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챕터: 테오도르의 안배
"확인 되셨습니다. 한서하 헌터님.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오래된 던전은 가끔 놀이공원 같 은 분위기를 풍긴다. 매표소에서 헌 터 자격증을 확인하고 입장료를 낼 때면 더욱 그렇다.
던전 입구가 꽤나 한산했다.
평일 낮이라 그럴까. 뭐, 헌터들 중에 겸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 냐마는. 꿀이 동난 곳이라 이거지.
[알림: 게이트에 입장하셨습니다.]
[사용자를 확인합니다.]
[개체 '한서하(각성자)'를 확인했습 니다.]
[시스템에 접속합니다.]
눈을 뜨니 드넓은 평원 위에 푸른
갈대가 쫙 깔려있었다. 진짜 갈대는 아니다. 바람에 따라 살랑살랑 흔들 리는 모습이 아름답다. 던전 안이 아니었으면 관광지로 유명했을 거 다.
쏴아아아, 바람 따라 갈대들이 서 로 스치는 소리를 냈다.
본래 이 던전에서 할 수 있을 만 한 건 몇 없다. 이 던전은 몬스터 리젠율이 극악이라 마주칠 확률이 낮다. 다만 던전 곳곳에 함정이 숨 겨져 있어 정찰 스킬을 연습하기 좋은 곳이다.
'대부분은 파훼되어 주의 표시가
붙어있지만.'
당장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오른쪽 으로 한 걸음 거리에 위험 표지판 이 꽂혀 있었다. 밟으면 발동되는 종류의 함정 같다.
내게 정찰 스킬은 없지만 유사한 스킬은 있다.
'공간 간섭'
눈을 감았다 뜨자 아까와는 완전 히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푸른 갈 대 사이사이로 숨겨진 함정들이 머 릿속에 새겨지듯이 떠올랐다. 너무 많은 정보들이 몰려오니 머리가 지 끈거렸다.
'분명…… 동쪽 동굴로 들어가서, 왼쪽 벽면을 따라 가라고 했지.'
나침판을 열고 동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가는 길에 건드리면 칼날 이 솟아오르는 함정과 외나무다리 처럼 생겨서 올라서면 무너지는 함 정 등등을 만났지만 손쉽게 넘겨냈 다. 오래 쓰고 있으면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여긴가.'
어느새 갈대는 내 키보다 높이 솟 아 있었다. 갈대를 옆으로 걷어내자 드디어 동굴 입구가 보였다.
온통 푸르른 색감이 인상적인 곳
이다. 동굴마저도 검푸른빛이 도는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파스스-
한 발 들이밀자, 동굴 벽면을 꽉 채운 버섯들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침입자를 감지하는 것처럼 웅웅 소 리를 내더니 푸른 빛을 뿜는다.
'발광 버섯들이야.'
매니아층이 확실해서 채취해서 가 져가면 수요가 있는 버섯이다. 맛은 모르겠지만 그 모습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벽면 한쪽을 꽉 채운 걸 보니 이해가 갔다. 은은한 형광색으 로 빛나는 게 꼭 바닷속에 들어온것 같았다.
'왼쪽 벽면을 따라 들어가서…… 홈이 파인 부분에 검지를 걸고.'
달칵.
손끝으로 벽면을 홀자 홈이 파인 부분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아래에 놓인 돌을 들어서.'
시선을 내리자 바닥에 판판한 돌 이 보였다. 언뜻 평범해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자 인위적인 느낌이 들었다.
돌을 빼내니 그 밑에 주먹만 한 구덩이가 있었다.
'그냥 손을 넣을 게 아니라, 버섯 포자를 손에 바르고..
발광 버섯을 하나 뽑아 손에 문질 렀다. 긴장감이 서렸다. 만약 내가 잘못한 점이 있으면, 이 구덩이 안 에서 손이 작살날 수도 있었다.
'천천히…… 안쪽을 더듬으면.'
기이한 감촉에 소름이 끼친다. 이 안도 버섯으로 가득 찬 것 같았다. 버섯들 사이사이를 손으로 헤집자 겨우 뭔가가 만져졌다.
동그란 고리. 이걸 당기면……
쿠구구구궁, 쿠궁, 쿠구구구구!
옆쪽 동굴 벽이 반쯤 돌아가면서 동굴이 무너질 듯이 흔들렸다. 후두 둑, 천장에 달린 버섯들이 두어 개 떨어져 내렸다. 파스스, 돌가루 소 리도 났다. 몸을 웅크리고 기다리자 이윽고 진동이 멎었다.
'된 건가.'
이 복잡한 조건들을 어떻게 달성 한 건지. 처음에 발견한 사람이 신 기할 지경이다.
열린 공간 앞에 섰다. 어두컴컴한 안쪽은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었다. 발광 버섯이 저 안까지 자라진 못 한 모양이다. 짐 가방에서 손전등을꺼냈다.
팟!
손전등 불빛이 안쪽을 비춘다. 그 순간. 기묘한 소음이 다른 곳에서 울렸다.
-샤:. . . . . 사: ogopol"* . . . . .
날카로운 숨소리. 몬스터인가? 빠 르게 손전등을 동굴 안쪽으로 향했 다. 딱히 보이는 것은 없지만 기이 한 소리는 계속 울리고 있었다. 샤 아아, 샤아아아.
'아까 진동이 안쪽에 있던 몬스터 를 깨운 건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은 아니다. 잠 시 몸을 벽면에 붙이고 대기하자 곧이어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굴에 닿을 것처럼 키가 크다. 두 터운 털옷을 입고 뭉뚝한 팔다리에 손톱, 발톱만 매서웠다. 발광 버섯 을 먹고 자랐는지 털이 전반적으로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비죽이 튀어 나온 송곳니가 살벌하다.
곰과 비슷한 형상을 하고서 카멜 레온처럼 색을 바꾸는 몬스터, '카 멜레온베어'였다. 한국 명칭이 따로 있었던 것 같지만 이 몬스터는 이 이름으로 더 자주 불렸다.
-우우웡……워어어어…….
놈도 날 발견했는지 멈춰 섰다.
우리는 한동안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잠깐의 탐색전 끝에, 먼 저 움직인 쪽은 나였다.
휘이익!
발돋움을 하고 스킬을 쓰자 어느 새 나는 하늘을 날고 있었다. 허공 을 빙그르르 돌자 시야가 어지러이 흩어졌다.
- 워어어우어!
둔탁한 앞발을 휘두르려 하길래 한 번 더 스킬을 발동했다. 다음순간 나는 놈의 등에 올라타 목덜 미를 잡고 있었다. 제대로 반응을 하기도 전에 노이트의 방아쇠를 당 겼다.
탕!
쿠웅.
거대한 몸체가 쓰러지며 육중한 소리를 냈다.
간단한 승리였다.
고작해야 E급 몬스터긴 하지만 이 전보다 공간 간섭의 숙련도가 늘었 는지 쿨타임이 훨씬 빨랐다. 연속은 아니어도 빠른 시간 안에 여러 번 사용하는 게 가능해졌다. 허공에서몸놀림도 무척 가볍다. 이건 아마 도, 이 덕분이겠지.
[칭호를 확인합니다.]
〈역천의 별〉
설명: 길드 '역천'의 에이스, 빛나 는 별에게 주어지는 칭호입니다.
부가효과:
1. 또 다른 역천과 함께할 때 모 든 스탯이 10% 향상됩니다.
2. 길드 규모에 비해 믿을 수 없 는 업적을 거뒀을 때 더 많은 보상 을 얻습니다.
3. 하늘의 가호를 받습니다: 땅에 발이 닿지 않을 때 일시적으로 민 첩이 10% 향상됩니다.
역천에 가입하면서 활성화된 칭호 였다.
내게 잠금 표시된 칭호들 중 하나. '■■의 별'은 본디 '역천의 별'이 다. 중소길드였던 역천의 이름을 달 고 끝없는 활약을 보여줬을 때 받 은 칭호였다.
이렇게 빨리 열릴 줄은 몰랐지만, '잠금'이라 표시되어 있었으니 언젠 가는 열릴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도 처음부터 얻는 게 아니라 잠긴 걸 풀어내는 거라 조건이 훨 씬 낮아진 듯했다.
아직 잠금 해제할 칭호도 많고 능 력치도 갈 길이 멀었지만 점점 예 전의 감각이 돌아오고 있었다. 특히 나 공중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그 느낌만큼은 언제나 짜릿하기 그지 없다.
쓰러진 몬스터는 본디 시체까지 잘 처리하는 게 원칙이지만…… 이 던전은 몬스터 개체 수가 매우 적 고 아까의 진동으로 가장 안쪽에 있던 놈이 움직인 것 같으니 굳이 치울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대로방치하고 본래 목적으로 향했다.
다시금 반쯤 열린 문 앞에 섰다. 고유 스킬도 발동해 함정이 없는지 살폈다. 말끔한 것을 확인한 다음에 야 드디어 첫발을 내디딜 수 있었 다. 좁은 복도를 따라 걷자 저 멀 리서 불빛이 보였다. 복도 너머에 새로운 방이 있었다.
'여기가 테오의 안배였구나.'
들어서자마자 알 수 있었다. 낡은 종이책의 내음이 물씬 풍겼다.
작은 발광 버섯 무리 하나가 방을 희미하게 밝히고 있었다. 누군가가 지냈던 방인 것처럼 꾸며져 있었다.
쭉 늘어진 책장은 도서관을 연상케 한다. 문에 가까운 쪽에 책상이 놓 여 있었고 책상 위에도 종이로 된 서류들이 한가득이었다.
'볼펜 대신 잉크 깃펜이라.'
고상한 취향이다.
손전등을 들고 서고 곳곳을 비췄 다. 이 책들 하나하나가 톨룩에 대 한 귀한 자료가 되어줄 것이다. 물 론 톨룩의 언어로 쓰여 있기 때문 에 당장은 어렵고 당분간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책상을 살피던 도중, 갑작스럽게 그림자가 졌다.
사람의 형상이다.
휙, 뒤돌아봤으나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고 있 었다.
'누구지?'
노이트에 저절로 손이 갔다. 다른 헌터가 왔다고? 그럴 리가. 여긴 최초 발견자도 몇 년 뒤에나 있을 곳인데.
-어리석은 인간……. 이곳까지 들 어왔구나…….
그때, 스산한 목소리가 울렸다. 못 으로 철판을 긁는 것처럼 기괴한소리였다.
-오만한 너희에게…… 내가, 벌을 내릴 것이다!
거창하게 떠드는 것에 비해 이상 한 기색은 없었다. 공간 간섭 스킬 을 써서 책장 사이를 훑었지만 이 상한 존재는 없었다.
'그림자가 진다는 건 빛이 있는 곳 근처에 있단 소린데……
책장 뒤에 몸을 숨기며 서서히 안 쪽으로 들어갔다. 노이트를 꽉 쥐고 신경은 온통 곤두선 채였다. 기감이 예리해지고 있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소리를 죽이고
기척을 숨기며 천천히 걸어갔다. 마 지막 책장 너머에 놈이 있을 거다. 마지막 책장 직전에 잠시 멈춰 섰 다.
제대로 보긴 어렵지만, 환하게 빛 을 내는 뭔가가 분명 있었다. 빛의 근원지인 것 같다. 놈은 아마 그 근처에 서 있을 테니…….
-이 위대한 테오도르 님께 경배
하나, 둘!
탕!
"아아악! 깜짝아!"
테오도르?
총을 쏘고 나서야 뭐라고 말한 건 지 들렸다.
'지금 테오도르라고 한 건가?'
눈에 들어오는 광경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환하게 빛나는 수정구슬과 그 앞에 선…… 손가락만 한 크기 의 작은 인간. 그게 전부였다.
손가락만 한 인간이라니? 내가 아 는 테오도르는 멀쩡하게 우리와 같 은 크기의 사람이었는데……?
"헉! 지구인이다!"
"테오도르?"
구불거리는 녹색 머리카락에 눈물 이 맺힌 푸른 눈동자. 차려입은 복 식도 중세 귀족 같은 것이, 그 톨 룩의 배신자 테오도르가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게이트를 통해 직접 현신할 수는 없을 텐데?'
"지…… 지구인! 진짜 지구인이다! 내, 내 말이 들리느냐? 이해도 하 느냐?"
테오도르가 허겁지겁 묻는다. 작은 햄스터 정도의 크기라 그다지 위협 적이진 못했지만. 왜 이런 꼴을 하 고 있는 거지?
"너, 어떻게 여기 있는 거야?"
"허억! 마, 마, 말했어! 나랑 대화 도 가능한 건가?"
반웅이 격하다. 테오도르는 거의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처럼 감격스 러운 표정을 했다.
'그야…… 지구에 광적으로 반해 자기 세계를 배신한 사람이니 오죽 하겠냐마는.'
자기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며 호 들갑을 떠는 모습이 영 믿음직스럽 지 못했다. 과거에 테오도르와 내가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공식 석상 에서 만날 때는 신비로운 이미지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으으}! 지구인이 나 잡네!"
대충 테오도르를 쥐어 올렸다. 이 제야 눈높이가 좀 맞는군. 테오도르 의 망토를 잡고 들어 올리자 대롱 대롱 매달렸다. 그가 몇 번 발버둥 을 쳤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 테오도르."
"날 알아?!"
"아까 위대한 테오도르 님이라며."
"첩!"
그제야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 는다. 그런다고 내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는 없겠지만.
"그 꼴은 뭐야?"
"응? 꼴이라니! 이 몸의 위대한 기술력의 집합체거늘!"
달랑달랑 흔들리는 주제에 위엄을 세우려고 난리였다.
"이 기술로 말할 것 같으면! 아직 게이트 안에는 허가된 투사체만 '보스 몬스터'라는 포지션으로 입장 할 수 있는 한계를 뛰어넘고! 무려 일반 플레이어처럼 행동할 수 있는 투사체 기술! 단점은 아직 실 현 크기가 좀 작다는 것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