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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시작이 게이트라곤 안 했잖아요-38화 (38/361)

38화

"나도 별로 상관하고 싶진 않은 데……

"그럼 그냥 지나가세요."

날 선 어투로 대답했다. 피로에 젖 은 얼굴이었다.

"어차피 이 안에서 사람 죽는 거 흔한 일이잖아요. 그냥, 못 본 셈

치고 지나가요."

반항심이 서린 말투였다.

"으음〜, 곤란하네. 내 동생쯤 되어 보이는데……

다 들리도록 작게 중얼거리더니, 밝게 웃는다.

"그래! 이렇게 할까? 나랑 내기하 자. 내가 이기면 넌 내 옆에 있는 거고, 네가 이기면 네가 원하는 대 로 그냥 지나갈게."

"무슨 그런……

"어때? 사실 그냥 네 말 안 듣고 당장 기절시켜서 끌고 가는 방법도

있지만, 최대한 인도적인 방법으로 널 회유하고 싶어서 그래."

반쯤은 협박이란 소리였다. 참. 혜 원 언니도 저때 무서운 소릴 아무 렇지도 않게 했다. 어차피 내게 선 택의 여지는 없었다.

"……무슨 내기인데요."

"그러게. 뭘로 할까? 으음……

고민하는 기색을 보인다. 맞아. 이 런 일이 있었지.

"그래! 정정당당하게, 운에 맡기기 로 하자!"

주머니에서 동전을 하나 꺼낸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500원짜리 동 전이었다.

"숫자가 나오면 내가 이기는 거고, 학이 나오면 네가 이기는 거야. 어 때?"

"……좋아요. 대신 반대로 해요. 숫자가 나오면 내 승리인 걸로."

그래도 의심해 보겠답시고 반대로 하자고 제안하기도 했지. 지금 보니 참 풋풋한 시절이었다.

"좋아. 그럼……얍!"

핑!

허공에서 동전이 헛돈다. 빙글빙

글. 그 궤적을 따라 시선이 따라 올라갔다. 그리고 동시에, 혜원 언 니가 둥실 떠올랐다.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허공에서 동전을 낚아채고 바닥에 쾅! 내리 꽂았다. 살벌한 타격음이 들렸다.

"짠! 학이다! 내가 이겼네."

어이가 없어서 입만 벙긋거린다. 아, 저때의 그 골 때리는 기분. 얼 마나 어처구니가 없던지. 나도 모르 게 지금도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이게 뭐야. 장난해요?"

"왜? 중간에 개입하지 말란 법은 없었잖아. 어쨌든 학이네! 얘, 너

어디 사니? 생존자들 어디 있는지 안내 좀 해주라."

뻔뻔하기 짝이 없어서, 어린 나도 허참, 하고 중얼거린다. 하지만 생 긋 웃고 있는 그 모습에 무어라 토 를 달 순 없었다. 어차피 날 모르 는 척할 생각 따위 전혀 없었으니 까.

"후……. 따라와요."

별말 없이 뒤돌았다. 그 왜소한 등 에 혜원 언니가 따라붙었다.

혜원 언니가 조잘조잘 떠드는 소 리가 아득히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내 인생이 달라진 것도저때였다. 혜원 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대로 영영 일어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지금 이렇게 두 번째 삶을 누릴 기회도 없었겠지.

"근데 너 이름이 뭐야?"

"한서하요."

"난 표혜원이라고 해. 역천 길드 길드장인데. 역천 알지?"

"모르는데요."

"뭐어?!"

그리운 수다를 뒤로하고…… 또다 시 꿈결 같은 흐름에 몸을 맡기려 는 찰나.

흐름이 정반대로 바뀌었다.

역으로 흐르던 것이, 순식간에 정 방향으로 흐른다.

왜? 갑자기? 자연스럽게 거꾸로 흐르던 것을 거슬러 어딘가로 끌려 들어간다. 이게 바로 그 '중력'이란 걸까? 어떤 기억이길래 자연스러운 흐름마저 거스르고, 날 이토록 강하 게 잡아당긴단 말인가.

이윽고 알 수 있었다.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는 바닥. 그 리고 처절한 몰골의 나. 내 품에 안긴, 검에 찔린 채 눈을 감은 혜 원 언니. 그리고…… 그런 우리를넋을 놓고 바라보는 표연원.

아.

이것을 보여주는 길목이었구나.

'경중'이란 그런 것이었어.

그 깨달음과 함께, 물속에서 한참 을 있다가 밖으로 내동댕이쳐진 것 과 같은 충격이 들었다. 얼굴에 찬 물을 확 끼얹은 듯한 느낌.

"허억!"

그 외마디 비명과 함께, 나는 현실 로 돌아왔다.

내 몸이 치과 의자 같은 것에 뉘 여 있었다. 아. 맞아. 최석철. 헌터시험. 그랬지.

"썩 유쾌하진 못한 여행이었나 본 데."

최석철이 몸이 굳은 날 대신해서, 내 기계를 빼내어줬다. 갑갑했던 것 이 확 풀리면서 숨 쉬기 편했다. 식은땀이 공기 증에 드러나면서 찬 기운이 들었다.

"자. 이걸로 전부 끝났다. 수집한 기억을 바탕으로 채점해서 결과는 일주일 뒤에 나올 테니 그때 확인 하고."

최석철도 내가 본 걸 봤을까? 그 는 회귀 같은 건 모를 테니 이번에있던 연화도 게이트에서 있었던 일 인 줄 아는 걸까? 태연하게 말을 꺼내는 그는 마치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 같았다.

천리안의 최석철에게 이런 일은 익숙하다 이건가?

너무 많은 것들은 보아온 사람이 라서?

아니면…… 회귀 전의 기억은, 보 이지 않은 건가? 나만 본 걸까?

그러나 최석철의 표정은 고요해서 그런 충격적인 사실을 눈치챈 사람 같지는 않았다. 숙련된 헌터이니 단 순히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것일 수도 있지만…… 섣불리 그가 봤다, 못 봤다 판단하긴 어려웠다.

'다음에 만나면 한번 떠봐야겠어.'

일단은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회귀 전에 그는 헌터시험 총책임 자도 아니었고 행방이 묘연했지만, 이번에는 좋은 전력으로 쓸 수 있 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둘 다 고생이 많았네. 아직 헌터 자격도 없는 애송이들이 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잘해줬어. 변이종 여왕개미라……

"긍정적으로 검토해주셨으면 좋겠 네요. 저희 길드장님께서 절 워낙

아끼셔서. 험한 일을 겪는 걸 좋아 하지 않으시거든요."

이운우가 은근한 협박을 곁들였다.

"네 길드장? 누구. 전서호, 그 녀 석?"

안타깝게도 1세대인 최석철에게 지금의 길드장들은 한 세대 아래라 씨알도 안 먹힐 소리였다.

"그 자식 얼굴 못 본 지 오래됐네. 잘됐다. 네가 가서 말이라도 전해 라. 막걸리 한잔하러 오질 않어. 배 은망덕한 것들."

완전 애 취급이다. 청사의 길드장 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최석철 말고 얼마나 될까.

"이만 가봐! 나도 퇴근할 거니까!"

정신 차려보니 우리는 반쯤 내쫓 긴 상태였다. 현실감이 없었다. 시 험이 끝났고, 돌연변이 여왕개미를 죽였고, 마지막으로 최석철을 만나 기억까지 털리고 왔다고? 이 모든 게 일주일도 안 되어서 다 일어난 일이라?

"……난, 이쪽으로 가는데."

이운우에게 슬쩍 말을 꺼냈다. 어 설픈 고등학생처럼. 안녕, 그 한마 디를 나누기 위한 어색한 서두였다.

"……난 반대쪽."

그도 짧게 답했다.

"그래. 잘 가고. 합격해서 보자."

어차피 이 시험을 합격해도 합격 자들을 위한 연수가 따로 열리니까. 게다가 최석철의 반응을 보면 우리 의 성과를 높게 평가하는 것 같았 고.

그럴 만도 하다. 애초에 헌터는 게 이트를 클리어하기 위한 존재니까. 두루마리를 찾는 것보다 던전을 클 리어한 쪽에 더 가산점을 준다 해 도 그럴듯한 법이다.

"한서하."

이운우가 막 지나가려는 날 불러 세웠다.

"……너도 끔찍한 기억을 봤어?"

"음……. 그랬지."

마지막은 분명 끔찍한 기억이었다.

"그게, 저 사람의 말대로 네게 '무 거운' 기억이었어?"

그는 조금 절박한 눈빛이었다. 무 슨 기억을 봤길래 그러지?

따지고 보면 맞았다. 혜원 언니의 죽음 직후, 나는 게이트에 미쳐 있 다시피 했으니까. 그게 '나'에게 미 친 영향을 생각하면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불려도 될 정도다.

"나한텐 그랬어."

"그래……. 그렇단 말이지."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다음에, 연수원에 서 보자."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이운우는 걸어 나갔다. 스쳐지나가면서 가볍 게 미소 짓는다.

오싹, 소름이 돋았다.

은발 머리칼 사이로 곱게 휘는 자 안이, 소름끼치게도 회귀 전의 이운 우와 닮아 있었다. 저 미소는……

겉과 속이 다를 때 나오는 표정인 데.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지? 대 체 무슨 기억을 봤길래 나한테까지 재차 확인한 걸까?

'십 년도 넘게 봐왔지만, 여전히 그 속내를 잘 모르겠다니까.'

나도 오랜 시간 겪으면서 남들보 다 좀 더 알 뿐이지, 저 이운우의 속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 이 있을까?

이운우는 여러모로 베일에 싸인 사람이다. 물론 감히 그 청사의 사 람을 누가 뒷조사를 하겠냐마는. 이 운우는 유독 신비주의인 느낌이 있었다. 처참한 밑바닥부터 아득바득 올라왔다는 얘기 말고는 나도 딱히 아는 것은 없었다.

다소 찝찝하지만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건 없다. 이운우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나 역시 내가 갈 곳으로 발을 옮겼다. 이제는 내게도 돌아갈 곳이 있으니까.

더 이상 나 홀로 잠들고 생활하는, 찬 기운이 감돌던 곳이 아니다. '집'인 거다.

"다녀왔습니다!"

문을 열며 외쳤다. 집 안 가득 차 있던 온기가 한달음에 달려와 내게안겼다. 따스한 기운이 곳곳에 스며 든다. 사람 사는 냄새. 기분 좋은 섬유유연제 향이 났다.

"어. 왔어? 생각보다 빨리 왔네? 일주일 걸린다더니."

둘이 나란히 빨래를 접고 있었는 지 거실에 모여 앉아있었다. 곱게 접힌 수건들 사이에서 혜원 언니가 일어나 반겼다.

"저 왔어요. 좀 일찍 끝나게 됐거 든요."

"저녁은 먹었어? 우린 너 올 줄 모르고 먼저 먹었는데, 어떡하지? 남은 걸로는 볶음밥밖에 안 될 것

같은데. 볶음밥 괜찮아?"

"아, 괜찮아요. 입맛이 없어서."

기억이 훑어진 후유중인지 속이 좋지 못했다. 끔찍한 기억을 보기도 했고.

"입맛 없어도 밥은 먹어야죠. 제가 볶음밥 할게요."

표연원이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얘는 회귀 전에도 그렇고 내 밥에 좀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 연원아. 좀 부탁할게? 빨래 는 내가 마저 갤 테니까. 서하야, 넌 옷 갈아입고 와! 손도 씻고!"

"안 그래도 괜찮은데……

겸연쩍게 중얼거렸지만 듣는 시늉 도 않는다. 표연원은 벌써 냉장고에 서 재료들을 꺼내고 있었다.

서둘러 2층으로 올라가 씻고 내려 오니 지글지글, 프라이팬에 기름 끓 는 소리가 났다. 그 위에서 볶아지 는 음식의 향이 감미롭다. 던전에서 생활하느라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은 지도 꽤 오래되었다. 절로 군침이 돌았다.

"입맛 없다더니."

식탁에 앉은 내 모습에 표연원이 장난스럽게 말을 얹었다. 그러게.

나도 내가 입맛이 없는 줄 알았는 데.

"던전에서 뭐 맛난 거 먹었겠어? 몬스터 고기는 질기고 비리고, 아무 튼 진짜 별로야."

"그렇다며. 난 잘 모르지만."

"게이트 갔다 와서 집밥 먹는 게 얼마나 행복한데! 특히 연원아, 네 볶음밥은 최고야."

혜원 언니는 내 마음을 아는지 말 을 덧붙였다. 표연원은 게이트를 아 직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일반인은 이 정도만 알아도 충분하다. 더 알 필요는 없지.

"맛있게 먹어, 서하야."

"여기 물도 있어요." 드디어 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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