를 뿜어내지 않고 있었지만 이전 종염 때와는 다르다. 종염이 마공을 익히지 않은 마교의 인물이었다면 저자는 분명히 마공을 익힌 인물이다. 운호의 감각에도 저 지독하게 거무튀튀한 기운이 명확하게 느껴진다.
저것은 그저 절정에 다다른 무인이 스스로를 감출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의 기세를 조절하는 능력이 경지에 오른 것이다. 수양을 중시하는 정파의 무인도 기세를 저만큼 능숙하게 감추려면 적어도 절정의 경지에는 올라야 한다. 하물며 마공을 익힌 마인이라면?
-지급의 마존이다.
이 년 전.
운호는 이미 한 차례 지급의 마존을 상대한 적이 있었다. 도륜당의 당주인 광혈마가 그 주인공이었다. 당시 그는 검선에게 한쪽 팔이 잘린데다가 광혈마공의 부작용으로 이성까지 완벽하게 상실한 상태였다. 게다가 운호의 곁에는 종화와 남궁철이 함께였었다.
-스르릉
운호가 오른쪽 허리에 달린 보검을 뽑아 들었다.
“화산파 삼대 제자. 백운호. 강호의 동도들에게는 소신검이라고 불리고 있다.”
광비검의 폭발적인 검격이 운호를 덮쳤다.
-쾅!!!
* * *
조유는 운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생각했다.
운호의 의도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지금 상황은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추측은 어렵지 않았다.
지금까지 만났던 상대들 가운데 최악의 상대다.
만약 이길 자신이 있었다면, 그리고 단순히 자신이 도움이 안 되는 수준이었다면 그저 숨으라고 했겠지.
하지만 운호는 그에게 달리라 말했다. 도망치라는 이야기다.
아니, 아니다.
그것은 포기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가 들었던 운호의 과거 이야기에서 운호는 단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그 놀라운 오성으로 가장 확률이 높은 길을 찾아왔다.
그렇다면 이것 역시 그가 생각한 최선의 가능성일 것이다.
지금까지 부지런히 길을 걸어 대장군부까지 남은 것은 백팔십 리 남짓.
먼 길이다.
지치지 않는 전설의 명마가 관도를 달린다고 해도 한 시진 가깝게 걸릴 길이다. 하물며 산길이다. 전력으로 달린다고 해도 네 시진 이상. 지친 몸으로 과연 네 시진 내내 산길을 달릴 수 있을까? 아니, 설사 그가 그렇게 달린다고 해도 운호가 그 긴 시간을 버틸 수 있을까?
조유가 고개를 저었다.
고민하지 말자.
또, 포기하지 말자.
이것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길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해야 할 것은 이 두 다리로 그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높이는 것이다.
조유가 달렸다.
저 먼 곳.
청해성의 안위를 책임지는 대장군부를 향하여.
* * *
-쿠과과과광!!!
패도적인 검격이 운호의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위축되지 않았다. 그저 본래 그럴 것을 예측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부웅
오히려 광비검 자신의 가슴을 위협하는 운호의 검을 피하고자 약간의 무리를 감수했다. 그리 크지 않은 손해였지만 미묘하게 기분이 나쁜 손해였다.
“우리 정말 괜찮겠지?”
“당연하지.”
무엇보다 기분 나쁜 점은 그가 데리고 온 저 늙은 마인들이었다.
길도 안내할 겸, 그리고 만약의 경우도 대비하여 끌고 왔지만, 실로 멍청한 선택이었다. 그는 알아야 했다. 육십평생을 자기 멋대로 살아온 늙은 마인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그리고 그런 놈들만 일곱이 모이면 어떤 상승효과가 만들어지는 지를 말이다.
“오히려 잘된 일이야. 주련노괴 그 늙은이가 괜히 포기했던 게 아니었어. 봐봐, 저 어린놈도 만만치가 않잖아.”
“하긴······.”
“우린 그냥 굿이나 보고, 떡이나 챙기자고. 다들 약속 잊지 말라고.”
“당연하지. 우리끼리 다투는 건 모든 일을 다 끝낸 이후로.”
-하여간, 참으로 마인 놈들다운 짓거리로구나.
그야말로 의도치 않은 일기토.
광비검의 검극이 시커멓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