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숨 길 생각은 아니지만, 내가 몬스터를 해치웠다는 건 생략하면서 말을 이 었다. 처음 H마트에서 게이트화가 일어나고, 물류창고로 숨어든 일. 하루를 그곳에서 버티고 다음 날 곧장 실내체육관으로 향한 일. 가는 길에 몬스터들을 마주치기도 했으나 어떻게든 지나쳐 왔다고 적당히 각색해서 말했다.
"많이 힘들었겠다……
동정 어린 눈빛들이 내게 향했다. 그야, 보통은 그렇겠지.
"전 괜찮아요."
"애가 너무 담담해 보여서 안쓰럽 네……. 서하야. 딱딱하게 부르지 말고 그냥 혜원 언니라고 불러!"
그 말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혜원 언니?
"그…… 그렇게 불러도 돼요?"
살짝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
며 물었더니, 스승님…… 그러니까 혜원 언니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 다. 웅! 그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볼 수밖 에 없었다. 회귀 전에, 그녀는 장난 반 진담 반으로 저를 '스승님'이라 불러달라고 했다. 어릴 적부터 무협 지를 보면서 스승님이라고 불리는 게 꿈이었다고 했던가? 아무튼.
나이 차이가 8살밖에 안 나니 그 냥 언니라고 부를 법도 했지만. 어 쩐지 먼저 허락해주지 않은 호칭으 로 부르기도 어색해서 내내 스승님, 혹은 표혜원이라고 불렀다. 이쪽이 더 건방진가? 어찌 됐든 혜원 언니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부터가 큰 수확이었다.
'회귀해서 다행이다!'
이 빌어먹을 게이트에 다시 빠진 건 정말 욕 나오는 일이지만, 이것 만으로도 좀 용서가 되는 것 같다. 살아있는 스승님에 언니라는 호칭 이라니! 이거 혹시 꿈인가? 너무 행복한 나머지 꿈으로 착각할 것 같았다.
"허, 참……
옆에서 조연호가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치긴 했으나 무시했다. 감격 스러운 나머지 눈물이 찔끔 나오려해서, 또 울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써야 했다.
나는 한동안 역천과 함께 움직이 기로 했다. 나 혼자 내버려두고 떠 나기엔 혜…… 혜원 언니……가 마 음 쓰여 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 근방은 내가 더 잘 알기도 해서 일 종의 길잡이가 되어주기로 했다.
실내체육관으로 향하는 건 조금 뒤로 미뤘다. 내가 계속해서 그곳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자 혜원 언니가 혹시 그들과 안 좋게 헤어졌 느냐 물었고, 그것 말곤 설명할 방 도가 없어 침묵했다. 그랬더니 내가 그들과 트러블이 생겨 쫓겨난 것으 로 대강 짐작한 모양이다. 그 이후 로 내게 실내체육관에 대해 묻지 않았다.
이들은 보스몹을 특정할 단서를 찾고 있다고 했다.
그 얘길 듣고 홈칫 놀라긴 했으나, 혜원 언니와 벨제부브를 마주치게 할 생각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나 는 도리어 안전한 쪽으로 향하기로 했다.
"이쪽으로 쭉 가면 강이 나와요."
"오……. 그 강물 마실 수 있나?"
"정화 작업을 거치면요."
혜원 언니의 질문에 정석적인 답 변을 해줬다. 식수 문제 해결은 중 요한 일이니까. 처음엔 내 합류를 탐탁지 않아하던 사람들도 내가 식 수원을 척척 찾아내자 곧장 불만이 사라졌다.
물론 정찰팀이니 내 도움 없이도 어떻게든 식수원을 찾았겠지만, 목 적지를 알고서 향하는 것과 어딘지 도 모르며 헤매는 것은 심적 피로 도가 천지 차이니 말이다.
"가식적인 꼬맹이……
뒤에서 조연호가 들으란 듯이 중 얼거렸지만 무시했다. 그와 나는 종 종 유치한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예를 들면 이런 거.
"목이 좀 마른걸〜."
혜원 언니가 혼자 중얼거리면, 그 때부터 우리의 경쟁은 시작된다. 서 로 잠시 눈이 마주쳤다가 누가 먼 저랄 것도 없이 몸을 날렸다.
애석하게도 조연호는 힐러라서 내 게 당해낼 수가 없다. 물론 내가 이전처럼 날쌔지는 않지만, 미약하 게나마 조연호보다 더 빠르다.
"여기요! 혜원 언니!"
"고마워, 서하야. 안 그래도 되는 데……
"아니에요. 별거 아닌걸요."
뒤에서 분한 얼굴로 우릴 바라보 는 조연호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하 지 않았다.
"진짜 겁나 빠르네."
그가 불퉁한 어조로 불만을 토로 하면 난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지 나치면 그만이다. 그런 우리 둘을 두고 사람들은 내기까지 걸었다. 다 음번엔 누가 이길지 말이다. 혜원언니 모르게 뒤에서 벌어지는 일들 이었다.
"쟤 일반인 맞아? 육상 선수 하다 온 거 아냐? 아님 헌터 지망생?"
조연호는 아무리 제 특기 분야가 아니라 해도 내게 진 것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힐러라 신체적 능 력은 다른 헌터들보다 떨어지겠지 만, 일반인보단 훨씬 강한 게 정설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힐러는 헌터 라기엔…… 좀 더 특수한 분야로 생각해야 한다.
힐러와 마법사는 헌터들 중에서도 매우 드문 케이스에 속하는데, 아주특별한 적성을 갖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고유 스킬이 아니면 입문 조차 불가능한데, 후천적으로 개화 할 수 없는 스킬이어서 가지고 있 는 사람이 무척 적었다.
그러니 사실 중소 길드인 역천에 조연호가 있는 건 아주 희귀한 일 이다. 대부분 힐러들은 거대 길드에 속하거나 국가에 소속되기 때문이 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조 연호가 이 길드에 있는 이유는 아 마…….
"저, 길드장님."
조연호가 슬그머니 혜원 언니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 살짝 다쳤죠? 줘보세요. 치 료해드릴게요."
"응? 그냥 스친 건데……. 괜찮 아!"
"게이트 안에선 그런 작은 상처도 감염될 수 있어요. 줘보세요."
마지못해 혜원 언니가 손을 내밀 자 조연호가 상처 부위에 닿지 않 게 살짝 거리를 두고 손을 가져다 댔다. 하얀 빛이 슬쩍 어리더니 얼 마 지나지 않아 상처가 말끔히 사 라졌다. 갈라져 있던 피부가 스르륵 녹아내리듯 붙는 건 언제 봐도 신기한 광경이다.
"고마워, 연호야."
"아뇨, 뭘요……
답지 않게 겸연쩍은 표정을 짓는 게 아주 가증스럽다. 혜원 언니 앞 에서 수줍게 구는 내 모습을 보던 조연호가 이랬을까? 약간 속이 안 좋다.
뭐.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조 연호도 혜원 언니에게 진 빚이 있 겠지.
-얘, 너 괜찮니?
그때 내가 구원받은 것처럼.
희뿌연 안개가 낮게 깔렸다. 고풍 스러운 디자인이 시대착오적인 느 낌마저 주는 저택이었다. 중세 귀족 이 이런 곳에서 살았을까. 섬세한 무늬가 그려진 벽지에 세밀한 양각 의 촛대까지. 화려한 샹들리에가 인 위적으로 느껴지는 곳이었다.
-제가 나가겠다고 했어요.
오래된 거울 너머에서 여자가 말 했다.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 앞에서도 전혀 겁먹지 않은 어투였다. 조 금도 굽히지 않을 듯 꼿꼿함이 서 린 대답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어둠이 드리워 남자의 모습이 제 대로 보이지 않았다. 부드러운 실크 재질의 보라색 옷감만이 반질반질 제 윤기를 뽐냈다.
-네가 스스로? 어째서? 거기 남아 있는 게 훨씬 안전하단 걸 너도 알 텐데.
-찾아야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요.
찻잔을 기울이던 손이 멈췄다. 희 고 긴 손가락이 찻잔 옆면을 잠시매만지다가 떨어졌다. 그러나 안타 깝게도, 누굴 찾고 있었는지 덧붙이 는 말은 없었다.
남자는 조금 식은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궁금증이 일었다. 케르베 로스를 만난 다음 갑자기 홀로 행 동하길래 무슨 생각인가 했는데.
기특하게도, 기다리고 있다는 그의 말을 듣고 찾아오려는 것처럼 굴고 있지 않은가?
'그런 것치곤 저 여자를 지나치게 잘 따르는 것 같긴 한데……
옅은 아이보리색 머리카락을 한 여자를 향해 눈을 빛내는 한서하를보니, 혹시 저 여자를 찾아 나섰던 건 아닌가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애써 그런 의심을 지워냈다. 저 냉 철한 어린 헌터가 처음 보는 여자 를 찾으려고 위험을 감수할 까닭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애초에 한서하 가 어떻게 저들이 올 걸 미리 알고 소금 사막에서 기다리겠는가. 이 드 넓은 게이트 안에서, 어떻게 만날 줄 알고.
그렇게 생각하자, 역시 한서하가 찾아 나설 존재가 자신밖에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케르베로스의 기억에
서도, 날 아는 것처럼 굴었지……
그의 이름을 정확히 내뱉지 않았 는가. '벨제부브'라고.
남자가 살짝 고개를 숙이자 어스 름한 빛이 그를 비추었다. 결 좋은 검은 머리카락이 비단처럼 흘러내 리고. 가볍게 걸친 가운이 그의 몸 을 휘감고 있었다. 기다란 속눈썹이 내려앉아 그림자를 드리우다가, 그 아래 붉은 눈동자가 이질적으로 번 뜩였다.
인간이 아니란 걸 증명하듯 동공 이 세로로 가늘게 찢어져 있었다.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남자였다. 80년대 B급 뱀파이어 영 화에 나올 법한 분위기였다. 중세와 근대 사이에 지어졌을 법한 저택에 앉아있는 붉은 눈동자의 미남자라 니.
'그렇다면 재밌는걸……
케르베로스를 보내긴 했지만, 벨제 부브도 한서하가 자신을 찾아올 거 란 기대는 없었다. 그저 단순한 경 고장이었다. 혹은 초대장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주시하고 있겠다는 예 고장도 될 수 있을 거다.
실제로 케르베로스를 보낸 자는 한서하만이 아니다. 이 드넓은 게이트 안에, 재능 있는 예비 헌터가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한서하 는 드물게도 노련함까지 갖춘 케이 스긴 했지만, 아주 독보적이라고 말 하기엔 부족했다. 그러나 이 반응은 상당히 놀랍다. 썩 흥미롭기까지 하 다.
'오랜 시간 인간을 관찰해왔지만, 지구의 인간들은 유독 날 즐겁게 하는군.'
어쭙잖은 연합군 놀이에 어울려준 보람이 있었다. 그다지 관심도 없었 는데, 이렇게 흥미로운 곳이라면 생 각이 또 달라진다. 지루한 그의 일 상에 아주 약간의 자극이라도 가져다준다면, 그는 억만금이라도 바칠 수 있었다.
벨제부브는 습관처럼 부드러운 미 소를 입가에 걸었다. 드물게도, 향 기로운 차 대신 와인이 당기는 날 이었다.
* * *
실내체육관까지 가지 못한 생존자 가 있을까 싶어 인근을 살폈지만 역시나 발견되는 사람은 없었다. 생 존자가 있었다 해도 한 달이나 지 났으니 벌써 죽은 지 오래일 거다.
그걸 아는지 역천 사람들도 표정이 썩 좋진 않았다. 죄책감 비슷한 감 정을 느끼는 것 같았다.
"우리가 너무 늦었구나……
혜원 언니가 작게 중얼거렸다. 사 람들이 잠시 머물렀던지, 불을 피운 자국과 옷가지 몇 벌이 바닥에 널 브러져 있었다. 뭐라도 해 먹으려고 시도한 듯 깡통 안에 썩은 음식물 들이 있었다. 버리고 갔다기보다는, 아마도 불시에 습격당해 다시 돌아 오지 못한 거겠지.
"한 달이나 지났으니까."
조연호도 썩 개운치 못한 얼굴을
했다.
가라앉은 분위기대로, 근처에 터를 잡고 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살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조금 더 일찍 왔으면 달랐을까? 정부가 조금만 더 신속했다면, 길드 끼리 다투지 않았더라면."
혜원 언니는 그 생각을 떨치기 어 려운 듯했다.
정찰팀이 투입되기까지 한 달이나 걸린 데는 마냥 순수한 이유만 있 지는 않았다. 물론 역대 최대 규모 의 게이트니 정찰팀도 적당히 실력 자들로 뽑고 클리어팀도 구성하느라 바빴을 거다.
정찰팀도 한두 팀이 아니고, 이 넓 은 구역을 다 정찰하려면 투입되는 장비며 준비할 게 얼마나 많겠는가. 정찰팀이 전해주는 정보를 취합해 서 정리하는 팀 있어야지, 그 정보 로 클리어 전술 짜는 팀도 있어야 지……. 하루 이틀 걸릴 일은 분명 아니다.
하지만 이유가 그것뿐이면 한 달 이나 걸리진 않았을 거다. 뭐라 해 도 한국은 게이트가 다발적으로 발 생하는 국가고, 그에 대한 대비책도 신속정확하기로 유명하니까. 다만 이 경우엔,
'역대 최대 규모니 들어가 있기만 해도 아이템 벌이가 쏠쏠할 거라 생각했겠지. 그래서 자기들끼리 이 권 다툼을 벌였을 테고.'
회귀 전에도 부끄러운 역사로 남 아있는 부분이었다. 길드 간의 알력 으로 생존자 구조가 늦어진 점은 뼈아픈 실책이다.
"혜원 언니."
그러나 지나치게 그것에 몰두하여 사기를 저하시키는 것도 좋은 방법 은 아니다.
"응?"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저는 언니 덕분에 살았잖아요."
겉보기엔 말이다. 소금귀신에게 물 려 죽을 위기에 처한 저를 구해준 건 맞으니까.
"언니를 만나지 못했으면 저는 거 기서 죽었을 거예요. 제 생명의 은 인이고, 정말 감사하게 생각해요."
말은 조금 다르지만. 회귀 전에는 정말로 그랬다. 내 생명의 은인, 내 삶의 이유이자 목적이었으니까. 당 신을 잃고 나서 내가 얼마나 방황 했었는지. 게이트를 향한 증오와 분 노에 미쳐 살았던 시간이 얼마나길었는지. 당신은 영영 모르겠지만.
"서하야……
혜원 언니가 감동 어린 얼굴을 하 고 날 바라봤다. 내 손을 꼭 붙잡 고, 무어라 말을 꺼내려는 순간.
분위기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혜원 언니가 창백한 얼굴을 하고 서 한쪽을 바라봤다. 다른 사람들도 무기를 꺼낸 채 그곳을 응시했다.
뭔가 있는 걸까? 하지만 기감이 예전 같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아 직 알아챌 수 없었다.
"온다."
혜원 언니가 짧게 내뱉었다. 그것 으로 충분했다. 사람들은 재빠르게 진영을 가다듬었다. 나는 사람들 손 에 밀리고 밀려 제일 뒤로 빠졌다.
조연호 바로 옆이었다. 최우선 보 호 대상이라는 의미다.
잠깐, 하고 앞으로 나서려는데 조 연호가 붙잡았다. 살짝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래. 안다. 지금 나는 프 로 헌터들에게 약간 못 미치는 실 력이란 걸. 하지만 스탯을 상회하고 도 남을 전투 감각과 경험이 있다. 그러나…… 혜원 언니가 감지해낸 몬스터를 나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 기 때문에, 정말로 내가 도움이 될지 확신이 없었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카람빗을 손에 쥔 채 후방에서 대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몬스터들 특유 의 누린내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