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화
눈을 뜨니 눈앞에 작은 빛무리가 있었다. 손을 가져다 대자 빛무리가 늘어나더니 무기의 형상을 갖췄다. 빛이 거두어지자 손아귀에 남은 것[아이템을 확인합니다.]
〈링 카람빗〉
등급: E
공격력: 35-30
설명: 손잡이 끝이 링 모양인 카 람빗이다. 찌르기엔 취약하지만 베 는 데 특화되어있다.
찾았다.
카람빗. 그러니까, 곡도다. 동물의 발톱을 본 따서 부드러운 곡선을 가진 이 단도는 그 유려한 자태와 다르게 치명적인 흉기다.
여러 번 다뤄본 적은 없지만 기본
적인 방법은 안다. 이 갈고리 같은 칼날에 육신을 걸고 주욱 체중을 실어 미끄러져 내리면, 제 아무리 몬스터라 할지라도 제 살갗이 찢어 지는 고통에 정신을 못 차리게 된 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얻을 수 있 는 무기 중에선 가장 효율적이다.
터럭벌레의 서식지인지라 두어 마 리 마주하긴 했으나 몸을 숨기고 이동하니 별일은 없었다. 실내체육 관 근처를 순찰하는 사람들을 피해 근처에 대기하다가, 고유 스킬을 발 동했다.
몸이 가벼워지는 감각과 함께 눈 을 떠보니 나는 내 텐트 안에 있었 다.
"이제 왔네?"
"늦었잖아?"
쌍둥이들과 함께.
나는 곧장 카람빗을 역수로 쥐었 다. 야밤의 침입자는 그 의도가 불 명확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게다가 내 단독행위를 눈치채고 있다면 더 더욱.
"워워, 너무 경계하지 마!"
"우린 그냥 얘기를 나누려고 온
거니까!"
둘이 정말이라며 빈손을 보여줬다. 활 없는 레인저는…… 두 팔을 묶 고도 상대할 수 있다. 제아무리 천 재 레인저들이라 할지라도 지금 내 상대는 아니다. 10분의 1가량으로 스탯이 제한됐다 하더라도 지금 내 스탯은 일반인보다 서너 배는 더 높을 테니까.
"우리 화살을 잡아낸 사람은 처음 봤거든."
"수일 아저씨도 그냥 몸빵하는 게 최선인데 말야."
"맞지맞지."
어린 천재들의 오만함이 드러나는 대화였다. 처음 봤다 이거다. 자기 들하고 필적하는 상대는.
"난 안유수."
" 안유라."
근거 있는 자신감이 가득한 목소 리로, 자신들을 소개한다. 스스로의 이름을 대는 것이 어떤 무게인지 아는 것처럼.
"……한서하."
"우린 17살인데, 언니는?"
"19살. 며칠 뒤면 20살이 되겠지."
게이트가 열린 게 크리스마스 직
전이었으니, 지금쯤 새해 직전일 거 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의미겠냐 마는.
"그게 누나 고유 스킬이야? 갑자 기 나타나는 거?"
" 비슷해."
"텔레포트? 그치만 그건 전투용 스킬은 아닌뎅."
그렇게 생각되겠지. 말했다시피, 공간 간섭은 산업용 스킬이라는 인 식이 더 크다. 그래서 더 먼 거리 에 더 많은 하중을 옮길 수 있는 걸 높게 친다. 나도 멀리 이동을 못하는 건 아니지만, 단거리 위주로숙련도를 올린 탓에 그쪽이 더 익 숙하다.
블링크는 짧은 거리를 얼마나 쿨 타임 없이, 섬세하게 이동할 수 있 느냐가 더 중요하다. 시전자 본인만 이동하는 거기도 하고, 순식간에 치 고 빠지는 전투에 아주 유리하기 때문이다.
나도 원래는 거의 딜레이 없이 블 링크를 쓰는 수준이었지만, 지금 그 렇게 했다간 몸이 버티지 못할 거 다.
"있지, 언니가 몰래 나갔다 온 거 비밀로 해줄게."
"대신 우리 부탁도 들어주라."
"......뭔데?"
둘이 장난스럽게 씨익 웃었다.
"우리랑 대련해줘!"
전혀 예상 못 한 대답이었다. 대 련? 대련이라니?
"우리는 더 빨리 강해져야 하는데, 우도 쌤은 너무 조심성이 많아!"
"이렇게 찔끔찔끔 싸워서 어느 세 월에 강해져?"
"다 우리보다 약한데. 우릴 보호하 려고 들어."
"바보같이."
둘의 눈동자가 반질반질하게 빛났 다.
혼혈이라고 했던가. 그래서 유독 색소가 엷은 머리카락과 눈동자였 다. 자세히 살피면 이목구비에 이색 적인 느낌이 감돌았다. 그래서일까, 허름한 텐트에서 화롯불을 등진 둘 의 모습이 비현실적이었다.
"누나는 강하잖아? 알 수 있어."
"그러니까 우리랑 싸우자!"
잠시 머리를 굴렸다. 내게 나쁠 것 없는 선택지다. 내 외출을 숨길 수도 있고. 외출을 들킨다 해도 당장 큰일이 나진 않겠지만, 굳이 분란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이 둘 이 강해지는 건 나도 바라는 바다.
'원래 이 쌍둥이는 몬스터전만 해 와서 대인전에 약했지.'
이 작은 세계에서 둘에게 대적할 만한 인간이 없었던 탓에 사람과 전투하는 데 취약했다. 내부 분열이 일어났을 때 최우도가 사망한 것은 이 요소도 적잖았을 거다. 자신들이 지키던 사람들을 쏘는 게 쉽진 않 았겠지.
몬스터는 죽이기만 하면 된다. 죽
이지 않고 싸우는 법을 이 둘은 몰 랐다.
"좋아. 내 일에 방해되지 않는 선 이라면. 얼마든지."
그렇다면 내가 가르쳐줘야지. 어쩌 면, 나비의 날갯짓처럼 이게 많은 걸 다르게 할 수도 있으니까.
* * *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20살이 됐 고, 쌍둥이들은 18살이 됐다.
생존자들이 15명 정도 더 찾아왔
으나 개중 8명은 부상이 심해 그대 로 사망했다. 이 체육관 안에서 먹 을 것이나 식수는 대충 해결할 수 있어도 전문적인 의료 행위는 어려 웠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깨끗한 물로 씻고 얼마 안 남은 연고를 바르고 붕대로 감는 것뿐이다. 그마저도 연 고가 다 떨어져 가서 이젠 거의 불 가능했다.
나는 종종 정찰조에 속해 밖으로 나가 몬스터를 사냥했고, 다른 정찰 조가 물고 오는 정보들을 종합해 정리하는 회의에 참석했다. 내가 이 끌고 온 이들은 이제 정찰조에 들어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 다. 특히나 권성민은 거의 최우도의 오른팔처럼 굴었다.
안정기에 접어든 모습이었다. 나도 이 효율적인 체계 아래서 단연 발 군인 전투원으로, 아이템도 몇 배당 받았다. 그래봐야 터럭벌레를 죽이 고 나온 것이라 카람빗만 한 것은 없었기에 대부분 사양했고.
"핫!"
안유수가 내게 배운 체술로 품 안 을 파고들었다. 타고난 피지컬이 좋 아 능숙하지만, 내겐 한참 모자라 다.
주먹을 가볍게 흘려내고 자연스럽 게 팔꿈치를 안면 직전까지 휘둘렀 다가 멈췄다. 깜짝 놀라 두 눈을 질끈 감았던 안유수가 슬그머니 두 눈을 뜨고 불만 어린 표정을 했다. 하지만 이것까지 계산된 작전임을 알고 있다.
슈슈슉!
빠르게 자리를 피하자 원래 있던 곳에 화살이 꽂혔다. 궁을 들고서 뒤를 잡은 안유라가 씨익 웃었다. 짐승처럼 눈알이 번들거리는 건 여 전히 익숙해지지 못했지만, 놈들의 패턴은 이제 뻔하다.
"내가 말했지."
돌려차기가 날아오는 걸 가볍게 피했다. 다리를 잡고 무게중심을 더 실어주자 중심을 못 잡고 바닥에 처박힌다. 으악, 하고 짧게 비명을 냈다.
"너넨 너무 눈에 보인다고."
뒤통수로 날아오는 화살을 잡아챘 다. 대련용이라 조금 날카롭게 가다 듬은 나무 화살일 뿐이지만, 숙련된 궁수가 다루면 그것만으로도 충분 한 살상무기가 된다. 손바닥 살갗이 살짝 찢어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무 시했다. 아직 몸의 내구도가 다 회복되지 않아서 그런 것뿐이다.
안유수가 바닥에 누워있는 사이에 빠르게 안유라의 등 뒤를 점했다. 안유라가 궁의 몸체를 휘둘러 날 공격하려 했으나 내가 먼저였다. 손 톱이 안유라의 목덜미에 닿는다. 소 름이 오소소 돋은 살결이 느껴졌다. 지척에서 들여다본 눈동자가 초승 달처럼 휘었다.
"아〜, 정말! 언니한텐 못 이기겠 다니까!"
"또 졌네!"
안유수는 아예 바닥에서 일어날 생각조차 안 하고 있었다. 옆에서지켜보던 아주머니가 익숙하게 물 을 건넸다. 살짝 목례하고 받아마시 자 대견하다는 듯이 날 쳐다본다.
"아유, 덕분에 우리 쌍둥이들이 심 심할 틈이 없네!"
"저놈들이 빨래 더미 근처에서 놀 다가 일 두 번 하게 만든 게 한두 번이 아닌데, 아주 다행이야그렇다고 한다.
"꼴좋다, 이놈들아!"
수일 아저씨가 제일 기뻐했다.
"서하 누나, 너무 세요……
"너희가 몬스터만 상대하다 보니
단순하게 싸워서 그래."
머리를 톡톡 치며 말을 이었다.
"생각하면서 싸우라고 했지?"
"그게 쉽냐고요
" 맞아."
이 녀석들은 잔머리만 비상해서, 은근히 사람 신경을 다른 데로 끄 는 데 탁월하다. 그 센스는 인정할 만했다.
"잠깐 기다려. 우도 선생님께 다녀 올 테니까."
"우도 쌤한테?"
"실전에서 보여주는 게 빠를 거
같아서."
내 말에 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를 마주봤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엔 흥미가 가득했다.
"신난다!"
"실전이다!"
허락은 금방 떨어졌다. 내가 나서 서 전투요원들을 단련해주겠다 하 는 거니 거절할 이유가 없겠지. 체 육관 내에서 손에 꼽히는 전투원들 의 조합이니 보충은 필요 없었다. 가볍게 다녀올 예정이라 간단하게 짐을 꾸렸다.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밖으로
향했다.
"언니랑 같이 정찰 나온 건 처음 인 것 같아!"
"다른 정찰조니까, 어쩔 수 없지!"
" 쉿."
내가 가볍게 경고하자 둘이 입을 다물었다. 정식 정찰이 아닌 만큼 가볍게 살펴볼 생각이긴 했으나, 그 렇다고 해서 이 게이트를 만만하게 봐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몬스터의 흔적이 있어. 주변에 새 로운 놈이 나타난 모양이야."
바닥에 남은 발자국이 터럭벌레의
것은 아니었다. 이 인근은 터럭벌레 서식지라 사냥이 수월했는데.
"크기가 작아 보이는데?"
안유라가 발자국을 손대중으로 재 면서 말을 덧붙였다.
"크기가 작을수록 지성을 가진 몬 스터일 확률이 높아."
"몬스터가?"
"몬스터가."
흔하진 않지만 인간과 유사할 정 도로 지능이 높은 몬스터도 있다. 물론 발자국의 형태로 보아 이번 몬스터는 그 정도로 위험한 녀석은아니다. 뒷발톱이 앞발톱 뒤 멀찍이 찍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흰 눈도깨비'인 것 같다.
'혼자 무리에서 떨어져 나왔나 본 데…… 그렇다면 충분히 연습용으 로 쓸 만하지.'
놈이 남긴 흔적을 뒤쫓기 시작했 다. 중간중간 터럭벌레를 만나기도 했지만 숨어 지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과 마주할 수 있었다.
-우득, 우드득.
터럭벌레를 이미 사냥해서 잡아먹 고 있는 모습이었다. 내 뒤로 따라붙은 쌍둥이들이 숨죽여 그것을 지 켜봤다.
"흰눈도깨비야."
"이름처럼 생겼네."
"그러니까."
동공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헷갈 릴 정도로 하얀 눈이 녀석의 가장 큰 특징이다. 복슬복슬한 털북숭이 에 머리 위로 솟은 뿔이 그 이름의 유래를 알려주고 있었다.
그래도 무시할 순 없다. 무리사냥 을 하는 몬스터들의 특징은, 전략을 짤 줄 안다는 점이니까. 터럭벌레만 상대해온 쌍둥이들에게 적절한 상대다.
"나는 뒤에서 조언만 할 거야. 위 험해지면 끼어들겠지만, 되도록 너 희 둘이 잡도록 둘 거고. 할 수 있 겠어?"
둘이 활을 손에 꼭 쥔 채로 고개 를 끄덕였다. 탱커 없이 레인저만 둘이니 조합이 잘 맞는 편은 아니 지만…… 거리 유지만 잘한다면 원 거리 딜러는 근거리 딜러보다 우위 에 설 수 있으니, 크게 문제 될 건 없다.
"좋아. 우리 실력 제대로 보여줄 테니까!"
"맞아, 맞아!"
쌍둥이가 호언장담하면서 뛰쳐나 간다. 나름 전략을 생각했는지 놈의 좌우에 각각 자리 잡는다. 아직까지 흰눈도깨비는 터럭벌레를 잡아먹느 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슉!
시작은 안유수의 화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