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13조〉
203357 이운우
203498 김주일
320014 민달래
392117 한서하
멍하니 게시판을 응시했다.
내 이름이 지금, 누구랑 같이 적혀 있는 거지?
"와……. 13조는 좋겠다. 그 이운 우랑 같은 조네."
"진짜 개꿀 아니냐? 버스 승차감 오질 듯."
뒤에서 시시덕거리는 소리가 들렸 다. '이운우'에 대해서 조잘조잘 떠 드는 것이 다들 잘 알고 있는 유명 인사인 모양이었다.
"쟤랑 친해지면 청사 가입 가능?"
"당연하지
젠장. 청사의 이름까지 들려오니 더욱 명확해졌다. 이운우의 데뷔가 이쯤이었던가? 회귀 전 이때는 게 이트 안에 있어서 몰랐는데.
청사의 이운우! 모를 수 있을 리 가. 나랑 치고 박고 한 세월이 얼 만데.
그 이운우의 풋풋한 신인 시절이 라……. 상상이 가질 않았다. 청사 의 도련님이라 했을 때 바로 알아 채야 했는데. 내가 아는 그는 도련 님이라기보단 청사에 군림하는 왕 에 가까운 이미지였기에 바로 떠올 리지 못했다. 그는 날 때부터 헌터 일을 해왔던 것처럼, 무엇에도 능수능란하던 인물 아닌가.
-아아. 조를 확인한 수험생들은 지정된 곳으로 모이시기 바랍니다. 각 조별로 지정된 곳으로 모이시기 바랍니다!
마이크를 통해 공지가 흘러나왔다. 여러 번 다시 봤지만 글자가 바뀌 는 일은 없었다. 그래. 이번 조별과 제는…… 아주 거하게 망할 것 같 다는 예감이 들었다.
* * *
긴장한 채 지정 장소로 향했다. 문 앞에 서서 잠시 고민했으나, 이 상 황에서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은 없 었다.
"드디어 오셨네요. 마지막 한 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듣지 못한 지 꽤 됐지만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로써 13조가 모두 모였군요."
은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색채가 옅은 머리카락은 간혹 사람 을 흘리곤 한다. 그 사이로, 보라색 눈동자가 아롱거렸다. 이운우의 상 징과도 같은 독특한 색감.
'각성'이 간혹 이렇게 외형에 영향 을 주는 경우가 있다. 혜원 언니의 모래색 머리카락이나 전청운의 푸 른빛이 감도는 검은 머리도 비슷한 맥락이다. 하지만 이운우처럼 극단 적인 색 변화를 겪는 사람은 드물 다.
"전 이운우라고 해요."
내 기억보다 훨씬 앳된 얼굴의 사 내가 그곳에 있었다.
"민달래라고 합니다."
"김주일이요."
진중해 보이는 여자와 시큰둥한
인상의 남자가 뒤이어 자기소개를 했다. 나는 그제야 멍하니 이운우를 보던 것을 멈추고 내 소개를 꺼냈 다.
"한서하입니다."
"다들 모였으니 이제 이 미션지를 읽어볼까요?"
이운우가 한가운데 놓인 단상에서 미션지를 꺼내 들었다. 단상 위에는 '전원 모였을 때 열어볼 것!'이라고 적혀있었다.
그래서 날 기다렸던 거군.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 안 에 들어있을 내용은 뻔하다. 이 시험은 '게이트 출입'의 자격을 묻는 시험이니 게이트 안에서 얼마나 생 존할 수 있는가, 몬스터와 싸워 이 기거나 도망칠 수 있는가, 이런 요 소들을 평가하는 내용일 것이다. 그 리고 그런 요소들을 두루 갖춘 사 람을 가리는 데는…….
"……던전에서 일주일간 생존하시 오."
이런 미션이 가장 효율적이다.
"시작일이 다음 주네요. 그동안 정 비해서 오라는 것 같아요."
" 일주일이라……
고민에 빠진 얼굴들이다. 게이트가
생기기 전 파장을 감지해 미리 예 고하는 시스템이 생긴 이후로, 계획 하지 않은 각성은 그 수가 매우 줄 었다. 계획된 각성은 게이트 내부의 현실을 제대로 보여주기보다는 체 험활동처럼 변질됐으니. 제대로 된 게이트를 겪어본 사람은 적을 것이 다.
"다들 아카데미에서 배운 내용이 있으시죠?"
"네."
"물론."
"서하 씨는……?"
이운우가 대답하지 않은 내게 되
물었다.
"저는 아카데미 출신이 아니라서 요."
"아……. 그러시구나."
미묘한 어투. 이운우, 이 자식. 묘 하게 얌전하게 굴길래 어릴 땐 좀 착한가 했더니 속으로 재보고 있던 건가? 이운우의 태도가 변하자 나 머지 둘도 힐끗 날 바라봤다. 아카 데미 출신이 아닌 헌터 지망생은 요즘 흔치 않다.
따지자면 사교육 안 받는 고3 같 은 느낌이려나.
"그럼 뭘 준비해 와야 하는지 잘
모르시겠어요. 그래도 저희가 잘 알 려드릴 수 있으니……
"저는 연화도 게이트 출신이라서 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이운우가 입 을 다물었다.
"게이트 안에서 몇 달이고 생존한 경험이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실제로 게이트에 있으셨던 거예 요?"
"네."
"그럼 저희보다 훨씬 잘 아시겠어
요."
민달래가 밝은 어조로 잘됐다며, 뭘 챙겨야 하는지 알려달라며 이것 저것 물었다. 서늘한 인상과 달리 생각보다 붙임성이 좋았다.
반면 이운우의 표정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아마, 완전한 포커페이 스를 갖추려면 몇 년 더 지나야 할 거다.
"다행이네요. 경험자가 계시니 훨 씬 안심이 되는 것 같아요."
이운우도 낯빛을 바꾸고 내게 슬 쩍 웃었다. 청초한 얼굴이지만 저 뒤의 이면을 모를 내가 아니다.
회귀 전 이운우와 나는, 따지자면 같은 편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원수 에 가까웠다.
놈과 나는 정치적 입장이 서로 대 립했기 때문에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였다. 그 와중에도 밀려드는 톨룩 놈들을 상대하느라 수없이 등을 맞 대고 싸우기도 했고. 저 자식의 권 모술수라면 내가 훤히 꿰뚫고 있었 다. 저 여우 같은 놈을 상대한 게 몇 년인데.
이운우는 뛰어난 헌터이자 모략가 다.
정치적인 센스가 없는 내가 놈을
상대하면서 몇 번이나 뒤통수를 맞 고 또 맞았는지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밑바닥부터 시작해 끝내 청 사의 꼭대기까지 군림하는 대단한 인물이지만…… 내겐 고운 정보다 미운 정이 더 많이 든 존재다.
'등을 맞대고 싸운 만큼, 결국 내 동료긴 하지만.'
"그럼 각자 정비하고 다음 주에 다시 모이기로 하죠."
"그래요!"
"그럽시다."
상냥하게 미소 짓는 이운우를 바 라보다가 이내 선선히 수긍했다. 어차피 이젠 같은 조가 됐으니 누굴 탓할 것도 없었다. 이운우도 본인이 원하는 쪽으로 유도하는 수단이 다 소 교묘해서 그렇지, 본질적으로는 인류를 위해 싸운 영웅이다. 그의 본성은 착하다고 믿는다. ……아마 도.
"다녀왔습니다."
어색하게 인사하면서 집 안에 발 을 들였다. 혜원 언니의 집에 들어 가 살게 된 것도 벌써 일주일째다.
필기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들어갔 다가, 필기 합격 소식을 듣고 혜원 언니가 얼마나 기뻐해줬는지 모른 다. 당연히 붙었을 거라고 했지만 막상 합격했다 하니 감격스러운 모 양이다.
"왔어요, 누나?"
"응, 연원아. 혜원 언니는?"
"잠깐 길드에 일이 생겼다고 나갔 어요. 아마 늦지 않게 돌아올 거예 요."
"그래, 고마워. 저녁은 먹었어?"
"아직이요."
집에 혜원 언니는 없고 표연원뿐 이었다. 고3으로 한창 수험생이라 얼굴 보기 힘든데 드물게 집에 있 었다.
"들어올 때 저녁거리 사올 걸 그 랬네."
"아니에요. 어제 남은 찌개도 있 고. 누나도 저녁 아직 안 먹었죠? 같이 먹어요."
나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표연원은 내가 조금 어색 한 듯이 굴었지만, 내게 그는 한없 이 익숙한 존재였다. 회귀 직전에도 참전하지 말라며 애원하는 그를 뿌리치고 나갔었는데……. 그때는 전 쟁에 미쳐서 많은 것들을 뒤돌아보 지 못했다. 당장 표연원만 해도 그 렇다.
어린 나이에 혜원 언니가 죽고, 대 신 길드장 자리를 떠안았다. 내가 보좌하긴 했으나…… 나도 행정 업 무는 젬병이라 도울 일이 많지 않 았다. 길드장 역할 중 힘은 내가, 지략은 표연원이, 이렇게 나눠서 수 행하는 느낌이었다.
'많이 고생했는데……. 나도 많이 챙겨줬고.'
나는 내 몸을 아끼는 법을 몰라서
항상 표연원이 잔소리하며 챙겨주 면 그제야 듣는 시늉이라도 했었다.
그는 항상 상냥했지만, 아마 끝도 없이 괴로운 날들도 많았을 거다.
오로지 게이트에 집착하는 날 보 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번에는 좀 더 많은 것들을 눈에 담아야지.'
지난 생은 너무 근시안적으로 살 았다. 분노에 눈이 돌아가 더 그랬 겠지.
여러 가지 잡생각을 하며 옷을 갈 아입고 간단히 씻었다. 다시 1층으 로 내려오니 표연원이 가볍게 저녁상을 차리고 있었다. 이런.
"내가 준비해도 되는데……
"아니에요. 오늘 실기시험 보고 오 지 않았어요? 힘들 거 같아서 그냥 제가 했어요. 별거 하지도 않았는데 요."
"아, 실기는 다음 주에 치게 됐어. 오늘은 그냥 사전에 미리 모인 거 고."
"그래요? 조별과제라고 들었는데, 같은 조 사람들은 좀 어때요?"
으음…….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내가 회귀 전에 알던 놈이 하나 끼 어있는데, 걔가 머리 굴려서 뭐든자기 마음대로 조종하려 드는 놈이 라 걱정된다고?
"……그냥 그래. 서로 인사만 해 서. 아직 잘 모르겠어."
이 정도 대사가 적당할 것 같았다.
"그리고 아마 일주일쯤 걸릴 것 같아."
"그렇게 오래요?"
"게이트에서 살아남을 줄 아는지 테스트하는 거니까."
시간이 부족해 일주일이지, 사실 한 달을 준비해도 부족하다. 물론 그마저도 못 해내는 사람들이 수두룩하지만.
"..게이트에서요."
표연원이 말끝을 미묘하게 어물거 렸다. 아차. 내가 배려심이 없었다.
그는 제 누나를 게이트에서 잃을 뻔하지 않았던가.
"응. 근데 괜찮아. 별일 없을 거 야! 어차피 다 감시하고 있고 목숨 이 위험해지면 강제로 시험을 종료 시키니까."
"그럼 다행이네요."
표연원은 그제야 살짝 웃었다.
* * *
일주일이 지나고, 나는 생존에 필 요한 물품들을 챙겨 약속된 장소에 나갔다. 하나둘 모여들자 정각이 되 기 30분 전인데도 4명이 모두 모였 다. 헌터 시험인데 이 정도 준비성 은 필요하지.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꼰대처럼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아 직 세상은 평화롭지 않은가. 이런 때에 스스로를 더 발전시켜야 훗날 전쟁이 도래했을 때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들어가면 야영할 장소부터 찾아 볼까요?"
"그게 좋겠어요."
"그러고 보니 다들 희망 포지션은 어떻게 됩니까?"
김주일이 가볍게 물었다.
"탱커 지망이요."
민달래가 먼저 대답했다. 작은 체 구에 방어구를 주렁주렁 달고 왔을 때 대충 눈치채긴 했다. 당연한 말 이지만 탱커는 덩치가 크고 육중할 수록 유리하다는 관념이 있다. 보통 그런 이들이 각성할 때 방어 수치가 높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달래가 탱커 를 지망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굳이 캐물을 것은 아니었다.
"저는 검사요. 쌍검을 쓰고 있죠."
김주일이 허리춤에 매달린 검 두 자루를 보여주며 말했다. 쌍검이라. 잘 쓰면 일반 검보다 훨씬 변화무 쌍한 공격이 가능할 것이다. 못 쓴 다면 방어구를 들 손을 낭비하는 셈이겠지만.
"일단은.. 거너라고 하죠."
지금 내 무기는 총이었기 때문에, 거너라고 둘러댔다. 초면인 이들에게 고유 스킬을 밝혀서 좋을 것 없 었다. 애초에 지금은 공간 간섭 스 킬이 공격용이라는 인식 자체가 드 물기도 하고.
"저는 마법사입니다."
"들은 적 있어요. 마법 재능이 탁 월해서 청사에서 재빠르게 모셔갔 다던데요?"
"과찬이죠. 아직 부족한 실력입니 다."
가볍게 웃으며 손을 내젓는다. 당 연한 말이지만, 저건 그냥 하는 말 이다. 이운우의 마법 재능은 가히 전무후무할 지경이 었으니까.
재능 하나로 청사 길드장의 눈에 든 수준이니 말 다 했다. 전국에서 갖은 재주꾼들을 다 봤을 그 남자 를 사로잡을 정도면 얼마나 찬란하 게 빛나는 재능이란 말인가.
"그럼 대충 정해졌네요. 민달래 씨 가 제일 앞에 서 주시고, 그 옆이 나 뒤에 김주일 씨. 그 뒤에 저랑 한서하 씨가 서면 될 것 같아요."
"밸런스가 맞게 조가 짜여서 다행 이군요."
아마 시험관 측에서 적당히 조정 했겠지. 내 등록 무기가 총이라 원 거리 딜러로 생각한 모양이다. 굳이따지자면 원거리, 근거리 둘 다 가 능하지만…… 그래도 근거리에 가 깝지 않을까 싶은데. 나는 허리춤에 예비용으로 달고 있는 카람빗을 슬 쩍 쓰다듬었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시간 이 정각을 가리켰다.
- 잠시 후, 던전에 입장하시겠습니 다.
어떤 던전인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눈을 뜨면 살아남기 편한 곳이길 바랄 뿐이다- 10, 9, 8, 7…….
그러다 번뜩 머릿속에 한 가지가
스쳐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회귀 전에…… 이운 우가 헌터 시험 응시할 때 사고가 나서 죽을 뻔했다고, 그러지 않았던 가……?'
- 3, 2, 1.
[알림: 게이트에 입장하셨습니다.]
[사용자를 확인합니다.]
[개체 '한서하(각성자)'를 확인했습 니다.]
[시스템에 접속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