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챕터: 헌터 연수원
〈헌터 연수원 수석 입학을 축하드 립니다.〉
세상에.
나는 내 눈앞에 놓인 공문을 도저 히 믿을 수 없어 두 눈을 부볐다. 다시 읽어도 내용이 똑같았다. 뭐?
수석 입학? 수석 입학이라고?
'눈에 띄지 않으려고 했는데……. 최석철……!'
콜라를 쪽쪽 빨며 그 동그란 선글 라스를 번쩍이는 최석철이 환영처 럼 보이는 것 같았다. 그야, 물론 게이트 클리어까지 해낸 수험생은 없었겠지 . 나도 딱히 들어본 적 이 없으니. 더구나 둘 다 크게 부 상을 입지 않은 채로 나왔으니, 사 회적으로 이슈가 안 된 거겠지만.
'이운우가 있는데 내가 수석 입학 이라니. 이건 분명……
길드 영입 1순위 확정이다!
안 돼! 너무 귀찮단 말야!
헌터 연수원은, 아카데미가 활성화 되기 전 설립된 제도로 기본적인 헌터 교육을 실시하는 곳이었다. 아 카데미가 필수 코스로 정착하자 연 수원에서 가르칠 내용을 아카데미 에서 미리 배우고 오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연수원은 그 본연의 목적 보다는 다른 쪽으로 더 많이 사용 되곤 했다.
길드들이 인재를 영입하는 장으로 말이다.
말했다시피, 헌터라는 인적 자원은 길드의 질적, 양적 수준을 높이는데 필수적이다. 그건 고위 길드라 해도 피할 수 없는 길이라서 매번 길드 영입은 치열한 경쟁력을 자랑 한다.
물론 상위권 신규 헌터의 얘기고, 하위권은 겨우 끈을 잡아 길드에 들어가는 것이 고작이지만.
'연수원 입소식 때 대표 선서? 끔 찍한데……
그 아래로 수석 입학생에게 주어 지는 혜택들이 나열되어 있었는데, 별로 관심 가는 것은 없었다. 개중 가장 눈에 띄는 특혜는 아마도, '길 드교섭권'이겠지.
연수원 과정이 끝날 무렵, 길드들 은 각자 기부금으로 따낸 '영입권' 을 눈여겨본 헌터들에게 제안한다. 제안받은 카드들 사이에서 지망생 이 원하는 곳을 선택해서 가면 되 는 시스템이다. 그런데 이 길드교섭 권은 그 기본적인 시스템에 반항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헌터 개인이 길드에게 제안할 수 있는 카드인 거다.
나한텐 별로 쓸모없는데. 왜냐면 보통 연수원이 중요한 이유는 일반 헌터들이 길드의 접촉을 받을 기회 가 얼마 없기 때문이다. 개인 헌터 로 정말 이름을 날리지 않는 이상은. 그렇지만 난 충분히 이름을 날 릴 자신도 있고, 대형 길드에 들어 갈 생각도 없어 큰 의미가 없었다.
"누나. 결과 나왔어요?"
너무 당황스러운 결과에 내가 굳 어있자, 날 배려하고자 뒤돌아있던 표연원이 슬쩍 물어봤다.
"당연히 합격했지? 응? 우리 서하 가 떨어질 리 없는데. 불안하게 왜 말이 없어?"
서하 언니도 안절부절못하는 게 느껴졌다.
싸늘하게 식었던 마음이 좀 생기 를 되찾았다. 그래……. 일단 합격하긴 했으니까. 탈락보다야 낫겠 지……. 아니, 탈락이 나았을까? 정 말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상황이 었다.
"저……. 봐도 괜찮아요. 합격했어 요."
" 정말?"
환해진 목소리로 혜원 언니가 되 물었다. 이내 '수석 입학' 문구가 적힌 것을 보고는 허억, 하고 숨을 들이켰다. 옆에서 표연원도 우와, 하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허어억! 우리 서하, 대단한 건 알 았지만……! 이 정도였어? 수석 입
학? 이거 완전 대박 찬스잖아!''
"대단한 거야, 누나?"
"어어, 당연하지! 한 번에 연수원 들어가는 헌터가 몇인데. 그중 1등 이라는 거잖아! 완전 엘리트 코스 직행인데? 국립아카데미 졸업 다음 가는 코스지."
으음.... 그렇구나...
나는 그다지 감흥이 없었지만, 혜 원 언니가 기뻐한다면 뭐…… 그걸 로 됐다…….
혜원 언니가 호들갑을 떨며 설명 해주자 표연원도 점점 얼굴이 밝아 졌다. 우와! 대단해요! 하며 옆에서방방 뛴다.
"오늘 저녁은 외식이다! 고기 먹 자!"
"소고기!"
두 남매가 쿵짝이 잘 맞았다. 나는 기뻐하는 둘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 다. 그래……. 잘됐다고 생각하 자……. 이 둘이 좋아하면 된 거지, 뭐…….
* * *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뭔가 잘못
됐다.
"쟤가 그……
"수석으로 입학한……
"이운우가 될 줄 알았……
"어디 아카데미 출신인지……
술렁거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 다. 청각이 좋으면 이럴 때 곤란하 다. 대표 선서를 하고 나서부터 쭉 이 상태였다. 각자 희망하는 직군에 따라 듣는 수업이 다른데, 기본적인 지식을 가르치는 공통 수업은 대형 강의실에서 분반으로 진행됐다.
'……내 옆으로 아무도 안 오잖
아?'
내 주변에 결계라도 있는 것처럼 도통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 래……. 내가 이 나이 먹고 연수원 에서 애들이랑 노는 것도 웃기지-그냥 조용히 지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누군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제는 익숙한 은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이운우?"
"또 보네."
살짝 웃는 모습이 꼭 순정만화 남
주인공처럼 달콤하다. 그 얼굴에 주 변 헌터들이 술렁거린다. 역시 이운 우, 라는 말이 들리는 걸 보면 원 래 유명한 모양이지.
'벌써부터 이미지 관리를 하는 건 가.'
하긴 원래도 이런 걸 탁월하게 잘 하는 녀석이긴 했다. 저 곱상한 얼 굴로 회귀 전에도 거의 연예인 같 은 대우를 받았고. 뭐라더라, 굿즈? 쟬 닮은 인형 같은 걸 팔기도 했 다.
저 예쁘장한 얼굴에 속아 넘어간 사람이 얼마나 많았던지……. 뒤통수 맞고 얼얼해하던 얼굴을 한두 번 본 게 아니다.
"나도 여기에 아는 사람이 없어 서."
"민달래 씨랑 김주일 씨는?"
"그런 사람이 있었던가?"
대놓고 모르는 사람 취급이다. 그 야, 이운우가 아는 척할 만한 레벨 은 아니겠지만…… 여전히 상큼한 얼굴로 음흉한 짓을 한다니까. 말하 지 않았는가. 청사 놈들은 그런 구 석이 있다고. 웃으면서 독설을 내뱉 어서 순간 '내가 뭘 들은 거지?' 하 는 인지부조화를 만들어낸다고.
"이번 연수원엔 길드장님도 오셔."
"그래서?"
청사의 길드장이라니. 연수원에 그 정도 거물이 오는 건 흔치 않은 일 인데. 이운우 때문에 오는 건가?
"좋은 성과를 보여드리고 싶은데. 혹시, 조별과제 나랑 같이 할래? 너한테도 나쁜 조건은 아닐 거야."
그런 용건이 있으셨군. 하지만 안 타갑게도, 난 눈에 띄고 싶은 생각 이 전혀 없었다.
"다른 사람 찾아. 난 관심 없어."
"왜?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을 찾긴
어려울걸?"
오만하지만 맞는 말이다.
"아무튼 난 싫어."
" 정말?"
그러더니 대뜸 가련한 표정을 지 어 보이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라 면 언뜻 넘어갔을지도 모르지 만…….
"표정이 심하네."
" 미안."
나도 모르게 질색했나 보다. 이운 우도 머쓱한지 평소처럼 온화하게 웃었다. 으음……. 내가 네 얼굴엔그리 좋은 기억이 없어서…….
"이게 누구야."
갑작스럽게 끼어드는 목소리가 있 었다. 고개를 돌려 확인하니 아는 얼굴이었다. 김주일. 자격시험을 같 이 본 그 남자다.
"꽁으로 수석이랑 차석 먹은 분들 아냐?"
그런데 내용이 꽤 악의적이었다. 무슨 의미지?
"무슨 소릴……
"왜? 맞잖아. 두루마리는 나랑 달 래가 찾았는데, 중간에 이탈해서 어
디로 갔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숟 가락만 얹었잖아."
절로 얼굴이 굳었다. 그야, 둘이서 두루마리를 찾느라 고생하긴 했겠 지만 우리라고 놀고먹은 건 아니었 다. 그 여왕개미를 상대하느라 목숨 을 걸었는데.
술렁술렁. 김주일의 말에 주변 학 생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수석에 차석이라……. 역 시 청사 힘이 좋긴 한가 봐. 대놓 고 밀어주면 티 날까 봐 수석은 다 른 사람 주고, 차석은 날로 먹고. 그럼 되겠어?"
"김주일 씨. 저횐 보스 몬스터를 잡고 그에 합당한 점수를 받았을 뿐입니다."
"그 보스 몬스터를 너희가 잡았는 지 어쨌는지 아무도 모르잖아. 증거 있어?"
유치한 담론이었다. 던전 안에서, 그것도 정식 시험장도 아닌 곳에서 벌어진 일을 어떻게 증명한단 말인 가.
'최석철에 대한 내용은 발설할 수 없는데.'
기억을 꺼내서 보여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답답하기만 했다.
"이 문제는 정식으로 협회에 항의 할 거니까……!"
"자자, 새로운 헌터분들! 정숙하시 고〜."
그때 단상에 강사로 보이는 인물 이 들어왔다.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김주일은 뒷말을 삼키며 자리에 앉 을 수밖에 없었다.
"우선 다들 자격시험을 통과하고 한창 들떠있을 때라는 거, 저희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험을 통과한다고 끝이 아니잖아요? 결국 길드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나은 방 향이라는 건 모두 알고 계시겠죠?"
그녀의 말에 어수선했던 분위기가 좀 정돈됐다. 신규 헌터가 빠르게 성장하려면 길드의 조력이 필수적 이라는 데 반발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기본적인 내용들은 각자 아카데 미에서 배워 와 지루하시겠지만, 수 업 태도 점수도 종합 점수에 포함 된다는 점! 잊지 마시고요〜. 그럼, 첫날이니까…… 간단하게 오리엔테 이션이라도 하고 싶지만, 정말정말 안타깝게도! 국가에서 할당해준 시 간 안에 진도를 다 끝내려면 꽤 촉 박해서요. 곧장 수업 시작할게요〜."
입담이 제법 좋았다. 신규 헌터들
도 약간 불만 어린 얼굴을 했지만, 수업 태도 점수 때문인지 입 밖으 로 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 음, 이 교실에 수석이 있 네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한서하 헌터, 어디 있나요?"
"여기 있습니다."
손을 들자 시선이 한 번에 쏟아졌 다. 호기심과 질투 그리고 의심이 서린 눈빛들이 제각기 빛났다.
"이야, 이번 수석과 차석은 특히나 활약이 대단했다고 들었는데. 이번
연수는 꽤 기대되네요!"
쓸데없는 소리를 덧붙이니 시선이 더욱 집요해졌다. 아까 김주일이 떠 든 내용과 상반된 평가였다.
"마침 차석도 옆에 있네요! 이운우 헌터, 둘이 원래 아는 사이였나 요?"
"아뇨. 실기 시험 때 같은 조여서, 그때 처음 만났어요."
이운우가 살짝 시선이 그쪽으로 만했다.
"그래요? 아아. 하죠. 그럼 수업
웃으며 대답하자 몰렸다. 조금 살
잡설은 여기까지 진도를 나가볼까
요?"
시작이 여러모로 험난했다.
이런 같잖은 의혹 정도야 그냥 무 시하는 게 상책이지만, 따라붙는 시 선들은 집요하기까지 해서 꽤나 거 슬렸다.
반면에 옆에 있는 이운우는 쏟아 지는 시선들이 아주 익숙한 것처럼 굴었다.
* * *
공통 수업 다음은 직군별 수업이
었다. 나는 원거리 딜러 쪽을 선택 했고, 이운우는 몇 없는 마법사였기 때문에 수업이 갈렸다.
정해진 교실로 이동하니 모처럼 학생이 된 기분이 신기했다. 고등학 생이나 대학생이 된 것 같기도 하 고. 물론 대학은 다녀본 적이 없지 만.
어쩌면 당연하게도, 수업은 야외 필드에서 진행됐다. 주변에 결계를 둘러 대미지를 흡수하게 만든 곳이 었다. 그런데 얼핏 보니 원딜 수업 학생이 아닌 것 같은 사람들도 섞 여 있었다.
'저 사람은…… 근력, 체력이 높아 보이는데. 방어력도. 탱커에 훨씬 가까워 보이는……
내 상념을 깨뜨리는 목소리가 있 었다.
"어!"
나를 알아본 듯한 목소리였다. 고 개를 돌리자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 다.
"서하야!"
밝은 갈색 머리카락에 부드러운 컬이 들어간 단발. 항상 제멋대로 뻗은 모습만 봤는데, 이제 보니 자연스러운 곱슬머리였다. 밝은 목소 리에 잔뜩 품은 다정함. 그 이름대 로인, 송다정이었다.
"오랜만임다!"
게다가 이 말투. 짧게 깎은 머리에 답지 않게 순박한 눈망울을 한 남 자. 매번 탱커를 하기엔 많이 유약 하다고 생각했던 사내, 김태병이 그 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