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적당히 둘러대야겠지.
내가 먼저 날 데리러 와달라 했고, 거기서 거래까지 하고 온 걸 알면 날 몬스터 측에 붙은 배신자라고 생각할 가능성도 있었다.
혹마법사가 배척받는 이유도 그것 때문 아니던가. 몬스터의 측근이 되 어 인류를 배신한 죄인. 사역마와계약한 나도, 이 시점에선 크게 달 라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아직 이세계, 톨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시점이니까.
"저도 몰라요. 평소대로 잠자리에 들었는데 눈을 뜨니 처음 보는 곳 이었어요."
"어떤 곳이었죠?"
"저택 같아 보였는데…… 서양풍 에 고풍스러운 장식이 많았어요. 침 대에서 깼고, 일어나니…… 처음 보 는 남자가 창가 테이블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고요."
내 말에 김기택과 전청운의 얼굴
이 딱딱하게 굳었다. 순하랑은 얼굴 이 보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순식 간에 내부의 분위기가 긴장된 듯 조여졌다.
"남자……였다고요? 완전한 인간 형의?"
"겉보기에는요."
"그 몬스터가 언어를 구사했습니 까?"
"아주 능숙하던데요."
내 말이 이어질수록 안색이 창백 해진다. 난도가 높을 거라 예상은 했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겠지. 완벽한 인간형 몬스터에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지능까지 갖췄다 니. 아마 전례가 없을 거다.
게이트로 인해 양 세계가 어느 정 도 균형을 이루면서 톨룩 놈들이 게이트를 통해 이쪽으로 넘어오게 된다. 그때는 '인간형 몬스터'라고 불리는 인간과 싸워야겠지.
지금은 아직 불안정해 놈들의 본 체가 오진 못하고 투사체만 옮겨와 있다.
그래서 본체보다는 훨씬 약한 편 이다.
그야 마족들의 왕, 붉은 어둠의 권 속이자 주인인 벨제부브 본체가 이곳에 현현하면 밸런스가 붕괴될 테 니까. 그 막중한 인과율은 또 어떻 게 지겠는가. 지금은 투사체가 한계 겠지.
물론 그마저도 우리에겐 벅찬 상 대였다.
"이름은 '벨제부브'라고 했어요."
"이름까지 있었습니까? '종족명'이 아니라, 이름이라고요? 자의식이 있다는 소린데 아직까지 그 정도로 고등한 몬스터는...
"인간하고 다른 점을 모를 정도였 어요."
지나치게 아름다운 것 빼고는 말
이다.
"왜 널 살려서 다시 보내줬지?"
김기택이 패닉에 빠진 사이, 전청 운이 다가와 물었다.
"잘 모르겠지만 절 계속 관찰했던 것 같아요. 제 이동 경로도 알고 있었고. 절 구경하는 게 재밌나 보 죠."
"그럴 리 없어. 몬스터들은 인간을 사냥하도록 학습된 존재들이다."
대부분의 몬스터는 그럴 거다. 저 밖에 돌아다니는 괴물들은, 인간만 보면 환장하며 달려들 테니까. 역대 보스몹들도 더 강하고 파괴적이었을 뿐, 크게 다른 점은 없었을 거 다.
인간과 유사하게 사고를 하고 개 인 이름을 짓는 몬스터는 아직 생 소한 존재다. 이들 중 상당수가 톨 룩의 주민이라는 사실 또한 알려지 기 전이다. 개념이 정립된 후에야 '네임드' 몬스터라는 명칭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전 살아 돌아왔는걸요."
" 그건......
전청운은 자신의 절대적인 명제를 뒤흔드는 내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 려운 듯 보였다.
대나무같이 올곧은 사람이다. 그래 서 더 꺾기 쉬울 수도 있겠지만.
"사실 전 벨제부브와 얼마 얘기를 나누지도 않았어요. 고작해야 10 분? 그런데 여기선 3일이 지나있었 고요."
"시간축이 다른 곳인가."
"아마도요."
시간축이 다른 것도 힌트가 될 수 있다. 보스몹의 서식지가 어딘지 알 아야 클리어할 수 있을 테니.
이후로도 몇 가지 질문을 더 했으 나 유의미한 정보는 그다지 없었다.
그들은 한참 생각에 잠겼다. 이 전 력으로 벨제부브를 잡을 수 있을지 고민할 테지만, 아마 불가능할 거 다.
정면으로 승부해서 그놈을 꺾는 건, 거의 자살 행위에 가깝다. 적어 도 이 시점의 헌터들은 아직 많이 약하니까.
'하지만 나는 안다. 그 개자식을 죽이는 법을.'
내 스승님이 몸소 보여준 적이 있 으니까.
혜원 언니를 살린다고 전부가 아 니다. 중요한 건 '이 게이트에서 살아 나가는 것'이니까. 그러기 위해 선…… 결국 벨제부브 그 자식을 죽여야 했다.
* * *
톨룩의 존재가 밝혀지기 전이나 후나, 이 게이트는 아주 신비한 공 간으로 치부되었다.
그래서 이 게이트를 연구 대상으 로 보지 않고, 추앙하거나 불길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끝내는 그 신비함을 숭배하는 사이비 종교 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새하나교'가 있다.
흑마법사가 '인류의 배신자'라고 한다면, 반대로 톨룩에도 배신자가 있다. 이 경우엔 지구의 협조자라고 해야 할까? 자신의 동류들보다 지 구의 인간을 더 사랑해버린 괴짜.
통칭 '이계의 배신자'.
본명은 테오도르 어쩌구였지만 잘 기억은 안 난다. 줄여서 '테오'라고 불렀던 것만 안다. 어찌 됐든, 이 테오가 발견된 경로가 아주 재밌다. 이 테오는 게이트 안에서 죽어나가 는 인간들을 동정해 몇 가지 장치를 숨겨뒀다.
물론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숨겨 놓은 것이라 일반적인 경로로 찾긴 어렵지만, 특정 조건을 만족하면 클 리어에 큰 도움을 주는 아이템이나 힌트가 주어졌다.
이 게이트 안에도 '테오의 안배'가 숨겨져 있었다.
내가 아니라 스승님과 그 동료들 이 구한 것이지만, 대충 이야기는 들어 알고 있었다. 게이트 안의 게 이트라 해야 할까. 일종의 미니게임 같은 개념이라고 했다. 필드형이 아 닌 스테이지형이어서, 이입하는 척하느라 고생 좀 했다는 얘기도 들 었지.
스테이지형은 필드형과 다르게 보 스 몬스터가 제공되지 않고, 대신 깨야 할 '퀘스트'가 부여된다. 해당 목적을 이루면 클리어, 아니면 실패 인 거다. 이 스테이지형도 타임리미 트형, 세부 목적형, 생존형 등등 다 양하게 나뉘지만 그건 게이트 연구 자들이나 잘 알면 되는 거고. 헌터 는 다 필요 없이 클리어만 해내면 된다.
이 게이트 안에 있는 테오의 안배 가 있던 위치가 분명…….
"제가 갔던 곳이 어디인지 힌트가 생각났어요."
당연히 거짓말이다.
"그게 뭐지?"
진지하게 물어보는 전청운은 전혀 모르겠지만. 능청맞은 김기택이나 표정을 알기 어려운 순하랑보단 전 청운이 속이기 만만한 상대라, 첫 서두를 그에게 던졌다.
"창밖에서 분명 봤어요. 성당의 십
자가를요."
"십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전청운은 화색이 돌던 얼굴이 좀 시무룩해졌 다. 생각보다 도움 되는 정보가 아 니어서 실망한 듯했다.
이 게이트 안에도 성당은 수십 군 데가 넘으니, 그걸 다 뒤져볼 순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수색 범위가 단순히 성당에서 멈추지 않고, 그 성당 십자가가 보이는 구역으로 확 대되면 더 눈앞이 깜깜할 지경이다. 그 정도면 전수조사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러니 한 가지 힌트를 더 제공한 다.
"그리고 한강도요."
"한강이?"
이것만으로도 범위가 훅 줄어든다.
한강이 눈에 보일 정도로 가까이 있는 성당은, 아마 이 게이트 안에 많지 않을 거다. 곧장 김기택에게 이 내용을 전하자 그가 솜씨 좋게 도 후보군을 추려왔다. 천막에 옹기 종기 모여 앉았다. 정찰팀의 리더인 혜원 언니도 함께인 회의였다.
"당장 가볼 만한 거리에 있는 곳
은 이렇게 3군데 정도입니다."
지도에 하나, 둘, 세 곳이 표시된 다. 나쁘지 않은 거리였다. 그리고 다행히도 내가 원하던 성당도 있었 다. 물론 그곳이 나오도록 노렸지 만, 재수가 없으면 좀 더 헤매야 했을지도 모른다.
"괜찮네. 그놈의 저택이 겉으로 보 이는 종류일진 모르겠지만…… 시 간축이 뒤틀려있으니 잘 살펴보면 찾기 쉬울 거 같네."
혜원 언니도 얼굴에 화색이 돌았 다.
"아직 보스 몬스터를 우리끼리 클
리어할 수 있다는 확신은 없어서, 외부의 지원을 기다리려고 합니다. 그러니 수색을 위주로 움직이도록 합니다."
김기택이 차분하게 덧붙였다. 괜찮 은 선택이었다. 다만 지금도 회귀 전에 비하면 호화로운 구성인데, 여 기서 더 온다고? 싶긴 했다. 이 게 이트에 발 들여놓은 적도 없던 전 청운이 갑자기 클리어팀에 속해서 들어온 것도 의아했는데 말이다.
"각도가 어느 정도였습니까? 십자 가를 봤다고 했죠."
아. 이건 말하기 곤란하다.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직접 보면 알 수 있을 거예요."
내 목적은 그 성당이니까. 속내를 감추고 차분하게 말하자, 김기택도 무어라 더 첨언하지 않았다. 그저 내일부터 가장 가까운 상당으로 이 동할 테니 일찍 자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그 정도야 뭐.
"어쩐지 흉흉하네
방치된 성당은 꽤나 스산한 분위
기를 풍겼다. 몬스터의 습격으로 창 은 다 깨져있고, 바닥은 먼지와 유 리조각이 나뒹굴었다. 깨진 창문 틈 으로 햇빛이 은은하게 비쳐 드는데 그 빛무리가 예수상을 비춰 굉장히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자. 일단 들어왔는데, 뭔가 생각 나는 게 있습니까?"
기억나는 거? 그런 건 없다.
다만 이 테오의 안배에 들어가기 위해선 특정 조건을 발동해야 한다.
"……이상해."
나 대신 조연호가 미미하게 인상 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힐러, 그러니까... 고전적인 의미에서는 '성직자'에 가까운 그이니 아마 눈 치챘을 거다. 조연호는 성당 정면에 걸린 예수상을 가볍게 손으로 쓸었 다.
"신성력이 느껴져요."
"신성력이? 이 상에서?"
"네. 미약하지만…… 이 상 안에, 있는 것 같아요."
조연호의 말에 다들 서로를 바라 봤다. 아무리 세상이 뒤집어졌어도, 종교란 인간을 받치는 중요한 기둥 중 하나다. 물론 해당 종교의 교리 가 물건에 집착하지 말라고 되어있긴 했으나…… 타 종교의 상징물을 망가뜨리는 건 찝찝한 일이었다.
"부숴야겠네."
혜원 언니가 고요히 답했다.
내가 혜원 언니를 만났을 때 조연 호는 이미 명을 달리한 것 같았다. 그래서 확실히는 모르지만…… 이 곳에서 혜원 언니와 같이 상을 깬 인물이 그였을 듯했다. 신성력을 느 낄 수 있는 그가 지금처럼 함께했 겠지.
나는 주변을 잠시 둘러봤다. 나, 혜원 언니, 조연호, 김기택 그리고 전청운과 순하랑까지. 나머지는 이근방을 살피고 있거나 밖에서 망을 보고 있을 거다. 이 정도 인원이면 클리어할 수 있겠지.
"그럼, 깬다!"
혜원 언니가 발을 높이 들어 올렸 다. 그리고 힘을 줘 내려쳤고, 쿠 궁, 하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그러자 상이 기이하게도 재가 되 어 가루처럼 변했다. 순간, 다들 이 상함을 눈치챘으나 이미 늦었다. 석 고가루가 우리를 삼킬 듯이 거칠게 휘몰아쳤다.
"젠장! 다들 손잡아요!"
가루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귓가에 김기택이 가까운 사 람들과 손을 잡고 떨어지지 말라고, 홀로 있지 말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손을 제대로 휘둘러 보기도 전에 갑자기 모든 소음이 가라앉았다.
똑, 딱.
시계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 렸고. 슬며시 눈을 떴다.
[알■: 게■트에 ■■하셨습니다.]
[■용자를 확■합니 ■.]
[■■ '한서하(각성 ■)'■ 확인했습
니다.]
[시스■에 접속■니■』
잠시 오류가 난 것 같은 창이 떴 고,
[알림: 스테이지(나타롯샤 신학교) 에 입장하셨습니다.]
이윽고 시스템이 내가 어디에 있 는지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