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보스 몬스터를, 제가 유인할 게요."
" 네?"
"무슨 소리지?"
다들 솔깃한 표정이었다. 그럴 만 도 하지. 이들이 들어온 지도 얼마 나 지났더라? 히든 게이트에서 한달하고도 조금 더, 그리고 나와서 2주. 히든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에 도 내 옆에서 날 감시하던 게 2주 정도…….
그러니까 이들도 이 게이트 안에 들어온 지 벌써 두 달도 넘었단 소 리다. 밖에 나가고 싶을 만도 했다.
"전청운 씨."
그가 고개를 들었다.
"절 찔러요."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주 깊숙이."
내 말이 끝나자마자 전청운이 김
기택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스테이지 이후로 정신 이 좀 이상한 것 같다."
완전히 정신 이상자 취급이었다. 김기택도 그 말에 부분적으로 동감 하는지, 흐음, 하고 콧소리를 냈다. 아니. 난 멀쩡하다니까 그러네.
"한서하 씨. 당신의 사고를 따라가 기 어려운 적이 한두 번은 아닙니 다만……
그는 스테이지 안에서 갑자기 내 가 불길 속으로 뛰어들겠노라 말했 을 때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니 면, 몬스터를 사냥할 때 틈이 보이면 순식간에 공간을 타고 이동한 걸 생각하려나. 어쩌면 위험하다는 그의 경고를 무시하고 혼자 늪지대 에 들어갔을 때인지도 몰랐다.
짚이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 곤란 하다.
"이번만큼은 전후 설명을 듣지 않 고 넘어갈 수 없겠군요. 설명해주시 죠. 만약 당신의 정신에 이상이 생 겼다고 판단되는 즉시 모든 활동에 서 배제할 겁니다."
차갑게 경고하는 말이 매섭다.
스테이지형 게이트는 인간의 정신 을 겨냥한 함정이다. 필드형이 육신의 붕괴를 꾀한다면 이 스테이지형 은 인간의 자아를 기묘하게 갉아낸 다. 이 두 가지는 톨룩이 지구를 침범하기 위해 만든 교묘한 술수들 이라고, 그렇게 추측하곤 했다.
그러니 김기택이 뭘 걱정하는지 안다. 게이트에서 나온 직후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횡설수설하 거나, 뜬금없는 말을 꺼내는 것은 '위험 신호' 중 하나다.
이것은 헌터 아카데미에서 아주 중요하게 교육하는 것들 중 하나다. 헌터의 정신상태 관리 말이다. 인간 은 아주 무른 존재니까.
"그 보스 몬스터는 절 장난감처럼 생각해요. 재밌는 장난감."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그랬어요. 자길 아주 재밌게 만들어줘야 할 거라고. 그리고 그자 가 보낸 몬스터를 떠올려봐요. '흰 꼬리칼날들쥐' 말이에요. 그때 그놈 이 꼬리로 절 찔렀을 때, 부위가 어디 였죠?"
"다리였지."
전청운이 받아쳤다. 맞다. 다리였 다. 기이한 일이지. 당장 제 뒤통수 에서 칼을 내려찍을 준비를 하고 있는 나에게, 그 꼬리로 다리를 공격한다? 그렇게 비효율적인 일이 어디 있는가.
"흰꼬리칼날들쥐의 습성은 알고 계시겠죠. 놈들은 그 칼날처럼 날카 로운 꼬리로 단숨에 사냥감을 반 토막 내는 걸."
"하지만 그때 칼날들쥐는 당신을 베지도 않았고 치명상을 입히지도 못했죠. 이상한 일이긴 합니다만."
두 가지나 본래 습성에서 어긋난 다. 베는 무기인 칼날로 왜 날 찔 렀는가. 그리고 왜 머리나 심장이 아니라 다리였는가. 이 두 가지 의 문점이 남는다.
"……그게 보스 몬스터의 명령이 었다고 생각하는 거군."
뒷말을 잇지 않았는데도 금세 눈 치챘다. 전청운이 일리가 있다는 듯 한 얼굴을 했다.
"그것 말고는 이유가 없죠. 제 신 체를 훼손하거나 죽이지 말라는 명 령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이 설명되니까요."
"그러니까 당신의 목숨이 위험해 지면, 보스 몬스터도 튀어나올 것이 다……
허황되게 들리겠지. 나도 안다. 대 체 어느 몬스터가 자기가 장난감처럼 여기던 인간의 목숨이 위험하다 고 친히 행차한단 말인가. 그런데 벨제부브는 그랬다. 내가 증명해줄 순 없지만, 정말로!
"너무 위험합니다. 그 가능성에 목 숨을 걸겠단 소립니까?"
"반쯤은요."
"반은 뭡니까. 뭐, 한서하 씨는 목 숨이 두 개라서 하나 떼 줘도 된답 니까?"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되묻는다. 어 쩌면 비슷하지 않을까. 난 두 번째 인생을 사는 중이었으니까. 이번에 죽으면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갈까?
아니면 다시 마트에서부터 3회차를 시작할까?
" 비슷할지도……
"뭐가 비슷하단 말입니까! 정신 차 리세요! 인간의 목숨은 하나니까 요."
대체로는 그럴지도.
"난 찬성한다."
"전청운 씨!"
"이 외에 우리가 매달릴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지? 그나마 제일 가 능성 있어 보이는데."
그가 이론적으로 옳은 소리를 냈
다. 김기택은 자신만 일반적인 윤리 관을 갖고 있는 거냐며 중얼거렸다. 게이트에서 윤리 따위를 찾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답지 않게 순진하 게 굴기는.
애초에 이들이 날 찾아오면서, 소 수의 희생을 통한 다수의 안전을 들먹이지 않았던가. 그래서 일반인 인 내 신병을 마음대로 보호하고 있는 거고.
이들은 게이트 클리어를 위해 내 목숨마저 희생할 각오를 해야 했다.
나 역시 내 목숨을 버릴 각오를 했으니까.
"저도 찬성이요."
"순하랑 씨까지……
순하랑은 가타부타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결국 김기택도 어쩔 수 없 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아마 그도 머리로는 알았을 거다. 일반론적인 정의나 신념과 무관하 게, 이것이 최선의 선택임을.
게이트에서 사람 하나의 목숨은 개미만도 못하지 않은가. 아깝게 여 겨선 안 된다. 그래선 게이트를 클 리어할 수 없다.
"보스 몬스터가 이 상황을 듣고 모든 걸 예상할 수도 있으니, 절
빼고 회의를 진행해주세요. 제가 눈 치채지 못하게, 모든 걸 진행해야 해요."
나는 살아있는 감시카메라이자 도 청장치니까. 그렇게 말을 남기고 김 기택의 천막을 빠져나왔다.
이렇게 해서 시기라도 모호하게 만든다면 성공 확률이 조금이라도 올라갈 거다. 그래도 실패한다 면…… 최후의 방법을 써야겠지만.
"뭐야. 네가 왜 거기서 나오냐?"
나오다가 우연히 마주친 조연호가 물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얼 버무렸다. 그는 영 찝찝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내 천 막으로 돌아와 자리에 누웠다.
이로써 나는 내 목숨을 온전히 저 들에게 맡겼다.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존재하는지,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날 위 협할지. 그 모든 것을 말이다.
'벨제부브라 해도 아이템 확인까지 하진 못할 거야. 그건 시스템의 영 역이니 간섭할 수 없겠지. 그리고 저 성배는 테오의 안배니까 검증하 고 넣은 아이템도 아닐 거고.'
그러니 벨제부브는 모른다.
성배의 부가효과, '성배 안에 아이
템을 넣어두면 비례하는 시간만큼 신성력이 깃들게 됩니다'를!
성배의 힘을 받은 무기가 얼마나 훌륭한 신성 무기가 될지. 벌써부터 기대될 정도였다. 지금까지 신성 무 기가 필요할 정도로 강력한 언데드 나 마족은 만나지 못했으니…… 절 대 예상 못할 거다. 그저 성배가 생산해내는 성수만 위협으로 여기 겠지.
이 방법은 예전에 혜원 언니가 썼 던 방법이다. 그때 미끼는 언니였 고, 칼을 꽂는 이는 나였다. 성배에 서 뽑아낸 성검을 그 머리통에 박 아 넣었다.
그 과정에서 혜원 언니는 죽고 말 았다.
어둠 속에서 홀로 눈을 떴다. 이번 에는, 기꺼이 내가 미끼가 되리라.
"제법 건방진 짓을 꾸몄구나."
붉은 어둠의 권속, 일명 마왕이라 불리는 자들 중 하나인 남자. 그가 차갑게 분노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누구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저들은 벨제부브를 보고 꽤나 놀란 것 같았 다. 그가 지나치게 인간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지능이 있는 몬스터나 인 간과 비슷한 행색을 한 몬스터는 만나봤겠지만, 벨제부브처럼 인간 같은 보스 몬스터는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벨제부브가 움직이지 못하는 내 뺨을 가볍게 쓸었다.
"무슨 일을 꾸미는가 했더니. 네 목숨을 담보로 잡아? 정말 날 몇 번이고 놀라게 하는군."
이 역겨운 손 치우라고 말하고 싶 은데 입만 뻐끔거리고 말이 나오질않았다. 덕분에 그가 내 뺨을 쓸다 못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걸 가만히 당하고 있어야 했다. 뭐 해, 전청운. 얼른 찔러버리지 않고.
"알면서도 속아주는 내게도 잘못 이 있겠지……
그렇게 말하면서 벨제부브는 소매 를 걷어 올렸다. 허리춤에 걸어두었 던 검을 뽑자, 전청운이 크게 놀라 움찔했다. 그러나 벨제부브는 신경 도 쓰지 않고, 칼을 제 팔뚝 위에 댔다.
결국 이 방법을 쓰는군.
벨제부브가 제 팔을 가볍게 베었 다. 주르륵, 핏줄기가 팔을 타고 흘 렀고 이내 뚝뚝 떨어져 내 입술을 적셨다.
그 즉시 충만한 마력이 내 몸 안 에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짓이지?"
전청운이 물었다. 늘 무표정했던 그가 드물게도 적대적인 낯을 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본디 고위 마족 의 피는 극진한 영약이니."
혜원 언니가 죽기 직전의 위기에
처하면, 이렇게 등장해서 제 피를 먹여 살려내곤 했었지. 하위 마족의 피는 독약과도 같지만 고위 마족의 피는 오히려 귀한 영약이 된다. 극 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성수를 들고 뒤따라오던 이들을 믿었던 것 같은데…… 그들은 이미 죽었다."
그 말에 다들 움찔했다.
최소한의 보호장치로, 일정거리 떨 어진 곳에 성수를 든 인물들을 배 치했던 모양이다. 그걸 다 알면서도 그냥 방치하지 않고 몸소 나타나다 니. 대체 무슨 생각이지?
충만한 마력이 몸 이곳저곳을 돌 아다니며 상처를 회복시키기 시작 했다.
내 마나의 최대치를 넘어서면, 이 들은 모조리 회복을 위한 에너지로 사용된다. 내 그릇에 넘치는 마나를 몸 안에 품고 있을 수 없기 때문이 다.
"그들을 죽이며 화풀이를 한 덕에 너희들이 아직까지 숨이 붙어있는 것이니 감사히 생각하는 게 좋을 것이다."
미친놈. 네 동료를 죽였다고 말하 는 주제에 뻔뻔하기까지 했다.
이 게이트 안에 있는 것은 투사체 라 본체보다 약하겠지만, 그의 본체 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강자일 것이다. 이전에는 혜원 언니의 죽음 이후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인류에게는 다행인 일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나섰으면 힘의 균형이 깨졌을 테니까.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강자였기 때문일까. 말투에서 오만함이 절로 새어 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절호의 기회였다. 내 상처가 극심한 만큼, 내게 피를 흘려주는 동안 그는 한 팔이 봉인 된 것과 같으니까. 그것을 저들도모르는 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벨 제부브에게 압도되어 움직이지 못 하고 있는 것이겠지.
그때 벨제부브의 머리 위에 마법 진이 생겨났다. 빠르게 제 형태를 갖추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빛의 화살을 쏘아냈다.
빛 마법!
마족들에게 치명적인 속성 마법이 다. 순하랑이 틀림없었다. 그녀의 스태프에 달린 보석이 영롱하게 제 빛을 내고 있었다. 마법사와 공명하 고 있다는 뜻이었다.
"귀찮게 굴지 마라."
그러나 벨제부브가 가볍게 손짓하 자 그대로 사라졌다. '격'이 다르다. 맞히려는 의도는 아니었는지, 빛 마 법으로 시선을 끈 사이에 전청운이 달려들었다.
_ 채
푸른 빛이 실린 검이 그대로 막혔 다. 검신이 온통 새까만 검이 그 상대였다. 벨제부브는 남는 한 손으 로 검을 들고 있었는데도 두 손을 쓰는 전청운과 대등하게 맞서고 있 었다.
"크윽……
전청운도 검의 화력을 올리며 더
욱 애를 써보지만 쉽지 않았다.
왼손은 나를 향해, 오른손은 전청 운을 향해. 벨제부브의 양손이 봉인 된 순간이었다.
"순하랑!"
김기택이 외치는 동시에 이번엔 벨제부브의 발밑에 마법진이 생겨 났다. 빠르게 솟아오른 촉수가 다리 를 부여잡는다. 아주 잠깐, 그 잠깐 의 시간만 벌어준다면 충분할 것이 다.
뒤로 물러나있던 김기택은 순식간 에 벨제부브의 앞에 섰다.
공간 간섭. 내게서 카피해간 능력
이다.
"흐아아앗!"
김기택이 기합을 지르면서 칼을 휘둘렀다.
오기 전에 성배에 일주일을 푹 담 가 신성력을 담아낸 검. 이 게이트 안에 존재하는 유일한 성검이었다.
〈신성한 숏소드〉, 벨제부브를 위 해 특별히 준비한 무기였다. 롱소드 보다 짧고 단검보다 긴 길이로, 빠 르게 휘두르면서도 어느 정도 리치 를 확보할 수 있기에 선택된 것이 었다. 그 숏소드가 지금 휘둘러졌 다.
"호오.…"
전청운의 검을 튕겨낸 벨제부브가 맨손으로 성검을 잡았다.
치이이이익-
신성력이 그의 몸 안에 있는 마력 과 충돌하면서 살이 익는 소리가 났다. 불판에서 고기를 굽는 듯한 소음이었다. 살갗이 벗겨져 붉은 속 이 드러났다. 치이익, 하얗게 뼈가 드러날 정도였으나. 그뿐이었다.
벨제부브에게 치명상을 입히진 못 했다.
김기택이 그것을 인식하고 빨리 다시 뒤로 빠지려고 했을 때. 김기 택의 눈동자에 푸른빛이 어리자마 자 벨제부브가 김기택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성검이 바닥을 굴렀다.
벨제부브는 가벼운 걸 들어올리듯 너무도 편안하게 손을 높이 들었다. 180이 넘는 성인 남성이, 허공에 붕 떴다. 컥, 커적, 하고 작게 바르 작거리는 소리가 났다.
"무슨 생각인가 했더니. 이런 수를 숨기고 있었어."
그는 재밌어 죽겠다는 것처럼 작
게 웃었다.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계획인지. 참으로 음흉하구나."
상황이 최악이었다. 나는 손가락을 작게 달싹거렸다. 몸이 움직일 정도 는 됐다. 싸우다가 상처가 터지면 어떨지 모르겠으나…… 성검은 바 닥에, 김기택은 허공에. 순하랑의 마법은 전혀 통하질 않고 전청운도 힘겨루기에서 밀린다.
투사체 주제에 질리도록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