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탕!
푸욱!
나는 한참 칼줌을 췄다. 이곳저곳 종횡무진 휘젓자 놈들도 정신을 차 리지 못하고 휘둘렸다.
휘이익!
그때 귓가에 바람소리가 들렸다.
팔로 막아냈으나 실수였다.
꼬리? 뭔지 모를 것이 기사들 중 한 명과 연결된 채 길게 튀어나와 있었다.
그것을 내 측면으로 휘두르길래 서둘러 막았으나.
팍!
팔등에서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윽!"
통증에 반사적으로 몸을 피했지만, 이미 화상으로 살갗이 엉망이었다.
'과연.'
기사단이 대체로 인간이라는 게 이런 뜻이었나.
'키메라? 인체실험?'
정확히는 몰라도 그런 것들 중 하 나인 듯했다. 그게 아니면 저렇게 완벽한 전투용 꼬리를 가질 순 없 겠지!
"등을 맞대고 서라!"
내가 멈칫한 사이 잠깐 여유가 생 기자 곧장 누군가 외쳤다. 조잡하지 만 그럴듯한 파훼법이었다.
공간 간섭으로 뒤를 점하고 내 기
척을 눈치채기 전에 총이나 스틸레 토로 목숨을 끊는 것. 그게 지금 내가 취하는 전투 방식이었다.
누군가의 외침에 따라 둘씩 짝지 어 등을 맞대자, 내가 뒤를 점하기 어려워졌다.
'제법 머리를 썼는걸.'
나도 섣불리 그들을 공격하기 어 려워졌다. 게다가 언제 그 꼬리 같 은 것이 날 노릴지 모른다는 불안 감에 등 뒤도 경계하게 됐다.
쒜애액!
다시 한번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피해냈다.
바로 뺨 옆을 스치는 것이 아찔하 다.
'이번엔 팔이냐.'
검을 쥔 손이 길게 늘어나 내 옆 까지 이르고 있었다.
'인간이길 포기한 건가?'
탕!
"으으으윽!"
그러나 효과적인 공격법은 아니다. 길어진 신체 부위를 회수하기까진 필연적으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 으니.
그사이에 내가 총을 겨누면 피할 수도 없다.
다시 한번 공간을 뛰어넘었다.
나를 바라보고 있던 기사들이 주 위를 둘러보며 허둥대는 사이, 나는 그들 한가운데에 나타났다.
탕!
시야를 위해 뚫려있는 구멍을 이 용하면, 굳이 뒤를 점하지 않아도 목숨을 앗아가기 쉽다.
"으아아아아악!"
물론 치명상은 아니라 좀 시끄럽 긴 하지만.
즉사시키려면 뇌까지 뚫어야 하는 데, 각도가 틀어지면 잠시 동안 고 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살아있게 된 다.
"허억..허 억..
그리고 홀연히 사라진다. 그들에게 남은 건 시체가 된 동료뿐이다.
승패가 명확했다. 기사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있었다. 남은 숫자는 고작 해야 5명.
내 승리를 확신하는 순간, 상황을 뒤엎는 문구가 들렸다.
-방어 2단계에서 3단계로 재설정
합니다.
-방어 시스템을 재구축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움직임이 시작됐다.
-3단계 방어 시스템을 가동합니 다.
취이이이익-
벽면에서 보라색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색깔부터가 아주 불길하다.
황급히 코를 막고 댄버 쪽으로 물 러섰다. 기사들은 자신의 죽음을 직 감했는지 가만히 눈을 감는다.
"신이시여……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스르륵. 벽 쪽에 있던 기사들은 연 기를 들이마시고 털썩 바닥으로 쓰 러지기 시작했다.
문은 닫힌 지 오래였으니, 꼼짝없 이 독 안에 갇힌 쥐 신세였다.
"3단계는 독가스인가요?"
"네……. 인체에 끔찍한 영향을 주 죠."
댄버가 작게 속삭였다.
"근육을 굳히는 독이에요. 처음엔 팔다리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 기 능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멈추다 끝 내…… 폐가 멈춰 숨을 쉬지 못하
고 질식사하죠."
우리가 앞으로 그렇게 죽을 거란 소리군. 내 사인을 이렇게까지 자세 히 알고 싶진 않았는데 말이다.
" 해독제는?"
" 없어요!"
몸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얌전히 죽어줄 순 없지. 이 런 경우 어딜 공격해야 할지, 고민 할 필요도 없었다.
우린 문이 어딘지 알고 있고, 다른 벽면은 몰라도 저 문은 철판만 뚫 어내면 빈 복도가 나온다는 것도아니까!
"잠시만 기다려요!"
숨을 참으며 문 쪽으로 향했다. 저 곳이 약점이란 걸 설계할 때부터 염두에 뒀는지, 독가스가 살포되는 양이 어마어마했다.
숨을 참는데도 몸이 점점 늘어졌 다. 손끝 감각이 무뎌지고, 발이 점 점 굼떠진다.
피부 점막을 통해서도 체내에 침 입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호흡기를 통한 침입이 제일 치명적일 테니 숨은 참아야 했다.
둔탁해지는 손끝에 이어 팔도 점
점 말을 안 듣기 시작했다. 무거운 족쇄라도 단 것처럼, 아니면 팔을 움직이는 법을 까먹기라도 한 것처 럼.
뇌에서 움직이라고 명령을 보내는 데 좀처럼 잘 움직이지가 않았다.
철컥.
총구를 겨우 겨눴다. 팔을 들어올 리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얹는 그 간단한 동작이 거북이처럼 느렸다. 진땀이 나도록 어려웠다.
'방아쇠만, 당기면…… 되는데
……
관통하는 철화를 쏠 수만 있다면!
대상을 관통하는 그 총알은 저 문 도 뚫어내고 조금이나마 산소를 들 이마실 수 있게 해줄 텐데……!
하지만 손가락이 도무지 움직이지 가 않았다.
간절히 빌고, 안간힘을 쓰며 움직 이려 해봐도 내 검지는 미동도 없 었다.
총을 쥐고 있다는 감각마저 사라 지고, 손목 위에 달린 것이 내 손 이 아닌 듯했다. 둔탁한 느낌이 낯 설었다.
'큰일이다.'
약효가 빠르다. 점점 숨쉬기 어려
워졌다.
털썩-
시야가 돌아간다. 한참 지나고 나 서야, 내가 바닥에 쓰러졌다는 걸 인식했다.
바닥과 닿는 감각이 없고, 땅바닥 이 올라와 나를 감싸고 있는 것 같 은 어이없는 착각이 들었다.
'안…… 되는데……. 일어나야, 일 어나서…… 게이트를 클리어해 야……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도무 지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움직여! 움직이라고!'
눈을 부릅뜨고 손가락을 응시했지 만, 손끝이 움찔하는 게 고작이었 다.
안 돼. 이대로 끝낼 순 없었다.
이대로 모든 걸 망칠 순 없다!
노이트!
위기에 빠질 때마다, 노이트는 매 번 나와 함께 성장했다.
나의 오랜 친우, 오랜 벗이요, 늘 나를 지켜주는 든든한 구원자였으 니.
회귀 전에도, 지금과 비슷하게 동
상으로 손발이 꽁꽁 얼어 움직이지 못한 적이 있었다.
차가운 눈밭에 쓰러져, 눈보라를 온몸으로 맞으면서 의식이 흐려지 고 있었지.
그때 내 마지막을 직감하고 스르 르 감기는 눈꺼풀에 정말 이대로 끝인가 싶었던 때에,죽어가는 나를 살려낸 것이 너였 다. 노이트.
그러니까!
'난 일■아. 내게 필요한 탄환이 무 엇인지.'
회귀 전 수없이 사용하며 죽음의 위기를 넘겨왔다. 나는 이미 내게 필요한 것이 뭔지 알고 있어!
'그러니 내게 응답해!'
비록 우리가 시간을 역행해 그 탄 환에 대한 기록은 모두 사라지고, 기억 속의 잔재로 변했으나.
우리가 합을 맞췄던 시간만큼은 내게 또렷하다.
'특수 탄환,'
흐려지는 시야 속, 노이트가 환하 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찬동하는 목책!'
[알림: '노이트 리볼버'의 잠금이 해제됩니다.]
쓰러지기 직전에 언제나 나를 지 탱했던 탄환이, 다시금 내게 깃들었 다.
[아이템을 확인합니다.]
〈노이트 리볼버(귀속)〉
등급: SSS(잠금)
설명: 마력을 탄환 삼아 쏘는 리
볼버입니다. 소유자의 영혼에 귀속 되며 주인과 함께 성장하는 무기입 니다. 일반 탄환은 무제한, 특수 탄 환은 하루 최대 6번 사용할 수 있 습니다. 특수 탄환은 1회 사용 후 재장전까지 5분의 시간이 소요됩니 다.
부가효과: 특수 탄환의 효과는 아 래와 같습니다.
1. 아늑한 바람: 탄환에 적중 당한 대상은 일정 시간 대미지를 받지 않습니다. 숙련도에 영향을 받습니 다 (60s).
2. 쏟아지는 불꽃: 쏘아올린 탄환
이 다수가 되어 일정 범위 안에 대 미지를 입힙니다. 숙련도에 영향을 받습니다(5m, 40s).
3. 관통하는 철화: 웅축된 힘으로 상대를 관통해냅니다. 일반 탄환의 8.5배에 달하는 대미지를 입힙니다. 숙련도에 영향을 받습니다.
4. 찬동하는 목책: 사용자의 의지 에 찬사를 보냅니다. 그 뜻에 동의 하고 기꺼이 지지합니다. 신체의 한 계를 일시적으로 뛰어넘습니다. 의 지의 강렬함에 영향을 받습니다.
5. (잠금)
6. (잠금)
[알림: 특수탄환 '찬동하는 목책' 이 시전자의 의지에 반응합니다.]
[알림: 10분 동안 신체의 한계를 뛰어넘어 자유롭게 움직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빛나는 고리가 생 겨나 두둥실 떠올랐다. 두세 겹이 서로 엇갈리며 내 주변을 감싼다.
내 의지에 반웅하고 그에 찬동한 다.
방아쇠를 당기지 않아도. 내가 손 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어도. 찬동 하는 목책만큼은 언제나 내 '정신'
에 찬사를 보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독되어 분명 몸이 말이 아닐 테 지만, 찬동하는 목책이 함께하는 동 안은 멀쩡한 것처럼 움직일 수 있 었다.
효과가 끝나면 다시 바닥을 나뒹 굴어야겠지만.
w컥.. 크헙.. 허억..."
고통스럽게 숨을 내뱉는 댄버가 보였다. 숨을 쉬려고 노력하지만 폐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앞에 섰다.
"커흡.…"
"제가 반드시 해낼게요. 걱정하지 말아요."
그의 끝을 직감하고 하는 말이었 다. 그를 구하기엔 늦었다. 산소가 가득한 곳으로 옮겨도, 그는 산소를 들이마실 수 없을 테니까.
댄버도 대답은 없었다. 이미 그는 제 눈꺼풀 하나 간수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특수탄환의 쿨타임은 5분.'
관통하는 철화를 쓰기까지 남은
시간은, 정확히 4분 17초였다.
그렇다고 놀고 있을 순 없다. 나는 아까까지만 해도 댄버와 이야길 나 누던 사람이 누구인지 예상이 갔으 니까.
탕!
문을 향해 총알을 한 발 쏘지만 흠집이 조금 날 뿐 멀쩡했다. 그 흠집도 이내 마력석이 웅웅 반응하 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생존자 발견.
-생존자 발견.
내 움직임을 파악하고, 다시 방어
시스템이 가동하기 시작했다. 지겨 울 지경이었다.
탕!
탕!
마력석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마 력석이 제 마력을 방어막으로 변환 해 자동으로 방어한다.
하지만 저런 류가 SSS급 리볼버의 총격을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쨍그랑!
방어막이 깨지자마자 마력석을 집 어 들었다. 이걸 이용하면 관통하는 철화를 훨씬 강하게 사용할 수 있을 거다.
저 문도 더 이상 회복하지 못하겠 지.
-마력 손실률 6%.
들리는 음성을 무시하고 총을 연 사했다.
탕, 탕, 탕!
문이라면 무릇 경첩이 있기 마련 이다. 경첩에 해당하는 부분은 상대 적으로 약할 수밖에 없다.
한 점에 집중해 겨누자, 마력석이 없어 회복하지 못하는 탓에 철문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탕, 탕!
관통하는 철화는 아닐지라도, 약한 부분에 연사하면 견딜 수 없을 것 이다.
쾅!
쿠구구구구…….
철문이 드디어 젖혀졌다.
익숙한 연구실이 시야에 들어왔다. 며칠 동안 이 안을 뒤졌기 때문에 대부분은 한 번씩 훑어봤으나, 딱 한 군데.
'미처 둘러보지 못한 곳이 있지.'
수석 연구원의 방.
수석 연구원을 위해 준비된 곳이 었으나, 그가 출근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늘 문이 잠겨있었고.'
출근도 안 하는 작자의 방을 뒤져 보는 수고를 기울일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뒤로 미뤄두었는데, 결국 제일 마지막까지 열어보지 않은 방 으로 남은 것이었다.
탕!
더 이상 얌전히 들어갈 필요도 없 었다. 잠금장치를 부수고 문을 열었 다.
예상대로 서류 한 장 없이 깨끗한 책상과 책장들이 휑하게 늘어서 있 었다.
사람이 오래 드나들지 않아 먼지 가 가득했다. 공간 간섭으로 빠르게 내부를 파악했다.
'서랍에는…… 서류가 그래도 몇 장 있군.'
탕, 탕!
곧장 총으로 잠금장치를 부수고 서랍을 열었다.
'내게 중요한 서류는 아니야. 연구 자금의 사용 내역과 그걸 허가하는직 인에 ****** 9
맨 마지막에 눈에 들어온 것은, 꽤 고급스러운 서류 봉투였다.
겉면에 멋들어진 필기체로 이 탑 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오로굴드의 탑'
오로굴드, 진리의 또 다른 이름. 톨룩의 신화에서 따온 은유로, 본래 는 지구인인 내가 알 도리가 있을 리 없지만…….
내게 이에 대해 설명해준 자가 한 명 있었다.
-나처럼 오로굴드에 가까운 연금 술사도 없지.
-진리와 연금술의 신인 오로굴드 를 모르나?
봉투 안에서 서류를 꺼내들었다.
'오로굴드의 탑 장기 프로젝트 기 획서'라고 쓰인 제목 아래로, 누가 이 계획을 주도했는지 서명이 되어 있었다.
'THEODORE'
테오도르. 그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