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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시작이 게이트라곤 안 했잖아요-72화 (72/361)

72화

이제는 익숙한 곳으로 향했다.

테오의 방.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는 항상 그곳에 있었다.

혜원 언니는 내가 푸른 갈대 보는 맛에 빠져 자꾸만 놀러 가는 줄 알 았으나, 정작 나는 이 컴컴한 동굴 속에서 내리 시간을 보내곤 했다.

" 테오도르."

"왔구나, 지구인!"

조막만 한 몸체를 하고서 그가 책 상 위를 뒹굴거리고 있었다.

나름 귀염성 있는 모습이라 볼 수 도 있겠지만, 지금만큼은 아주 가증 스러웠다.

"테오라고 불러도 된다는데도. 너 는 참 고집이 세구나."

"왜 미리 말 안 했어?"

그도 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는지 등을 떼고 바로 앉 았다.

"왜 그러느냐? 아, 저번에 그 게이 트 때문에 그런 것이냐?"

"그래. 그 게이트. 비파동 게이트 에 대한 정보는 내게 판다고 하지 않았어? 내가 지구의 음식, 음료수, 사진, 영화까지 전부 다 갖다 바쳤 잖아!"

"흐음.…"

그가 차게 웃었다.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지구인아. 너랑 내가 한 거래는 어디까지나 '내가' 정보를 팔고 싶 을 때 팔기로 한 것 아니었던가?"

"……그랬지."

"변명을 좀 하자면 나도 어쩔 수 없었다. 나도 실적이 좀 있어야 이 자리를 유지하지 않겠나. 미리 말하 면 자네가 바로 해치워버리니, 나도 영 면이 살지 않아서 말이야."

표정관리가 되지 않아, 얼굴이 지 나치게 싸늘히 얼어붙는 게 느껴졌 다.

그래. 머리로는 알았다.

우리의 거래는 가벼웠고, 내가 내 건 조건도 '모든' 비파동 게이트에 대한 정보가 아니었단 걸.

그리고 최근 오랜 시간 준비한 게 이트들이 허무하게 끝마무리되면서 테오도 다소 위기감이 들었겠지.

안다. 다 아는데.

"고작 그런 이유로……

주먹을 꽉 쥐었다.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던 표연원이 떠올라 더욱 입 안이 썼다.

"저런. 저번에 갑자기 뛰쳐나갈 때 뭔가 심상치 않더니. 일이 있었던 모양이야."

그가 조잘조잘 떠들어댔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네게 말

할 걸 그랬어. 내 하나뿐인 지구인 친구가 속상해하니 나도 마음이 아 프군. 안 좋은 일이 생겼다니 유감 일세."

객관적으로,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 다.

테오도르는 자신의 일을 했을 뿐 이며, 나도 헌터로서 내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그 사이에 휘말린 표 연원이 그저…… 재수가 없었던 거 다.

그래.

게이트가 판을 치는 현대를 살아 가는 사람들의 숙명이니까. 게이트는 자연재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이렇게 울컥 치미는 감정은 어째서일까.

'그 애의 불행을 단순히…… 운이 나빠서 당한 일로 치부해버리면.'

그 누구를 탓할 수도, 원망할 수도 없는 이들은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생각이 그곳에 다다르자 몸에 힘 이 쭉 빠지고 도리어 머리는 냉정 해졌다.

테오도르에게 따져봤자 아무 의미 도 없는 일이다.

"……내가, 조금 흥분했던 것 같

네. 괜한 화풀이를 했어. 미안해." 잠시 숨을 골랐다.

"그래. 상태가 영 안 좋아 보여!" "넌 눈치를 좀 챙겨야겠고." "그런 소리 자주 듣는다네!"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즐거운 던전 탐험 하셨나요?"

매표소 직원이 언제나와 같은 멘 트를 던졌다. 나는 어쩐지 더욱 힘이 빠졌다.

"수고하세요."

고개를 꾸벅 숙이며 나왔다. 저 사 람도 저게 그냥 정해진 멘트여서 내뱉었을 뿐일 테지.

게이트가 만연해지고, 헌터가 연예 인처럼 추앙받는 시대다.

지나가는 길가에 헌터가 찍은 광 고가 크게 걸려있었다. '포근하게, 달콤하게' 따위의 선전을 내세운 핫초코 광고였는데, 요즘 뜨고 있는 헌터가 광고 모델이었다.

툭.

"저기."

광고판을 보며 걷는데, 뒤에서 누 군가 접근했다. 나도 모르게 몸이 먼저 반응했다.

탁! 그 사람의 손목을 잡아채고 나서야 이곳이 게이트가 아니라 그 냥 길거리라는 걸 깨달았다.

"아. 죄송합니다."

조금만 더 인식이 늦었으면 손아 귀에 힘을 줄 뻔했다.

아찔한 상상이었다. 일반인의 손목 이 순식간에 아작날 수도 있었다.

"아뇨, 아뇨. 괜찮아요그보다

학생. 내가 좋은 말씀 전해주려고 하는데……

"죄송한데 관심 없어서요."

용건은 종교 전도였던 모양이다. 손에 든 팸플릿을 쥐여 주길래 거 절하며 막 걸음을 떼려는 찰나였다.

"곧 지구가 멸망할 거야!"

그것 참. 파격적인 소리였다.

"그때 가서 후회하면 늦어, 학생! 지금 내 말 잘 들어야 나중에 후회 할 일이 안 생기는 거야〜."

"다른 사람 찾아보세요. 전 관심 없어요."

"아, 그러지 말고〜."

뭔 사이비 종교인지 모르겠네. 팸 플릿을 힐끗 보니, '새하나교'라고 적혀있었다.

'새하나교? 하필이면……

지금이야 과격화되기 전이겠지 만…… 영 얽히고 싶지 않은 부류 였다.

"이거라도 챙겨 가아〜."

억지로 떼어내려다가 실수로 힘 조절을 못 하면 상대가 크게 다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순순히 팸플릿 만 받았다. 그러자 그걸로 만족했는지 함박웃음을 지으며 멀어져간다.

"나 참……

팸플릿을 역 근처 쓰레기통에 버 리는데 스치듯이 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어?'

-이세계의 침공이 시작될 겁니다! 지구가 곧 멸망합니다!

크게 적힌 글자는 두 눈을 비벼도 변하질 않았다.

톨룩에 대한 얘길 하고 있었다. 새 하나교에서.

'……그야, 게이트가 신벌이라고

주장하는 사이비 종교였으니 원래 부터 지구가 멸망한다 어쩐다 떠들 었지만…… 이세계 침공이라고?'

새하나교가 원래 이런 얘길 했던 가? 잘 기억나진 않았다. 사이비종 교의 교리까지 관심 있게 보진 않 았으니까.

가끔 사회적 이슈를 일으켜 뉴스 에 뜨면 보는 정도였는데.

그나마도 가끔 있는 헌터 찬반 논 쟁이나 헌터 규제, 국가 귀속 논란 처럼 게이트사회에 어쩔 수 없는 잡음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고개를 돌려 아까 그 아주머니가

있던 곳을 보니 이미 다른 사람을 붙잡고 팸플릿을 떠밀고 있었다. 어 쩔 수 없이 받아 들고 짜증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었다.

이세계 침공이니 지구의 멸망이니 하는 얘기가 저들에겐 아주 처음 듣는 얘긴 아닌 것 같다.

'내가 몰랐던 것뿐인가.'

그래. 아무래도 지금 내가 좀 예민 한 상태인 것 같다.

그래, 교리가 원래 저 모양이었나 보다.

'사이비 종교가 하는 말이 우연히

겹쳤을 뿐인데……

♦ * *

은은한 소독약 냄새가 났다. 아직 재활 중이라고 했던가. 화려한 외양 의 사내가 말없이 내 앞자리에 앉 는다.

"얘기는 들었어. 또 활약했다고 하 던데."

이운우였다. 그가 가볍게 운을 뗀 다.

"그리고…… 안 좋은 소식이 있단

것도. 대충은."

"그 얘긴 별로 하고 싶지 않네."

아마 표연원에 대한 얘기일 거다. 나름 중견 길드인 역천이 클리어도 정찰도 죄다 그만두고 활동을 중지 했으니까.

"대충 얘길 들었다면 알 텐데. 무 슨 용건인진 몰라도, 지금은 선뜻 움직이기 어려워."

"알아. 그렇다고 영원히 숨어 있을 건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

"나랑 게이트에 들어가자."

나는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이운우가 말하는 '게이트'는 이번 에 새로 생겨난 필드형 게이트를 말하는 것이다.

정식 명칭이 붙기 전이지만, 파동 게이트라 피해가 비교적 적다고 들 었다.

'난도 높아서 클리어팀 구성에 난 항을 겪고 있다고 들었는데.'

정찰팀의 보고에 따르면 난도가 상당해 최상위권 길드들을 많이 섭 외하려 노력 중이라고 했다.

당연히 청사의 이운우도 포함되었

을 테고. 재활이 거의 끝나가고 있 다고 들었다. 치유 속도가 이례적이 라고 했던가.

'저번에 봤던 그 길드 분위기를 생 각하면 좀 걱정스럽지만……

내가 이운우를 걱정하는 날도 오 다니. 참.

그는 항상 내 믿음직스러운 전우 였고, 우리는 서로를 인정하되 기대 지 않았기에. 이런 느낌도 참 새로 웠다.

"알잖아. 지금 역천은 게이트 클리 어에 참여할 상황이 아니야."

"역천이 아니라 너한테 권유한 거

야."

그 말인즉슨…… 이운우 개인 역 량으로 날 청사에 끼워 넣고 게이 트에 들어가고 싶다는 얘기였다.

'불가능하진 않아. 클리어팀 구성 은 길드의 입김이 크니까.'

그러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굳이 왜 날 끌어들이고 싶어 하 는 건데? 난 청사도 아니고 역천의 사람인데."

"잘은 모르겠지만 그 총, 대미지를 무효화하는 기능이 있지?"

이운우가 내 허리춤에 곱게 잠들

어있는 노이트를 힐끗 바라봤다.

"몇 번 합을 맞췄을 때 느꼈다시 피…… 꽤나 조합이 좋잖아, 우리. 내 스킬은 광범위한 공격인 게 종 종 문제인데 넌 대미지 무효화 총 탄을 가지고 있으니까."

저번에 블루블러드전, 그러니까 그 뱀파이어 놈을 상대할 때나 여왕개 미를 상대할 때 나도 느낀 바긴 했 다. 스킬 궁합이 좋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설명하기 어 렵지.'

전부터 생각하던 바였다. 이운우, 이 녀석 왜 이렇게 내게 친절하단말인가?

'내가 아는 이운우보다 어리고, 여 러 번 합을 맞춘 적이 있다지만. 아카데미 때도 결국 나랑 다른 계 열이라 같이 과제를 한 적도 없는 데 꾸준히 함께 어울렸고.'

생각할수록 이상한 일이었다. 이 녀석이 내 기억보다 훨씬 말랑하게 굴고 있다는 자각이 들었다.

"……전부터 생각했는데."

슬쩍 서두를 열었다.

"너는 왜 이렇게까지 내게 호의적 인 거지?"

"무슨 소리야?"

"날 팀에 넣으면 내 실책은 온전 히 네가 떠맡게 될 텐데. 우리 스 킬의 상성이 좋은 건 맞지만…… 리스크를 짊어지면서까지 파트너십 운운하는 게 좀 이상해서."

제아무리 난도가 높은 게이트라 할지라도, 이운우가 깨지 못하리란 생각은 안 들었다. 그도 그렇게 생 각할 거고.

굳이 나까지 게이트에 끌고 가고 싶어 할 이유가 없을 텐데.

"예리하네."

"당연히."

"……어물쩍 넘어가고 싶은데. 안 봐주겠지?"

"당연히."

짙은 빛깔의 보라색 눈동자가 주 변을 살피며 빙글 돌아갔다. 이윽고 목소리를 조금 낮춰 이야기를 꺼낸 다.

"게이트 출입 자격시험 직후에, 천 리안을 만났던 때 기억나?"

"기억나. 근데 그때 우리는 거의 초면이었잖아."

"그래. 그랬지. 그때 천리안이 그

랬잖아. '무거운' 기억을 보게 된다 고."

"……그랬지. 실제로 나도…… 내 게 중요한 기억을 봤고."

혜원 언니가 나를 구원하던 기억. 그것이 얼마나 뿌리 깊게 박혔던지.

이운우는 그런 나를 잠깐 응시하 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나도 어떤 기억을 봤어."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 는데."

이번에는 헌터시험에서 처음 만났 으니, 당시 나와 관련된 기억은 고작해야 여왕개미를 함께 잡은 것뿐 이다.

그리고 여왕개미를 잡은 기억이 그에게 '인상 깊은' 정도는 될지 몰 라도 그의 인생 뿌리에 가까울 정 도로 무게감 있진 않았다.

내 물음에 이운우는 할 말이 많은 얼굴을 했다. 그러나 정작 그의 입 밖으로 나오는 건, 섬세하게 덜어내 고 그린 듯이 계획한 말들뿐이었다.

"내가 아는 기억이 아니었어. 정말 로, 처음 보는 기억이었어. 그리고 그 기억 속에…… 네가 있었어. 한 서하. 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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