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하루 일과 가 시작됐다. 간편식을 대충 먹고 또다시 언데드들의 머리통을 깨부 수는 일들이 이어졌다. 나는 '손님' 이라는 이유로 최후방에 안전히 모 셔졌기 때문에, 전투에 직접 참여할 일은 없었다.
파지지직!
번개가 내리쳤다. 빛이 먼저 번쩍 인 다음, 뒤이어 요란한 소리가 들 렸다. 이운우가 낀 전투에선 익숙한 양상이었다. 다만 이번엔 한 가지가 달랐다.
"아아악!"
외마디 비명이 뒤이어 울렸다.
"뒤로 빼! 힐러, 당장 치료부터! 앞에 뚫리지 않게 조심하고!"
정진문이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그 말에 앞에서부터 부상자가 실려 왔다. 바로 내 앞까지 도달한 다음 에야 힐러가 달라붙어 치료를 시작 했다. 든든히 챙겨온 성수도 덜어내겉에 발랐다.
'......화상?'
아니. 불에 덴 것과는 조금 달랐 다. 몸에 열기가 솟으면서 살이 타 들어 가는 냄새가 났지만, 겉으로 보기에 화상은 아니었다. 그렇다기 보단.
'벼락 맞은 것처럼……
"흐으으... 으으윽....
이름 모를 사내가 계속해서 고통 어린 신음을 내뱉었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 헤매는 모양이었다.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고 손발을 덜덜 떨 었다.
"상태는!"
"전류가 심장을 통과한 것 같아요! 부정맥입니다! 생존 가능성은……
힐러가 애써 힐을 쏟아부었으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사내의 몸에 서서히 힘이 빠지더 니 축 늘어졌다. 안색은 창백하고 핏기가 없었다. 부정맥으로 피가 제 대로 돌지 못한 탓이었다. 죽음이었 다…….
"……사망했습니다."
고요히 사망 선고가 내려졌다.
전투가 마무리되자, 사람들은 사내
의 시신 주위에 모여 섰다. 아득히 먼 곳으로 가버린 동료를 위해 쓰 고 있던 투구와 모자를 벗고 고개 를 떨군다.
첫 사상자였다.
나는 그 사이에서 이운우를 찾았 다. 이 모든 사건이 누구에게서 시 작됐는지. 그건 아주 명백한 일이었 다.
이운우는 인파가 몰린 곳에서 살 짝 뒤에 서 있었는데, 아주 담담한 얼굴이었다. 그는 제 이마를 타고 흐르는 몬스터의 피를 대충 소매로 닦아내면서 서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의 은발이 피에 젖어 뺨에 달라붙었다.
우리는 한동안 그러고 서 있었다.
* * *
"개자식……!"
죽은 사내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울던 남자가 내뱉은 말이었다. 다분 히 감정적인 어조였다.
"네가 죽인 거야! 네가…… 네가 어떻게……
"진정하시죠. 안타까운 일이지만 클리어 도중에 생긴 일은……
"진문이 형, 저 새끼 감싸지 마쇼! 이 쥐새끼 같은 놈!"
그는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었다.
클리어 도중에 생긴 이런 사고는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었다.
고의성이 없다면 말이다.
"은혜를 알아야지! 길드장님께서 이 일을 아시면……!"
"박현종 씨!"
정진문이 강한 어조로 그의 이름
을 불렀다. 그제야 사내는 쏟아내던 악담을 멈추고 그를 돌아봤다.
"형! 형도 아시잖아요!"
"그만. 예전 일은 길드장님께서 이 미 덮으신 일이고."
그가 흘낏 내 쪽을 눈짓했다.
"손님도 계신데 청사의 이름에 부 끄럽지 않게 행동해라."
사내는 내 존재를 이제야 눈치챈 것 같았다. 쯧, 하고 거칠게 혀를 차더니 휙 뒤돌아섰다. 명백한 적의 가 이운우에게 향하고 있었다.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지만.
"죄송합니다. 한서하 씨. 좋지 못 한 모습을 보였네요. 저 친구도 제 가 잘 달래면……
"아뇨. 저한테 죄송할 일은 아니 죠."
이상한 분위기다. 모두들 대놓고 말하진 않지만, 이운우 쪽을 못마땅 하게 보고 있지 않은가.
'이운우가 낙뢰 마법사인 걸 모르 는 사람은 없을 테고. 함께 클리어 를 진행한다면 그 부분에 대한 방 비가 되어있어야 맞는 건데……
이제 보니 갑옷에 고무를 덧씌운 사람과 아닌 사람이 뒤섞여 있었다.
이런 환경이라면, 이운우도 마음껏 실력을 발휘하기 어려울 텐데. 실제 로 사상자가 생기지 않았는가. 죽은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하긴 미안하지 만, 이 경우는 본인의 실수다.
'낙뢰 마법사와 함께 레이드를 들 어가면서 철제 갑옷이라.'
미숙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냉정하지만 그렇다.
애초에 전기는 컨트롤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소환하여 내리꽂는 것은 시전자의 마음이라도, 그 전기 가 어디까지 퍼질지는 아무도 모르 는 일이니까.
"그런데, 미리 방어구를 절연체로 맞추지 않은 겁니까?"
"그게…… 개인 방어구 설비는 스 스로 하게 되어 있습니다. 권고는 할 수 있지만 강제할 순 없습니다."
"그럼 제대로 방비하지 않은 사람 잘못으로 보이는데요. 낙뢰 마법사 가 함께한다는 걸 몰랐을 리는 없 을 테고요."
정진문도 할 말이 없는지 잠시 입 을 다물었다. 원칙적으론 내 말이 옳다. 목숨 걸고 일하는 헌터 업계 에서 스스로 방비하지 않는 자는 죽음뿐이다.
"……맞습니다. 저희 측 불찰이 죠."
'저희' 측? 이거 순전히 이운우랑 자기네들은 다른 노선이라고 말하 는 셈 아닌가.
어이가 없다.
초보나 할 법한 실수였다. 게이트 안에서 정치질과 알력이라니. 알 만 큼 알 사람들이 이런 기본적인 실 수를 한다고? 그것도 유의미한 전 력을 갖춘 마법사를 대상으로, 다수 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정진문 씨. 저도 '손님'으로 남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게이트 안
에서 자꾸만 분열이 보이면, 일단 한배를 탄 입장에서 자꾸 걱정이 되어 참견하고 싶어질 것 같네요."
"그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걱정 마시죠."
말은 번드르르하게 잘한다.
"잠시 쉬었다 간다! 시신 수습하 고, 휴식!"
나는 뒤에 서 있는 이운우에게 다 가갔다. 아까부터 표정 변화가 없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걱 정스러웠다.
"이운우. 아까 일은……
"나서지 않아도 괜찮아."
" 뭐?"
"난 괜찮다고."
진심인가? 그를 바라보았으나 덤 덤한 얼굴이었다.
내가 아는 이운우는 부당한 대우 를 받고서 속앓이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지위와 능력을 이용해 최대한의 이익을 뽑 아먹는 인물이었다.
'내가…… 회귀 전의 이운우만 생 각했나?'
지금의 이운우는 조금 다른 느낌
이었다. 그는 당당하기보단 무덤덤 해 보였고, 거만한 사람보다는 체념 한 사람에 가까워 보였다.
애초에 청사에게 배척받는 이운우 라니. 상상조차 한 적이 없다!
"별로 신경 안 쓰고 있고. 심각한 일도 아니야."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괜히 끼어들지 마. 이건 우리 길드의 문제니까."
명백하게도 나는 타인이라, 이번엔 내가 입을 다물었다.
* * *
그 이후로도 클리어는 계속 진행 됐다. 차근차근 진도를 나가는 과정 이 순조로울 정도였다. 이운우와 다 른 청사 멤버들 사이는 여전히 데 면데면했고, 나는 그것을 방관했다. 이운우는 이제 내게도 말을 걸지 않았다. 그게 더 나은 길이라 생각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최근에 나는 못다 한 일을 마저 하고 있었다.
휘익!
"아직 느려."
안유수의 발차기를 잡아챘다. 민첩 이 그들보다 한참 위인 내겐 눈에 뻔히 보이는 공격이었다. 뒤이어 날 아오는 화살도, 한 손으로 잡아냈 다.
"체육관에서랑 패턴이 똑같잖아."
"으윽……
체술로 제압하고 안유수를 땅에 뭉갰다. 흙바닥에 뺨을 대고서 그가 항복, 항복, 하며 외쳤다. 동시에 발로 누르고 있던 그의 어깨를 풀어줬다.
"아, 좀 더 버렸어야지!"
"네가 해봐. 이게 쉬운 줄 알아?"
"가위바위보에서 네가 져놓고? 진 짜 조금만 더 있었으면 완전 등 뒤 에서 쏠 수 있었는데!"
"어차피 잡혔을걸?"
"초치지 마라, 안유수. 진짜 한 대 쳐버리기 전에."
으르렁거리는 둘을 겨우 말렸다. 진짜 한 대 칠 기세로 화살을 뽑아 들길래 식겁했다.
"너희, 솔직히 말해봐. 나 가고 나
서 체술 연습 많이 했어?"
"어……
이번엔 동시에 눈을 바깥으로 돌 리면서 딴짓을 한다. 이럴 때는 쌍 등이답게 죽이 잘 맞는다. 보나마나 뻔하다. 게이트를 돌며 몬스터 잡는 게 더 재밌었겠지.
'그게 성과도 눈에도 잘 보이고 실 력도 금방 올랐을 테니까.'
실제로 그 정도 실력으로도 이미 레인저들 사이에선 꽤나 수준급일 거다. 원거리 딜러들은 체술을 제대 로 배우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 그러니 체술을 소홀히 여길 만도 하 다.
"사람을 상대하려면, 머리를 쓰면 서 싸워야 한다고 했잖아."
"근데 언니, 우리가 사람을 쏠 일 이 있을까?"
"맞아. 어차피 우린 게이트에서만 싸우는데."
그야, 지금은 그렇겠지.
이계의 침공에 대해 입을 열 수 없으니 답답할 뿐이었다. 놈들은 우 리처럼 사고하고 행동하는데. 그들 이 우리의 진짜 적인데.
'그렇게 말할 순 없어.'
당장 정신병원에 끌려가도 할 말 이 없을 테니까. 회귀든 뭐든 모두 내 정신 이상으로 치부할지도 모른 다.
"……언젠간."
"에이, 그럴 일이 있겠어? 게이트 안에서 통수라도 맞지 않는 이상 그럴 일 없지〜."
"그거 좀 사망플래그 아니냐?"
"그렇게 직접 말하는 게 더 플래 그 아니냐?"
둘은 시답잖은 고민 정도로 치부
하는 것 같았다. 사실대로 말할 수 도 없고. 이것 참.
"사이가 좋네요."
둘이 투닥거리는 사이 정진문이 슬쩍 끼어든다. 그는 높게 묶었던 머리를 내려 풀고 있었다. 나보다도 더 긴 머리카락이다.
"네. 게이트 안에서 만났거든요."
"그 얘긴 들었어요. 저 둘이 한서 하 씨를 많이 따른다는 건 꽤 유명 하거든요."
아니 그게 왜 유명하지? 저 둘이 날 유별나게 따른다는 생각은 들지 만…… 유명할 정도인가.
"제 얘길 자주 하나요?"
"자주 하진 않아도 행동으로 보이 잖아요. 사실 저흰 이 둘이 정상적 인 대화를 할 수 있을 줄 몰랐
"아저씨!"
"그건 비매너!"
귀신같이 듣고 따라붙어 입을 막 는다. 이운우도 그러더니. 이 둘이 내가 없을 때 어지간히 지랄맞게 구는 모양이다. 정진문도 입단속하 는 시늉을 했다. 쌍둥이들은 눈을 치켜뜨다가도 이내 서로에게 화살 을 돌린다.
"그러게 내가 평소에 좀 웃고 다 니라 했잖아!"
"너야말로 웃으면서 쌍욕하고 다 니는 주제에 뭘."
내 정신건강을 위해 듣지 않는 편 이 좋겠다.
"이운우 씨랑은 많이 친하신가 봐 요?"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고? 무슨 의도인가 싶어 정진문을 바라보자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변명한다.
"다른 의미는 아니고요. 이운우 씨 가 누군가랑 친하게 지내는 걸 본
적도 거의 없어서요."
"그런가요? 성격이 둥근 편은 아 니지만 모난 편도 아니라고 생각하 는데...
물론 내가 그의 표정을 대체로 다 읽으니 의사소통이 원활하다는 전 제하에서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그 얘길 꺼내자 정진문의 표 정이 꽤나 오묘해졌다. 걔가? 이런 생각인 것 같다.
"아무래도 묘한 느낌을 받으셨을 것 같습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현재 저희 실정이 그런 편입니다."
"한 명만 따돌리는 일이요?"
"예…… 그렇게 볼 수도 있겠죠."
그렇게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그 런 거겠지.
"……자세한 건 내부 사정이라 말 씀드리기 어렵지만."
그가 먼 곳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무 규칙도 없는 것 같은 이곳 에도 나름 한 가지 불문율이 있습 니다. 저희의 길드장님께 항상 존경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죠."
좀 사이비 종교 같은데.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시죠. 그분
은 존경받아 마땅한 분이고,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레 다들 그분을 동경하는 것뿐이니까요. 정 작 그분은 그런 분위기를 부담스러 워하십니다."
부지런히도 전서호를 변호한다.
나는 잘 모르겠지만, 그에겐 사람 을 무릎 꿇게 만드는 뭔가가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길 드원들이 전부 한마음으로 그를 섬 길 리가 없겠지. 겉보기엔 자유로운 듯했는데 사실 홍염보다 더한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겁니다."
그는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면 목 없다는 눈치다.
"이운우 씨는, 길드장님의…… 홈, 길드장님께 다소 해로운 존재라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이런 분위기가 형성된 겁니다."
이운우와 전서호가 무슨 연관이 있던가?
'……딱히 없었던 것 같은데.'
물론 회귀 전에 처음 만났을 때는 이미 전서호가 은퇴하고 이운우가 집권하던 시기이긴 했지만. 둘 사이 에 뭔가 깊은 인연은 없던 걸로 안다. 대외적으로는 단순히 재능 있는 고아였던 이운우를 전서호가 데려 다가 정성껏 키워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해를 바라는 건 아닙니다. 객관 적으로 보기 좋은 그림은 아니니까 요."
그러면서도 구구절절 설명하는 건, 내 이해를 구하고 싶어서일 테지.
"왜 저한테 이런 말을 하는 거 죠'?"
"개인적인 동정심이라고 해두죠."
의외의 답이었다.
"동정합니까? 이운우를?"
"네."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담백한 눈 으로 진실을 고했다.
"적어도 그가 잘못한 것이 있어 이런 취급을 받는 게 아니란 건, 해명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암묵적으로 동조하고 있으면서 잘도 그런 말을 하는군요."
그가 아니었다면 이운우는 절대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려 하지 않았 을 테니. 그의 대처는 말 그대로, 이운우를 위한 것이긴 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자신의 죄책 감을 덜려고 하는 것도 웃긴 일이 다.
"그러게요. 이 정도가 제 마지막 양심인가 봅니다."
그가 쓰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