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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시작이 게이트라곤 안 했잖아요-37화 (37/361)

37화

"내가 이 헌터 시험을 맡은 지도 벌써 20년이 넘었는데 말이야……. 너희 같은 천방지축들은 처음이라 아주아주 애를 먹고 있어!"

1세대 헌터, 리빙 레전드. 그야말 로 헌터 역사에 길이 남을 사람이 건만. 그가 헌터 시험의 총책임자라 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시험으로 쓰이는 던전 곳곳에는 내 '눈'이 심어져 있지. 그래야 속 속들이 들여다보고, 아주 정확하게 점수를 매길 수 있었거든. 한 사람 이 점수를 매기는 것만큼 공정한 일이 어디 있나. 안 그래? 또 나만 큼 정확하게 보는 놈들도 없어! 죄 다 노안이 온 건지, 원. 눈알이 두 갠데 하나씩만 달고 다니는 것처럼 군단 말야. 에잉, 쯧."

그는 바퀴달린 의자를 돌돌 굴려 한 바퀴 빙 돌았다. 소름이 돋는다. 한눈에 다 담기도 버거울 정도로 많은 이 모니터들을, 전부 한 사람 이 관리하고 있다고? 게다가 각자그곳에서 나오는 정보를 정리해서 점수를 매기기까지 한다고?

그야말로 괴물 아닌가.

"각설하고. 너희가 떨어진 그 '여 왕개미의 방'. 거긴 내 눈이 닿지 않는 곳이라서 문제가 생긴 거야. 그제일안쪽 방까지 다이렉트로 떨어지는 함정이 있을 줄 누가 알 았겠어! 응? 나도 전혀 몰랐지! 아 무도 몰랐고!"

"회장님."

"으응? 어어. 그래. 본론은 그게 아니지."

옆에 가만히 서 있던 남자가 눈치

를 주자, 최석철이 그제서야 주섬주 섬 뭔가를 꺼내들었다.

"이건 뭐죠?"

"계약서."

받아들자, 정말로 계약서라고 쓰여 있었다.

"이대로면 자네들도 곤란하잖나. 채점할 수 없는 시험지를 통과시킬 순 없는 노릇인데…… 그렇다고 우 리의 과실로 합격할 만한 인재를 떨어뜨리는 것도 안 될 일이지."

그가 씨익 웃으며 자신만만하게 말을 꺼냈다.

"자네들의 기억을 읽겠네! 내가 들 여다보지 못하는 것은 거의 없거 든."

터무니없는 소리다. 기억을 읽어? 그런 게 가능하다고?

나도 모르게 멍하니 그를 바라봤 다. 천리안 최석철이라더니, 정말 그런 것까지 볼 수 있단 말인가?

"계약서는 그에 관한 내용이야. 완 벽하게 정해진 부분만 읽기는 나도 어려운 일이니, 시험 외의 기억을 읽게 되더라도 절대 발설하지 않겠 다는 내용. 그리고 자네들도 시험을 위해 기억을 제공하는 데 동의한다

는 내용이지. 어떤가. 이게 내가 제 안할 수 있는 최선일세. 마음에 들 지 않는다면 보상금을 받고 하반기 에 다시 도전하게나."

그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우리의 과실로 일이 복잡하게 된 점 미안하게 생각하네. 다른 보상을 원한다면 최대한 편의를 봐주도록 하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다. 흐음.

계약서의 내용대로라면, 기억을 읽 히더라도 상관은 없다. 하지만 마음 에 걸리는 점이 있다.

'내 회귀 전의 기억도 읽힐 수 있

는가?'

그것이 쟁점이다. 회귀 전의 내용 을 최석철이 읽을 수 있을까? 읽게 된다면, 그는 그걸 믿을 수 있을 까? 내 기억이 육신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영혼에 새겨진 것이라면. 최 석철은 육신의 것을 읽는가, 영혼의 것을 읽는가. 그도 아니면 단순히 뇌의 화학작용을 읽는가.

'하지만. 읽힌다 해도 나쁠 것은 없다.'

그는 훌륭한 인적 자원이니. 미래 의 위험을 읽고 나와 협력한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전 좋아요."

"저도 괜찮아요."

우리 둘 다 긍정의 의사를 내뱉었 다. 나와는 달리 이운우는 몹시 내 키지 않는 기색이었지만.

"그럼 자네 먼저 이리 와봐."

그가 이운우를 불렀다. 굉장히 꺼 림칙해 보이는 기계를 가리킨다.

치과에서 볼 법한 의자에, 반구형 의 모자 같은 게 있었는데 그 위로 연결된 수많은 전선들이 몹시 불길 해 보였다. 저걸 머리에 쓰고 저 의자에 앉기만 해도 공포영화에 등장할 자격이 충분할 것 같다.

"보기엔 저래도 아주 안전하니까 걱정 말고!"

그다지 믿음직스러운 말은 아니었 다.

이운우는 결국 의자에 앉아 얼굴 을 코끝까지 가리는 모자를 머리에 뒤집어썼다. 한 30년은 더 미래에 가까워진 분위기가 됐다. 그러자 최 석철은 그 맞은편에 있는 기계로 향했다. 그 역시 비슷한 모양의 기 계를 머리에 썼고, 이윽고 불빛이 삑 들어왔다.

"……되고 있는 건가요?"

"네. 물론이죠."

옆에 있는 남자에게 묻자 그가 태 연하게 답했다. 겉보기에는 둘 다 그냥 앉아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말 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운우 쪽에서 움찔, 하고 움직이더니 바들바들 떨 기 시작했다. 발작이라도 일으키는 것처럼.

"걱정하지 마십쇼. 정상적인 반응 입니다."

내가 물어보기 전에 남자가 먼저 선수를 쳤다. 아니, 저게?

이윽고 최석철이 먼저 기계를 벗 었다. 옆에 놓았던 선글라스를 다시 끼면서, 특유의 짓궂은 미소를 입가 에 건다.

"재밌는 구경을 했어. 여왕개미라. 오랜만에 현장에 선 것처럼 말이야. 아주…… 아주, 그리운 느낌이었 네."

그가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는 것 처럼 말했다. 곧이어 이운우도 기계 를 빼냈다.

헐떡이며 숨을 몰아쉬는 것이 영 정상은 아닌 듯했다.

"……인체에 무해한 거 맞죠?"

"네. 물론이죠."

이 남자의 말에 영혼이 없다.

"헉……허억……. 방금, 그건……

"아아. 별거 아니네. 기억은 말하 자면…… 그래, 막연히 추상적이라 기보단, 생각보다 물리적인 것에 가 깝다고 할 수 있지."

최석철은 식은땀을 흘리는 이운우 를 익숙한 듯이 바라봤다. 저 기계 에서 저 꼴을 당한 사람이 한둘이 아닌 모양이다.

"내가 보고 싶은 건 아주 약간 되 감은 기억인데, 모든 기억은 유기적

이고 서로 연결되어 있거든. 그것들 이 얽혀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아를 형성하는 거라서 말이야. 근데, 기 억에도 일종의 '중력'이란 게 있어. 이건 어디까지나 내 표현이지만."

기억에 중력이라? 아주 뜬금없는 소리 같았다.

"그래서 난 아주아주 가벼운 기억, 바로 하루 전의 기억만 보고 싶었 는데…… 중력이 강한 것에 자연스 럽게 끌려가듯이, 아주 인상 깊고 그 개인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기억으로 흘러들어가게 되는 법이지.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야. 모든 것에는 경중이 있기 마련이니

까. 중력이 강한 쪽으로 끌려가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그래서. 그게, 그게 내…… 가장 무거운 기억이라고요?"

이운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뭘 본 건지. 아주 창백한 얼 굴이었다.

"걱정 말게. 계약서에 따라, 나는 입도 벙긋하지 않을 테니."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럼 다음! 얼른 끝내버리자고. 내 퇴근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

몸에 힘이 풀린 채 거의 끌려나오

다시피 기계를 벗어나는 이운우를 보면서, 나는 속으로 골똘히 생각했 다. 과연 내게 가장 인상 깊은 기 억은 무엇일까? 나를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기억은?

"너무 걱정하진 말고. 지나치게 깊 은 곳까지 가기 전에 내가 멈출 테 니까."

그것 참, 믿음직스럽기도 해라. 나 는 천천히, 불길한 기계를 머리에 뒤집어썼다.

시야가 어둠으로 막히고 점점 몸 에 힘이 빠졌다.

정신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 * *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다시 여왕개미의 방에 있었 다. 허공에 등등 뜬 채로.

' 뭐지?'

손을 내려다보니 반투명하게 보였 다. 일종의…… 사념체 같은 형상인 것 같았다. 내 기억을 이렇게 본다 고?

아래는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

었다.

"……일단 캐스팅 시작해!"

"움직이는 대상을 맞추는 정확도 는 떨어져. 마나 낭비야!"

"내가 붙잡아 볼 테니까 일단 캐 스팅부터 해!"

"네가 무슨 수로!"

이운우가 거칠게 외쳤으나, 저 아 래에 있는 나는 전혀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덤덤한 얼굴로, 날 아오른 여왕개미를 바라보며 소리 친다.

"부화하느라 에너지를 많이 소비

했을 거야. 승산이 있어!"

"……최대한 오래 붙잡아. 그래야 우리가 살 확률이 높아지니까."

그러고 나서, 갑자기 몸이 붕 뜨는 느낌을 받았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되감기고 있는 거야.'

시간이, 내 기억이 역으로 재생되 고 있었다. 비디오테이프를 돌리면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는 것처럼. 뭔가 뭉텅이진 것들이 나를 통과해 지나가는 듯한 감각만이 남았다. 잠 시 감각이 제대로 돌아왔을 때는.

"……내가 얼마나 누워있었지?"

"하루 정도."

"다른 개미들은?"

"아직 못 봤어요."

"다른 이들과 연락은 되나?"

"저기 빠졌다 나왔더니 휴대폰도 무전기도 먹통이에요."

갓 깨어난 이운우가 내게 이것저 것 묻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돌변 한 모습에도 전혀 당황스러운 기색 이 없었다. 그야, 난 원래 그 모습 을 알고 있었으니.

조금 더 시간이 돌아갔다.

"서하야. 우리 집에 같이 갈래?"

" 네?"

아주 기뻤던 순간과.

"……보스 몬스터를, 제가 유인할 게요."

목숨을 내걸었던 순간들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어디까지 돌아가려는 거지? 벌써 여왕개미의 방은 한참 지나갔는데.

"날, 죽여줘……. 리트……

불쑥 그 대사가 들려왔다. 노인의 형상을 한 달리아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내뱉는다.

"고통 없이…… 가게 해줘……. 제

푸욱! 피가 튀는 듯한 느낌이 들 었다.

손을 뻗어봤으나 닿지 않았다.

감상에 젖어있을 시간이 없었다. 시간은 아직도 되감기고 있었다.

"……혹시 불 무서워해요?"

"네……?"

그리운 얼굴들이 흐려졌다. 그러고 보니 실내체육관 사람들은 잘 있을 까? 그때는 살기에 급급해서 서로 이름 말고는 잘 몰랐다. 그러니 다 시 찾을 방법도 없었다. 뭐, 찾는다해도 난 잠시 머물렀다 떠난 사람 으로 기억되겠지만.

이번엔 아주 오랜 시간이 되돌려 졌다.

한참을 빈 공간에서 서성거렸다. 이게 최석철이 말한 걸까? '중력'에 의해 빨려 들어가는 것?

정신없이 뒤섞이던 배경들이 멈췄 다. 익숙한 배경이었다. 연화도 게 이트. 그 안에서도, 실내체육관 부 근이다. 앳된 인상의 내가 홀로 주 변을 걷고 있었다. 깜깜한 밤에.

허리춤에 단검 대신 매고 있는 물 건을 보았을 때. 그제서야 알 수있었다.

회귀하기 전의 나다. 회귀하기 전,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게 이트에 휘말린 나였다. 마트 사람들 은 죄다 죽고 도망치듯이 빠져나와 실내체육관에 겨우 몸을 맡긴 채로. 매일 밤 내일 하루 살아남길 기도 하며, 알 수 없는 불안감과 공포심 에 벌벌 떨던 나였다.

"이 정도면……

어린 내가 작게 중얼거렸다. 안색 이 아주 창백했다. 주변을 수시로 두리번거렸다.

능숙한 몸놀림으로 나무에 올라탔

다. 몰래 빼돌린 밧줄을, 콘크리트 바닥을 뚫고 나온 나무에 걸었다.

서툴게 매듭을 지었다. 이대로 목 에 걸고 떨어지면 모든 것이 끝난 다.

"하.…" 하아......

긴장감이 서렸다. 하지만, 이 지옥 같은 곳에서 앞으로 얼마나 더 버 텨야 할지 알 수 없다는 절망감에. 더 버텨봤자 결국 몬스터들의 밥이 될 게 뻔하다는 암울한 전망에. 결 심한 표정으로 밧줄을 꽉 쥐었는데.

"얘, 너 괜찮니?"

아.

그래. 이때였다.

찬란한 달빛 아래로, 모래색 머리 카락이 금발에 가깝게 빛났다. 전혀 놀랍지 않은 표정으로. 막 목숨을 끊으려는 어린 여자아이한테 태연 하게 말을 걸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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