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챕터: 비틀린 하늘 아래
"어, 어어? 울어? 어떡해, 많이 놀 랐나 봐."
"그럴 만도 하죠. 죽을 뻔했으 니……. 아직 어려 보이는데. 에휴, 게이트가 원수지, 원수야."
"어떡해? 어떡해야 해?"
"저도 몰라요! 길드장은 동생 있잖 아요. 뭐라도 해봐요!"
"내 동생은 잘 안 운단 말이야!"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울고 웃고 떠들며, 내 우는 모습에 당황하기도 했다.
비록, 나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 지 못하는 것 같지만…… 그래. 살 아있었다. 표혜원이 살아있다! 그 명확한 현실에 눈물이 멈추질 않았 다. 눈에 소금이라도 들어간 것처 럼. 바보같이.
* * *
10년도 넘게 나는 잊을 수 없는 악몽 속에서 살아왔다.
이 게이트를 시작으로 내 인생은 죄 꼬이기만 했으니까. 그 시작점이 스승님의 죽음이란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원래 산업 계통 회사에 적당히 취직해서 고유 스킬을 살려 놀고먹으려 했던 19살의 한서하는 이 게이트로 인해 전쟁터를 찾아다 니는 헌터가 됐다.
그 과정 속에서 수많은 고통과 죽 음이 뒤따랐음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게이트란 그런 곳 이니까.
'표혜원……
생각해보면 나와 그렇게 나이 차 이가 많이 나지도 않았다. 지금 내 가 20살이니, 8살 정도 차이가 날 까. 물론 헌터 세계에서 28살이면 노련한 축에 속하지만.
내 스승이 이끌던 길드, 역천은 이 런 대규모 게이트의 클리어 멤버에 낄 정도로 크지 못해서 정찰팀에 속했다. 이들은 본대가 진입하기 3 일에서 일주일 전에 미리 투입되어 게이트 내부 상황을 살피고 생존자들의 위치와 수를 파악하는 역할을 한다. 그 말인즉슨, 클리어 헌터들 이 어느 정도 정해졌다는 뜻일 거 다.
안타깝게도 모두 죽었지만.
당연한 이야기다.
이 게이트가 3년 동안 클리어되지 못했으니, 그동안 얼마나 많은 헌터 가 죽어 나갔겠는가. 고작해야 게이 트가 열린 지 한 달 만에 들어오는 정찰 부대 역시 무사했을 리가 없 다. 역천에서도 내 스승 말고는 죄 다 죽었다.
벨제부브, 그 개자식 때문에.
탁.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프가 앞 에 놓였다. 나를 배려한 사치스러운 식사였다. 물론 몬스터가 거의 없는 소금 사막 지대라 가능한 일이겠지.
"좀 진정이 됐어?"
나는 다시금 왈칵 솟으려는 눈물 을 애써 참아냈다. 표혜원, 그녀의 목소리만 들어도 자꾸만 감정이 요 동쳤다. 나는 게이트에서 산전수전 을 겪으며 감정 기복이 극도로 제한된 지 오래였기 때문에, 이렇게 롤러코스터처럼 감정이 소용돌이치 는 게 오랜만이라 매우 지친 상태 였다.
"아직 이름도 못 들었네. 이름이 뭐야?"
"한서하요."
"나이는'?"
"이제 20살이에요."
"와, 내가 딱 너 정도 되는 동생이 있는데! 너보단 어리지만."
후루룩. 수프를 입 안으로 넘기면 서 가볍게 수다를 떨었다. 내 긴장을 풀어주려는 것 같았다. 여전히 상냥한 사람이다.
"많이 힘들었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회귀 전에 는 죽을 만큼 힘들었던 게 맞으니 까.
-얘, 너 괜찮니?
그래. 그때도. 당신이 날 살렸다.
"너 혼자 살아남은 거야?"
"……저쪽으로 일주일 정도 더 걸 어가면, 실내체육관이 있어요."
내 말에 주변 사람들이 귀를 기울 였다. 정찰팀인 이들에게 그보다 귀한 정보는 없겠지. 실내체육관이 이 근방에서 그나마 요새 역할을 할 만한 대피소라는 걸 알고 있을 거 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대부분 그곳 에 모여있어요."
"숫자는 얼마나 돼?"
"제가 마지막으로 봤을 땐 80명 정도였어요."
"80 명……
놀라움이 섞인 목소리였다. 그렇겠 지.
과거에도 '무너지지 않는 성곽'이
라 불린 요새가 아닌가. 이 게이트 안에서 많은 사람이 장기간 생존한 실내체육관은 여러모로 주목할 만 한 곳이었다. 몬스터 때문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 내분으로 와해되었다 는 점에서 특히나.
"너는 언제 빠져나왔는데?"
"열흘 전이요."
"너 혼자?"
" 네."
옆에서 듣고 있던 남자가 의아하 다는 듯이 물었다.
"일주일 거리를 너 혼자, 살아서
여기까지 왔다고?"
그 말에 긴장감 어린 공기가 잠시 머물렀다.
"야야, 애한테 왜 그래."
표혜원이 말리는 시늉을 했지만 눈초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그래. 상처받을 것 없다. 저들에겐 당연한 의심이니까. 일개 각성자가 혼자서 소금 사막을 헤매고 있는 것부터가 수상한 일이다. 이 게이트 안에선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으니, 조 금이라도 의심스러우면 조심하는 게 현명하다.
"제 고유 스킬로 몬스터들을 피할
수 있었어요."
"그렇다 해도……
아까 얼빠져 있었던 모습을 떠올 리니 살아남아온 게 영 미심쩍은 듯했다.
"아까는…… 사람을 보고 너무 놀 라서 그랬어요. 평소에는,"
카람빗을 슬쩍 들어 보였다.
"E나 도급 몬스터 한 마리 정도는 혼자서도 잡거든요."
내 말에 흥미롭다는 표정을 했다. 일반인치곤 괜찮은 실력이라 생각 했겠지.
"실내체육관 안에 너 정도 되는 각성자들이 얼마나 되지?"
"……4명 정도."
안씨 쌍둥이 둘에, 설민준도 혼자 서 사냥할 수 있을 거고…… 김태 병과 이찬송이 같이 있으면 1인분 은 해줄 테니까.
"그럼 너는 꽤 중요한 전력이었을 텐데. 왜 혼자 이곳에 있는 거냐?"
남자가 날카롭게 물었다. 그렇지. 그게 의심스럽겠지.
"조연호."
표혜원이 경고의 의미로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남자는 물러 서지 않았다. 표혜원이 제 동생이 생각나 나를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이해되지만, 이 상황에선 조연호의 판단이 옳다. 나는 의심스러운 외부 인이니까.
"제가 나가겠다고 했어요."
"네가 스스로? 어째서? 거기 남아 있는 게 훨씬 안전하단 걸 너도 알 텐데."
"찾아야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요."
분위기가 싸늘하게 굳었다.
조연호도 실수했다고 생각했는지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아마도 내 가 부모나 형제를 찾아 나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표혜원이 어색 하게 웃는 얼굴로 조연호의 머리를 쿵 내리쳤다. 소리가 꽤 살벌했다.
"하, 하하하. 얘가 괜한 소릴 한다 니까! 서하야, 오늘은 푹 쉬고, 잘 먹고, 잘 자는 거야. 알겠지? 나머 지 얘기는 내일 마저 하자! 얘도 악의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게 이트 안이 워낙 흉흉해서 그래. 알 지, 뭔 말인지? 아니, 그렇다고 얘 가 잘했다는 건 아니고……
횡설수설하면서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려고 한다. 나는 그냥 가만히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표혜원 은 조연호의 귀를 잡아끌고 뒤로 가면서 연신 내가 못살아, 내가 못 살아, 하며 중얼거렸다. 정겨운 모 습이었다. 회귀 전에도 저렇게 투닥 거리는 모습을 꽤 봤던 것 같은데.
"서하야. 나는 정상준이라고 해. 편하게 부르고, 오늘 여기서 자면 돼. 혹시 필요한 거 있으면 불러. 불침번이 밖에 있을 거야."
한 남자가 상냥한 말투로 텐트 하 나를 소개해주며 말했다. 그래. 기 억난다. 이 사람도 있었지. 웃으면 서 탱킹하는 걸로 유명했다. 스마일 좀비, 뭐 그런 별명도 있었던 것같은데...
"에구, 이 어린 게 게이트 안에서 얼마나 고생했을까……
옆에서 여자가 안쓰럽다는 얼굴을 하며 말을 얹었다.
어……, 게이트 안에서 가족까지 잃고 험난하게 살아남은 생존자A 정도로 오해하는 모양인데…….
'회귀 전이면 몰라도 이번엔 그렇 게 고생 안 했는데……
정정해줄까 하다가, 굳이 내 입으 로 저 그렇게 고생 안 했어요, 해 도 웃길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그래. 살아있는 스승님도 찾았고, 마주했다. 벨제부브의 관심도 나한 테 쏠려있고. 스승님에게 관심이 돌 아가기 전에, 서둘러 일을 끝마쳐야 했다.
이번에는 꼭, 꼭 살아서 함께 돌아 가리라.
"아아. 여기는 역천. 여기는 역천. 게이트의 B-2 구역에 있다. 소금 사막지대 확인. 생존자 한 명과 접
촉했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실내 체육관이 대피소로 쓰이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80명가량의 생존자 들이 그곳에 있을 것으로 추정된 다."
아침은 무전기에 보고를 하는 것 부터 시작했다.
정찰팀에게 제공되는 특수한 무전 기다. 게이트의 안과 밖을 연결해주 는 거의 유일한 물건이라고 할 수 있다. 몬스터를 죽이면 나오는 마력 석이 그 동력인데, 이게 아닌 일반 무전기는 게이트 안에서 먹통 고철 일 뿐이다. 게이트가 시작하자마자 휴대폰이 제대로 들어먹지 않는 것처럼.
"아침은 좀 간단하게 먹자. 괜찮 지?"
내게 미안한 듯이 말한다. 스승님 은 항상 날 어린애 보듯이 했지. 성장이 다 끝난 성인이란 걸 모르 는 듯 말이다. 추억에 젖어 살짝 웃으며 괜찮다고 답했다.
"자. 육포다."
조연호가 내 몫을 건넸다. 익숙하 지. 이런 건조 식량은 유통기한이 길어 나도 게이트에 오래 있을 적 이면 자주 씹어 먹곤 했다. 대충 입에 넣고 질겅거리면 나트륨도 함께 섭취할 수 있으니 필수템이라 할 수 있다.
"일단은 네가 말한 실내체육관에 가볼까 하는데."
표혜원이 휴대폰으로 지도를 확대 하며 말을 꺼냈다. 미리 다운 받아 둔 지도는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었다. 배터리가 다 닳을 때까진. 하긴 매번 지도를 밖에서 꺼냈다간 금방 삭아버릴 거다.
"거긴 헌터 없이 잘 지낼 수 있어 요. 다른 데를 둘러보는 게 더 나 을걸요."
"만약 몬스터라도 습격하면 어떡
하려고. 운 좋게 살아남아서 다들 너처럼 운이 좋은 줄 아나 본 데……
조연호가 또 끼어들었다. 어제까지 는 타당한 의심이었지만, 이건 명백 한 시비다. 스승님 앞이고 그녀의 팀원이니 그냥 웃어넘길 수도 있겠 지만…… 가만히 당하고 있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아서 말이다.
실내체육관은 충분히 잘 견뎌내고 있다. 그곳에 내가 다시 돌아가는 것만큼 큰 재앙은 없을 거다. 벨제 부브가 날 주시하고 있을 테니.
"정찰조는 총 6개 조로 나뉘어 있
어요."
"응? 갑자기 무슨 소릴……
스승님의 말을 끊어냈다.
"각 조에는 총괄하는 조장이 있고, 매일 오전 오후마다 한 조씩 나가 구역을 정찰하죠. 터럭벌레를 사냥 하기도 하고, 위험한 몬스터가 있으 면 토벌대를 꾸리기도 해요. 저 안 에는 식수대도 있고, 마트에서 가져 온 물자들도 있고, 사람들도 많아서 각자 자기 역할을 수행하며 음식을 보급받아요."
잠시 쉬었다가 결론을 내뱉었다.
"저 안에는, 그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다고요."
헌터의 출현은 오히려 큰 혼란을 야기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네 말만 듣고 그렇구나, 하고 넘길 수는 없다고. 네 말이 진짜인지, 그곳에 아직 생 존자들이 있는지 확인해야 해."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그의 주장도 타당했다.
"함부로 얘기한 건 사과하지. 생존 자들끼리 그렇게 뭉쳐있다가 좋은 꼴을 본 적이 없어서…… 그렇게 체계가 잡혀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럴 만도 하지. 내가 기억하기에
도 그다지 좋은 모습은 못 봤던 것 같다. 그가 사과하자 표혜원이 해맑 게 웃으면서 끼어들었다.
"참참! 어제 서하 얘기 마저 듣기 로 했었지. 혹시 게이트 시작부터 어떻게 지냈는지 알려줄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