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준비는 차근차근 진행됐다.
밤마다 숨어들어 의견을 나눴다. '리트의 기억'을 읽었다는 말은 굳 이 하지 않았다. 등장인물에게 과몰 입하기 시작했다는 걱정을 살까 봐. 달리아가 중요 인물이란 건 시스템 의 알림으로 다들 알고 있을 테니, 굳이 걱정을 살 필욘 없을 거다.
"성녀가 성기사들을 데리고 이쪽 으로 이렇게, 들어올 거야."
알음알음 모은 정보로 만든 지도 가 가운데 펼쳐져 있었다. 혜원 언 니는 그놈의 성녀를 맞이하기 위해 갖가지 재롱을 준비한다며 짜증 섞 인 소리를 냈다.
"살펴봤는데, 문을 지키는 성기사 들 실력이 만만치 않아. 숫자도 많 고."
이 폐쇄적인 커뮤니티를 둘러싼 흰 방벽. 그 방벽을 지키고 선 성 기사들이 있다. 싸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 정말 성기사일지는 모르겠지만.
"인질을 잡아야 해."
톡.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성녀를 상징하는 말이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수적으로 열세고 아이들이 죽어선 안 되니 인질을 잡아야 한다. 이 세계에서 성녀는 매우 중요한 인물인데, 차기 성녀가 등장하지 않은 시점에서 '유일한' 성녀는 천금보다 더 귀하다.
"아이들이 종교에 심취해서 우릴 따르려고 하지 않을 텐데요."
그래. 이것도 문제다.
이 미친 사이비 집단은 아이들을 죄다 흘려놔서, '가자!' 한다고 우릴 따라올 것 같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한 달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이 아이들을 설득해 사이비 종교에서 빠져나오게 할 자신도 없 었다. 정신계 고유 능력을 가진 사 람이나 가능할 거다. 최면이나 세뇌 같은 종류로.
"불을 지르죠."
순하랑이 나직이 내뱉었다.
"제 목숨이 아까우면 뛰쳐나가겠 죠."
"음……. 대부분은 그러겠지. 근데 끔찍한 고문도 감내하는 애들인데, 자기 목숨을 아까워할까?"
"중등부는 아직 그 실상을 몰라요. 뛰쳐나갈 애들이 많을 거예요."
고등부는…… 얼마나 제 목숨을 바칠까? 절반? 글쎄. 절반도 안 될 거다. 사이비 종교에 미쳐있다 하더 라도 불을 두려워하는 건 인간의 기본적인 심리다. 하지만 절반만 빠 져나간다 해도 문제다. 5명 미만의 사망자만 허락되니까.
"문 근처로 밀어 넣기만 하면, 제 가 바람 마법으로 밀어낼 수 있어
요. 발이 문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탈출'이니까요."
그 정도 조건이라면 할 만하다. 그 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순하랑이 최대한 많은 인원들 문 밖으로 밀 어낼 동안 성기사들이 손을 쓰지 못하게 시간을 버는 것이다.
"이 미친놈들은 성지 밖으로 나가 면 죄다 타락한다고 믿으니까. 성기 사들이 아이들을 죽이려고 들 수도 있어."
"다행인 점은, 사망자 조건에 성기 사나 목사들은 포함이 안 된다는 겁니다. '학생들'이라고 되어 있었
으니까."
그 자식들은 죽여도 문제가 없단 뜻이다.
달리아와는 그날 이후 좀 서먹한 사이가 됐다. 같이 수업을 듣고 밥 을 먹지만, 대화는 급격히 줄었다.
여전히 나는 신의 조각이니 그릇 이니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지 만, 그런 미신에라도 매달리고 싶은 아이들의 심정이 이해되지 않는 건아니었다. 리트와 달리 이곳의 아이 들은 대부분 가난한 평민 출신이었 다.
팔려가지 않으려고 탈출해 숙식을 제공해주는 이곳으로 찾아왔다는 아이, 입을 하나라도 덜기 위해 부 모가 이곳에 버렸다는 아이 그리고 굶어 죽기 전에 제 발로 이곳을 찾 아왔다는 아이까지.
그래서 더욱 황홀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성녀가 된다면 대단한 신분 상승일 뿐만 아니라, 하잘것없는 찌 꺼기 같은 자신이 온 세상에 영향 력을 미치는 은인이 되니까. 그건 분명 아직 어린 아이들에게 매력적인 제안이었을 거다.
성녀의 방문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화려한 행차가 열렸다.
흰색과 금색으로 장식된 마차 안 에 성녀가 면사포를 쓰고 얼굴을 가린 채 앉아 있었다. 창틈으로 살 짝 보이는 행색이 아주 고급스러웠 다. 그 주변으로 무장한 성기사들이 쫙 깔리고, 뒤를 따라 성녀를 보좌 하는 시녀들이 따라왔다. 시녀라고표현하는 게 맞을까. 이들도 기본적 으로 성직자의 행색을 하고 있었다.
수녀들이 고되게 연습한 악기 연 주 소리가 들렸다. 얼마나 닦달을 했는지 혜원 언니도 진저리를 치더 라. 학생들도 단정하게 차려입고, 성녀의 행차 좌우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품 안에 카람빗을 쥐고서 숨 죽였다. 신호가 울리면 모든 것이 시작이다. 폭풍전야. 모든 것이 실 행되기 직전에, 평화로운 시간이 흐 르고 있었다. 그 순간, 괴상한 소리 가 들렸다.
뿌우우우우!
혜원 언니가 곡조를 무시하고 제 악기를 크게 불었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큰 소음이 울렸다. 그 급작 스러운 상황에 성녀의 행차도 잠시 멈췄다. 웅성웅성. 무슨 일이냐고 속닥거리는 소리가 잠시.
콰아아앙!
쿠궁!
쿠구구구구!
"으아아악!"
"불이다!"
"불이야아아아!"
폭발음이 저 뒤에서 울렸다. 화르 륵, 불길이 치솟는다.
당황한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사 이 성기사들이 성녀를 피신시키기 위해 움직였다. 마차를 끌고 폭발이 난 곳과 반대로 움직인다. 어딜 가 려고.
'공간 간섭'
스킬을 발동하고 눈을 뜨자 나는 마차 안이었다. 눈앞에, 온통 흰색 으로 차려입은 성녀가 보였다.
"잠깐 실례할게요."
"무, 무슨……!"
목덜미에 카람빗을 댔다. 마차 한 쪽 벽을 발로 차 뻥 뚫었다.
"성녀님!"
성녀가 탄 마차가 망가지자 순식 간에 성기사들이 날 둘러쌌다. 그러 나 성녀의 목에 칼이 들이밀어진 것을 보곤 검을 뽑으려다 멈칫했다.
"칼 내려."
내 명령에도 머뭇머뭇하고 있었다. 칼 없는 성기사라. 아주 볼만할 거 다. 다시 한번 크게 소리쳤다.
"칼 내려!"
투둑, 툭.
금속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소음을 냈다.
나 이거, 혹시 천직인가? 납치범 너무 재밌는데? 성녀를 붙잡고 대 치구도를 만들자 성기사들 사이에 서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제일 앞으로 나왔다.
"원하는 게 뭐냐."
나는 씨익 웃었다. 원하는 거? 글 쎄, 뭘까?
"문을 열어."
"문?"
"저 문. 아주 활짝 말이야."
"무슨……! 아직 수행 중인 자가 저 문밖으로 나가면 타락한다는 걸 알 텐데?"
사이비 교리는 알 바 아니다. 타닥 타닥, 불씨가 번지면서 뒤에서 한바 탕 소란이 일고 있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이곳까지 불이 번질지도 몰 랐다. 그 와중에 성지니 타락이니 지껄이는 것도 우습다. 일단 사는 게 우선이건만. 하긴. 자기 목숨 아 니라 이거지.
"닥치고 문 열어!"
카람빗을 성녀의 목에 더 가까이
들이대자, 남자는 고민하는 시늉을 하더니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문을 열어라!"
"단장님!"
"그럴 순 없습니다!"
"문을 열어라. 성녀님이 먼저다!"
그 말에 부하들도 반박할 말을 잃 었는지 침묵했다. 이윽고, 드디어 거대한 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끼이이이익, 높이 솟은 벽들 사이 하나뿐인 탈출구. 늘 철통보안으로 가려져 있던, 하얀 성문이 기울어지 기 시작했다.
"밖...... 밖이다......!"
밖은 완전히 미지의 세상이었기 때문에 아이들도 놀라 술렁거렸다.
아직 불이 번지지 않아서 그런지 밖으로 나갈 생각은 없는 것 같았 다. 내가 문과 아이들을 힐끗거리자 성기사단 단장이 은근슬쩍 검을 내 려다보며 기회를 살폈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
"동작 그만. 어디서 밑장 빼기야?"
혜원 언니가 수녀복을 입은 채로 레이피어를 겨누었다. 단장은 칼을 주우려고 허리를 숙이다 엉거주춤 하게 멈출 수밖에 없었다.
성녀를 인질로 잡는 건 이 계획의 핵심이다. 나 혼자서 이 많은 인원 을 감시할 순 없지 않은가. 혜원 언니가 단장을 뒤로 밀치고 내 옆 에 섰다.
우리 둘이면, 할 수 있다.
기동력이 좋고 민첩해 성녀를 잠 깐 빼앗기더라도 금방 되찾아올 수 있다. 학생들 사이에 서서 순하랑이 바람 마법을 준비하는 게 보였다. 이대로면 얼빠진 채 이곳에 모여있 는 애들은 밖으로 내보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공연이나 시연 준비 때문에 빠진
애들이 있어.'
수가 많지는 않다. 스무 명 정도.
물론 이 부분도 이미 대책을 세워 두었다. 김기택이 지금쯤 열심히 돌 아다니고 있을 거다. 신부인 그는 수녀나 학생들보다 활동 반경이 더 넓으니까.
그리고 김기택의 고유 스킬, '복 사'.
10초 이상 신체 접촉 한 사람의 능력을 한 가지 복사할 수 있는 능 력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몬스터의 스킬도 복사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다재다능한 고유 스킬이었다.
그가 혜원 언니의 고유 스킬인 '공 중 부양'을 복제해 가져갔으니 기 동성은 말할 것도 없을 거다.
"..무모한 일을 하는군요..
가만히 있던 성녀가 입을 열었다. 목 앞에 칼을 겨누었는데도, 두려움 없는 목소리였다. 성녀가 쇠약하다 더니. 목소리를 들어보니 거의 노인 같았다.
하지만, 이번 대 성녀는 분명…… 고작해야 20대 후반일 텐데……?
그 순간, 순하랑의 마법이 발동됐 다.
머리 위로 커다란 마법진이 그려 지며 녹색 빛이 일렁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강력한 바람이 아이들을 열린 문틈으로 내몰았다.
"아아악!"
"안 돼!"
"타, 타락할 거야! 모두 오염될 거 라고!"
겁에 질린 목소리. 그러나 숙련된 마법사의 마법에서, 훈련도 받지 않 은 아이들이 벗어날 길은 없었다. 바람이 일자 불길이 더욱 거세게 치솟아 불티가 탁탁 튀었다. 슬슬 위험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불을 피한 것보단 당장 자신들이 성지 밖으로 나가 타락한 것에 큰 충격을 받은 듯했 다.
[알림: 목표를 131/148만큼 달성 했습니다!]
바람이 그치고 나서. 나는 성녀의 면사포가 그 여파에 휩쓸려 날아간 것을 눈치챘다.
" 당신......
고작해야 20대 후반이라고 들었던
성녀는…… 80 먹은 노인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하얗게 센 머리와 자글자글 주름 진 피부. 고운 비단옷을 걸쳤으나 검버섯이 핀 손을 감출 순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 인가?
"……놀라셨나요?"
" 조금은."
"신의 힘을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 의 육신으로 하기 버거운 일이지 요."
신의 조각 어쩌구 하는 게, 그냥 사이비 교단의 거짓말 같은 게 아니었다고?
"거짓말이라 생각하셨나 보군요?"
"당연하지……. 신의 조각이니 뭐 니 하는 그런 개소리를 어떻게.. 99
"신은 항상 우리와 함께하시지요. 당신 옆에도 있는데, 그 존재를 부 정하다니 요."
혜원 언니가 얼떨떨하게 말하자, 성녀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혜원 언니의 옆? 딱히 그런 걸 믿는 건 아니지만, 꼭 무당이 내 어깨 위에 누가 앉아있다는 얘길 한 것처럼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내 옆?"
"그래요. 제 목을 겨누는 이것도, 신의 조각이지요."
목을 겨누는 것? 카람빗? 이 카람 빗이 신의 조각이라고?
"무슨 소리야. 카람빗은 그냥 아이 템일 뿐인……. ……아이템?"
"아이템이라 불리기도 한다죠. 우 린 '신의 조각'이라 부르는 걸 선호 하지만요."
다정하게 웃는 낯이 소름끼쳤다.
아이템이 신의 조각이라고? 대체 왜 그런 교리가…….
-그로 인해, 문이 열리기 시작하 였고, 선택받은 힘을 가진 사람들이 태어나게 됐죠. 그곳에서 '신의 조 각'이 유래했습니다…….
수녀의 말이 순간 머릿속을 스쳤 다. '문', '선택받은 힘' 그리고 '신 의 조각', 그러니까 아이템이라 ……. 이거 완전히 게이트의 얘기 아닌가? 문은 게이트고 선택받은 힘이란 각성자나 헌터를 뜻하는 건 가?
"웃기지 마……, 우린 봤어. 너희
가 꼭대기 층에서 무슨 짓을 저질 렀는지. 그딴 짓이나 벌이는 사이비 교단 말을 믿을 것 같아!"
혜원 언니가 거칠게 몰아붙였다. 이들의 말대로면, 언니의 레이피어 역시 '신의 조각'이겠지.
"그 과정이 헛된 일인 것 같나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저 고문에 불과하다 생각하셨는지요?"
"그럼. 그 행위에 무슨 의미가 더 있지?"
"..어리석은 분들..."
성녀는 잠시 혀를 쯧쯧 차고는, 말 을 이었다.
"문이 열리고 세상의 끝이 가까워 지면서. 우리 교단은 신의 조각을, 신의 일부를 인간이 이식받는다면 얼마나 큰 힘을 얻을수 있을 지…… 연구하기 시작했지요."
"아이템을…… 인간에게 이식한다 고?"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하지만 시행착오가 많았어요. 육 체는 거부 반응이 일었고, 정신은 망가졌지요. 오직…… 영혼의 격을 높여야만, 비교적 부작용 없이 이식 에 성공할 수 있답니다."
그 결과를 알아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희생됐을까. 상상도 가지 않았다. 실실 웃는 성녀도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니까, 20대에 노인의 모습을 한 것도 그 부작용 중 하나인 건가?
"영혼의 격을 높이는 과정이 다소 잔혹하게 보였을지도 모르겠군요."
성녀가 눈을 휘며 방긋 웃었다.
"인간은…… 고통과 함께 성장하 기 마련이지요. 죽음에 가까운 위기 를 넘기면, 한층 고결해진답니 다……
낮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뱀 이 쉭쉭대는 것처럼 들렸다. 오싹,등골을 타고 소름이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