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좀 작은 게 아닌 것 같은데."
"무엄하다! 이 위대한 기술을 보고 도 그 가치를 못 알아보다니, 아둔 한 것!"
톡.
"아야!"
말하는 투가 제법 잔망스럽기에
한 대 가볍게 건드렸다. 딱밤을 때 리려다가 지금 테오도르가 너무 작 아서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 참았 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그것도 참을 수 없는지 내 손끝에 발길질을 하 더니 끝내 작게 물어뜯기까지 했다. 물론 전혀 아프지 않았다. 애초에 난 헌터라 몸의 내구력이 차원이 다르다.
"지구인들은 죄다 너처럼 무뢰배 들인 거냐! 나, 나는 그동안, 지구 인하고 대화할 생각에…… 밤낮 없 이 기술을 연구해왔는데……!"
" 흐음......
어째서 테오도르의 투사체 비슷한 것이 여기 있는진 모르겠지만, 나쁜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테오의 안배를 찾으러 왔 는데 그 본인이 눈앞에 있으니 이 것저것 물어볼 수도 있을 거다. 테 오도르도 이 시기에는 지구에 대해 서 아는 게 거의 없어 지식욕에 허 덕이고 있을 것이다. 문서로만 보던 지구를 실제로 체험해보고자 이런 기술까지 만들었겠지.
"좋아. 테오도르. 난 지구인 대표 고, 넌 톨룩인 대표인 거야. 서로
궁금한 점들 몇 가지를 물어보도록 할까?"
"호오……. 지구인들은 그래도 대 화가 통하는 지적생명체구나! 웅? 그런데 톨룩을 어떻게 아느냐?"
"당신이 남긴 안배를 봤어."
물론 지금은 아니고, 회귀 전에. 내 말에 그의 얼굴이 대번 환해졌 다. 환희에 가득 차 푸른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난다.
"저, 정말? 도움이 되었느냐?"
"덕분에 살았지. 〈성배〉를 얻어 벨제부브를 죽였으니."
"허억……! 그 붉은 마왕을!"
투사체에 불과하긴 했지만. 그걸로 도 테오도르는 충분히 놀란 것 같 았다. 그 게이트가 클리어됐다는 애 긴 들었지만 설마 당사자를 만날 줄은 몰랐다는 등, 우리는 최소 3 년은 걸릴 거라 생각하고 만들었는 데 너무 일찍 클리어되어 당황했다 는 계속 떠벌렸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당신도 지구에 대해 궁금한 게 있을 거 아 냐? 나도 당신한테 궁금한 게 많거 든."
"음! 그건 맞다!"
"그럼 빠르게 얘길 해보자고."
"그 전에 잠깐! 지구인, 네 이름이 뭐지?"
그의 질문에 잠시 멈칫했다. 이름 을 알려줘도 좋을까? 물론 크게 문 제 될 건 없겠지만…… 이 지구 덕 후에게 '첫 지구인'은 꽤나 의미 깊 은 존재일 텐데. 그런 귀찮은 자리 를 차지해도 되는 걸까.
'이미 마주친 이상 어쩔 수 없나.'
체념하고 내 소개를 했다.
"한서하. 헌터고."
이 이상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없
었다. 이 이계인은 역천이나 길드의 개념을 잘 모를 테니까.
"그래, 헌터! 지구인들 중에서도 아주 독특한 존재들이지! 항상 너 희와 얘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그게 이렇게 현실이 되다니 정말 꿈만 같구나!"
"그래서. 테오도르. 네 소개는?"
"오, 그래. 내가 잠시 예의를 잊었 노라. 내 이름은 아주 길지만…… 너희 지구인들은 짧은 이름을 선호 하는 것 같으니 나도 '테오'라고 불 러다오!"
내 이름이 짧은 건 그냥 내가 한
국인이라 그런 거지만…… 나라의 개념과 각국마다 다른 이름 문화를 설명하는 것도 지치는 일이라 모른 척했다.
"난 너희에게 아주 관심이 많다. 지구는 무척 매력적인 세계지. 우리 랑은 아주 다른 문화를 갖고 있고."
"게이트를 만들면서 말이지."
나도 모르게 비아냥거리는 말이 새어나왔다.
그럴 수밖에. 우리에게 톨룩은 그 야말로 '침입자'다. 우리 삶의 터전 을 위협하고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우릴 착취하는 무법자 말이다.
내 말뜻을 알았는지 테오도르도 무척 찔리는 얼굴을 했다.
"이해한다. 우리가 많이 원망스럽 겠지. 나도 게이트를 만드는 일을 하면서도 그게 옳은 일인가 고민이 많았다. 그래서 몰래 너횔 돕기 위 해 안배들을 장치해두었고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게이트 관련 기술에서 최고 권위자기 때문에 가 능한 일이었지."
테오도르에게 화낼 일은 아니었다. 그는 이계의 배신자라고 불릴 정도 로 지구에 친화적인 인물이니. 그렇 다 해도 톨룩이 지구에 한 짓은, 하고 있는 짓은, 또 앞으로 할 짓은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어디까지나 변명이지만. 우리 세 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세계까지 끌어들인 일은 분명 우리 에게 도덕적 책임이 있겠지. 하지만 생존 앞에서 '도덕'은 아주 얄팍한 것 아닌가? 처음 우리가 게이트를 개발하던 시기엔 나름대로 절박했 다는 점을 말해두고 싶네. 자네들 입장에서야 그게 무슨 상관인가 싶 겠지만……
잘 알고 있군.
머리로는 이해가 간다. 당장 세계 가 오염되고 있으니 어떻게든 살방법을 찾아야겠지. 우린 재수 없게 도 그 타깃이 되었고. 생존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 알고 있으니, 마냥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우리가 그런 위험에 처했 을 때 그 정의를 지키기 위해 침몰 하는 배 위에서 손 놓고 있진 않았 을 테니까.
"네 말대로. 우리가 알 바는 아니 지."
그렇다고 해서 피해자인 우리가 그들의 사정을 감안해야 한다는 건 아니다.
"그 책임을 피할 생각은 없다. 우 리가 가해자라는 건 명백한 사실이 니."
순순한 인정이었다.
"그래서 안배를 심어둔 건가?"
"응? 그럴 리가!"
테오도르가 해맑게 웃었다.
"내가 안배를 장치한 건 어디까지 나 내가 지구에 호의를 갖고 있기 때문이지, 죄책감을 느껴서가 아니 다."
"죄책감은 없으시다……
"뭐. 미안한 말이지만 우리 입장에
선 우리도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 다는 거지. 우리가 잘못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죄책감은 없다."
그것 참. 철저하게 가해자의 시점 에서 하는 말이군.
어이가 없어 도리어 머리가 싸늘 하게 식었다.
"시간을 돌려 다시 선택권을 갖게 되더라도 우리는 같은 선택을 하겠 지. 남을 희생시켜 우리가 살아남는 다는, 뭐 그런 거 말이야."
"그럴 거면 왜 안배를 만든 거야. 얼른 우리가 죽는 게 너희에겐 이
득일 텐데."
테오도르는 조막만 한 머리통을 좌우로 저었다. 아는 체하며 거들먹 을거리지만 너무 작아서 도리어 우 스웠다.
"이것과 그것은 아주 다른 문제야! 나는 지구보단 톨룩이 망했으면 하 니까."
"뭐?"
내가 뭘 들은 거지?
톨룩이 망했으면 좋겠다고? 제정 신인가 의문이 드는 발언이었지만 정작 테오도르는 태연했다. 그는 해 맑게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아까까지 말한 '우리'는 일반적인 톨룩인의 관점이고. 나, 테오도르의 관점은 다르지. 난 톨룩에 애정이 없다네. 차라리 지구인이 몇백 배는 사랑스럽지."
"그런.…"
"거짓말 같나? 난 이미 충분히 많 이 선을 넘었어. 이렇게 비밀리에 게이트에 들어온 것이나, 지금까지 숨겨뒀던 것들이 밝혀지면 당장 내 목이 잘릴 수도 있을 테지. 그럼에 도 불구하고 내가 이런 일들을 벌 인 이유는 단 하나!"
푸른 눈동자가 광기로 번들거렸다.
"내 사랑!"
미쳐있군.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 다.
"미쳤다고 생각했나?"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걸."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 같은 연구자에게 내 심장을 뛰게 하는 무언가는 아주 각별하거든. 그 전에 는 오염이었고, 그 다음은 게이트였 고, 지금은 지구가 그 역할을 하고 있지!"
그렇게 말하는 테오도르는 진심으 로 사랑에 빠진 것처럼 몸을 배배꼬았다. 행복한 감정이 물씬 느껴지 는 얼굴을 하고서. 살짝 소름이 돋 았다.
"톨룩이 망해가는 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 그런 곳은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아. 오로지 지구! 이 미지의 세계만이 날 두근거리게 만 들지! 그 황홀한 곳을 게이트 같은 가짜 세계로 말고, 진짜로 방문하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만 해도 환희 로 몸이 떨리는군."
"톨룩이 망하면 너도 죽을 텐데?"
"걱정하지 말게. 그 전에 나 하나 탈출할 기술은 있을 테니."
당당한 자신감이었다.
틀린 말은 아닐 거다. 테오도르가 '테오의 안배' 외에 직접 모습을 드 러낸 것은, 그가 정말로 게이트 밖 으로 걸어 나올 수 있을 때였다. 무슨 원리인지 나는 잘 모르지 만…… 어찌 됐든 다른 톨룩인들이 게이트 밖으로 나오려고 아우성일 때 홀로 지구의 품으로 걸어 들어 왔지.
그는 자신이 지구에 속할 수 있는 것을 알게 된 후 즉각 톨룩과 척을 졌다.
사랑하는 지구를 망치는 것들은
버러지만도 못하다고 했다던가. 그 런 말을 했다는 소문이 돌 때는 혼 한 국뽕용 소문인 줄 알았는데, 이 걸 보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그가 왜 이렇게까지 지구를 사랑 하는지, 그 근본적인 이유는 알 수 없다. 왜냐고 물어도 제대로 답해주 지 않아 회귀 전에도 미스터리로 남았으니까.
"……좋아. 일단 네가 지구에 호의 적이란 건 알겠어. 그럼 우리가 뭔 가 의미 있는 거래를 할 수도 있겠 지. 안 그래?"
"예를 들면?"
"게이트의 최고 권위자라 했지? 그럼 지금 지구에서 벌어지는 비파 동 게이트도 다 너희가 만든 걸 테 고. 난 그 정보를 갖고 싶어."
여타 게이트들은 사전에 그 파동 을 파악하는 방법으로 피해자를 줄 일 수 있다. 요즘 들어 게이트는 안내 방송에 따라 잘 피하기만 하 면 평생 접할 일이 없다.
그 때문인지 최근 나오기 시작한 게, 비파동 게이트다. 말 그대로 파 동이 없으니 감지할 수 없고 휘말 린 일반인들은 대부분 죽어 나온다. 대표적인 예시가 연화도 게이트라 고 할 수 있다.
"물론 그거야 어렵지 않지만…… 나랑 연락할 수단이 없을 텐데?"
"이 게이트 안에서만 네가 몰래 들어올 수 있는 건가?"
"어느 게이트라도 가능하긴 하지. 약간 조심만 한다면 말이야."
"그럼 상관없어. 난 내 인생 대부 분을 게이트에서 보내거든."
내 말에 테오도르의 표정도 미묘 해졌다. 흡사, 아까 내가 테오도르 를 보던 것처럼. 미친 사람을 보는 눈빛이다.
"흐음…… 그럼 넌 내게 뭘 제공
할 수 있느냐?"
이 지구 덕후를 어떻게 만족시킬 수 있을까. 지구의 신문? 물건? 아 니면 바깥 지구의 풍경이 담긴 사 진? 어느 것이라도 이 녀석에겐 좋 은 거래가 될 테지만.
내겐 회귀 전 테오도르에 대해 들 은 정보들이 있었다.
테오도르를 바닥에 내려놓고 짐가 방을 풀었다. 내가 던전 안에서 생 활하기 위해 챙겨온 갖가지 것들 중 하나였다.
"색이 이상한 물이로구나."
"이온음료라고 하는 거야."
테오도르가 지구의 음료수에 환장 한다는 건 유명한 일화였다.
'제일 좋아하는 건 탄산음료라 했 지만 던전 안에 그런 걸 가져올 리 는 없으니.'
대신 시중에서 파는 이온음료라 적당히 달달한 맛이 꽤 새로울 거 다. 조그마한 테오도르가 혼자 음료 수를 따긴 어려워 보여 음료수 뚜 껑에 담아 내려놓았다. 그래도 테오 도르에게는 거의 머리통만 한 대접 이었다.
"오오오!"
귀족스러운 옷을 입은 주제에 품
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를 처박 고 한 입 맛본다. 꽤나 마음에 들 었는지 감탄사를 연방 내뱉었다.
"신기한 맛이구나!"
"수분 보충을 목적으로 하는 음료 수야. 밖에는 탄산음료라고 톡톡 쏘 는 맛이 나는 것도 있어."
"탄산수구나! 탄산수를 들어본 적 은 있다만 영 먹을 것이 못 된다고 하던데. 여긴 이렇게 달콤한 물이 나는가 보구나!"
자연적인 건 아니고 가공한 음료 지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하다, 신기해! 이 오묘한 색 깔에 중독적인 맛이라니. 과연. 지 구의 특산물이구나. 우리 세계에도 비슷한 것이 있지. 커피나 홍차 같 은 것 말이다. 우리에게도 아주 사 치스러운 것이지. 그 맛과 향은 일 품이지만 말이야."
사치재는 아닐 텐데....... 우리에게 도 커피와 홍차 가운데 비싼 브랜 드는 사치재에 가깝지만. 하지만 값 비싼 것으로 보여 나쁠 건 없으니 역시 입을 다물었다.
"네가 정보를 가져다주면 난 종류 별로 다른 음료수를 제공하고, 원한 다면 지구의 물건이나 사진 같은
것도 구해줄 수 있어."
"사진! 지구를 볼 수 있는 사진! 으음…… 매우 탐나지만, 아쉽게도 물건을 갖고 돌아갈 순 없으니. 정 말 허상과도 같구나……!"
그러더니 대체 어느 쪽을 요구하 면 좋을지 몹시 고민하는 것이다.
"다음에 만날 때까지 정해서 와. 그럼 되잖아?"
"응? 무슨 소리냐. 난 지금 당장 네게 팔 정보가 있거늘."
뭐?
"그 말은…… 비파동 게이트가, 곧
열릴 거란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