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딱딱하게 굳은 분위기에서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제각기 자신의 길 드를 상징하는 망토를 두르고, 전쟁 영웅임을 드러내는 훈장을 달고 있 었다.
그래. 인류 최후의 전선. 그야말로 인류의 미래를 결정짓던 군사회의.
그 가운데 내가 있었다. 회귀 전의
내가!
-제가 갈 수밖에 없습니다. 각개 전투는 제 전문이고, 다른 분들은 이끌어야 할 병사들이 있지 않습니 까.
-너무 위험합니다. 정예로 추려서 다섯 정도가 함께 가는 게…….
-단 한 명도 허투루 사용할 수 없 는 인력난인데, 어디서 정예를 다섯 이나 빼겠단 소립니까.
무엇에 대한 회의지?
분명 저기 서 있는 건 난데. 주변 에 서 있는 다른 인물들도 내 기억 속 그들인데. 회의 내용만큼은 낯설기 그지없었다.
-더 나은 방도나 효율적인 대책을 내놓지 않는 한 제 결정을 철회할 수 없습니다. 제가 가는 게 맞습니 다.
내가 단호하게 선언했고, 회의는 그대로 끝이 났다.
-대체 무슨 생각이야?
푸른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가 텅 빈 회의실에 남아 내게 물었다.
푸른 로브가 뒤로 젖혀지고 얼굴 이 드러난다.
은색 머리카락을 조금 길게 길러
하나로 묶고, 푸른색 마력석으로 만 든 귀걸이를 한쪽에 끼고 있다.
청사의 이운우였다. 그러나 내가 아는 지금의 이운우와는 좀 다르다.
'이곳에서의 우리는 서로 인정하되 기대지 못하는 관계. 어디까지나 정 치적 적대 세력에 속한 자들이었 지.'
- 뭐가?
-그대로 가서 개죽음 당할 생각은 아니겠지?
이운우가 한껏 비꼬는 말투로 물 었다. 호수 안의 나는 창 너머를 바라보다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이운우를 바라봤다.
- 그렇다면?
- 뭐?
-가능성은 적지만 이 전쟁을 끝낼 수 있는 힌트야. 내 목숨 하나 희 생해서 시험해볼 수 있으면 수지맞 는 장사지. 안 그래?
나 역시 가시가 곤두선 말투로 답 했다.
'전쟁을 끝낼 수 있는 힌트?'
그런 중요한 내용이…… 왜 내 기 억에 없는 거지?
-네가 그냥 개죽음 당하면 그야말
로 막대한 손실이야. 네 전투 방식 은 대체할 수 없다는 거, 알잖아.
-이대로 변화 없이 계속 싸우면 어차피 다 죽을 거야.
나와 이운우는 계속해서 실랑이를 했다.
그러나 내가 조금도 물러설 기색 이 없자 결국 혀를 쯧, 한번 차더 니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홀로 남은 회의실 안에서. 나는 다 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병사들이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 다. 오랜 전쟁과 끝없는 싸움에 지 친 기색이 역력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한참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 다.
'지나치게 생생하다.'
나는 호수에서 시선을 떼고 생각 했다. 처음엔, 내 기억을 기반으로 재구성한 환상인 줄 알았다. 그도 아니면 수도 없이 열린 회의들 가 운데 내가 잊어버린 내용이라 생각 했고.
'환상이라기엔 현실적이고, 내가 잊은 기억이라기엔 너무 중요한 내 용들이 야.'
내가 방금 본 것은 그럼 대체 뭐 란 말인가?
-내가 아는 기억이 아니었어. 정 말로, 처음 보는 기억이었어. 그리 고 그 기억 속에…… 네가 있었어. 한서하. 네가.
이운우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 었다. 자신이 잊은 기억은 아니지 만, 분명 자신의 것이었던 기억이 있었노라고.
'내게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 건 가?'
대체 무엇 때문에?
혼란스러운 마음뿐이었다. 단 한 번도 내 기억에 의문을 품은 적이 없었는데. 이제 내 스스로에게 물을 때가 왔다.
'내 기억에 얼마만큼 확신하는가.'
당연한 말이지만. 100퍼센트 확신 할 순 없었다. 빈틈을 찾자면 수도 없이 찾을 수 있을 거다. 기억이란 그런 거니까.
그 순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 다.
"으윽……! 아아아악!"
머리를 부여잡고 바닥을 굴렀다.
그야말로 두개골이 쪼개지는 듯한 고통이었다.
"허억…… 윽, 으아아아아!"
눈앞이 번쩍번쩍 빛나는 듯했다. 극심한 고통에 시야마저 흐려지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눈앞이 빛나는 것 같은 느 낌이 아니었다. 진짜 빛나고 있었 다.
내 앞에. 무언가 어렴풋이 보였다.
고통이 심해 눈앞도 흐렸지만, 허 공에서 불현듯 나타난 그것이 뭔지 똑똑히 보였다.
모래시계 였다.
"허어억!"
그것을 인식한 직후, 거세게 숨을 들이켜며 눈을 떴다.
머리를 쪼갤 듯하던 두통이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허억…… 허억……
숨을 고르며 주변을 살폈다.
한국병원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 는 환자복에, 새하얀 입원실이었다.
' 병원?'
내가 왜 병원에 있지? 방금까지
나는 이상한 하얀 공간에서 헤매고 있었는데……?
그 직후 문이 벌컥 열리며 간호사 한 명이 들어오다 화들짝 놀랐다.
"환자분! 정신이 드셨어요?"
정신이 들었냐고? 내가 쓰러져 있 었단 소린가?
그러고 보니 팔이 부쩍 말라 있었 다. 실전용으로 압축되어 붙어있던 근육들이 많이 빠졌다.
'얼마나 쓰러져 있던 거지?'
내가 상황 파악을 하느라 바쁜 도 중에 간호사가 의사에게 연락했다.
나는 주치의가 도착한 다음 몇 가 지 검사를 더 받았고, 그 와중에 내가 두 달이나 병원에 입원해 있 었단 소릴 들었다.
두 달이라니?
내가 그 하얀 공간에 머무른 시간 이 그렇게 길었단 말인가.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나만 빼고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내가 게 이트에 들어갈 적만 해도 막 여름 이 끝날 무렵이었는데.
벌써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몇 차례 검사 후, 나는 조금 더 상 태를 지켜보다 그때까지 이상이 없 으면 퇴원해도 좋다는 진단을 받았 다.
왜 내가 그토록 오래 정신을 차리 지 못했는지, 또 갑자기 왜 깨어난 건지. 정확한 원인을 말하기 어렵다 고 했다.
그리고 마침내 절대안정 기간과 관찰 기간이 끝난 뒤, 나는 그들과 마주할 수 있었다.
혜원 언니와 표연원 말이다.
언니는 말없이 날 바라보다가 눈 물을 글썽였다. 그러나 내게 보이고 싶진 않았는지 고개를 돌리고 애써 울음을 참았다.
표연원도 할 말이 많은 얼굴을 했 다가, 결국 꺼내는 말은 '꽃병에 꽃 이 많이 시들었네요.'였다.
내가 깨어난 직후엔 꽃이 싱싱했 는데, 깨어난 직후 면회가 금지되면 서 내가 잘 신경 쓰지 못해 서서히 시든 것이었다.
"무슨 소리야?"
"아니에요."
표연원은 아니라고 말하면서 가볍 게 웃었다. 나는 영문을 몰라 눈만 껌뻑 였다.
"그동안 잘 지냈지?"
"네. 지금은 아카데미를 다니고 있 어요."
"그래? 한창 바쁘겠네."
아카데미에 접수하고 면접 보는 것까진 옆에서 봤는데 말이다.
"하아……. 서하야."
혜원 언니는 겨우 진정이 됐는지 붉은 눈매를 하고서 날 바라봤다.
그러나 서두를 꺼내자마자 다시 눈 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언니."
"서하야. 다신 그러지 마."
혜원 언니가 무너지듯이 날 껴안 았다.
"난, 너까지 잘못되는 줄 알고
아차, 싶었다.
표연원을 잃을 뻔한 지 얼마나 됐 다고, 나까지 그 안으로 들어가 버 렸는지.
혜원 언니에겐 참으로 가혹한 처
사였을 것이다. 문득 그것을 깨닫 자, 혜원 언니가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지 안쓰러워졌다.
"언니. 저 이제 괜찮아요."
"알아. 아는데…… 내가, 내가 견 딜 수가 없어서……
언니가 숨죽여 흐느꼈다. 나는 더 이상 변명하지 않고 그녀를 꼭 껴 안았다.
* * *
"깨어났답니다."
쨍그랑!
요란한 소리가 났다.
" 언제요?"
"조금 전이랍니다."
권성민은 깨진 유리조각을 물끄러 미 내려다봤다. 산산조각 난 유리잔 이 매섭게 빛났다.
길고 긴 기다림이었다.
설마. 설마하니. 태산처럼 굳건할 줄 알았던 한서하가 그렇게 쓰러져 일어나지 못할 줄이야.
권성민은 그 소식을 처음으로 들 었을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했다. 그럴 순 없었다.
'이런 식으로 쓰러져선 안 되는 거 잖아.'
권성민은 그가 한서하를 끌어내리 는 상상은 해본 적 있어도, 한서하 가 스스로 무너지는 것은 단 한 번 도 염두에 둔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 청천벽력 같았다.
"오늘 의원님께서 부탁하신 건 은..
"조만간 해결할 거라고 전해주세 요."
권성민은 막 상념에 잠기려는 때
에 방해하는 남자에게 짜증스럽게 답했다.
"서둘러주시죠."
그 말을 끝으로 남자는 돌아갔다.
'내가 입 속의 혀처럼 굴어주니, 순전히 자기 아랫사람인 줄 알고 말이야.'
권성민은 목이 말랐다.
느긋하게 가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촉박하다는 걸 알아버린 것 이다.
'일단은 눈앞의 일부터 해치우고 더 생각해봐야겠어.'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철을 집어 들었다. 펼쳐보니 간단한 인적 사항과 사진 그리고 언제 어디로 움직일지 경로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었다.
'이 사람은…… 저번에 봤었지.'
시위대 선두에 서던 사람이었다. 임천훈 의원을 보좌하느라 따라갔 던 현장에서 본 적이 있다.
'반대하는 시위대 때문에 골치라더 니.'
그들과 화합하고 의견을 조율하는 것은 귀찮고 짜증 나는 일이겠지. 돌아가는 길보다 훨씬 쉬운 길을택한 것이다.
'조만간 뉴스에서 다시 보겠어.'
그땐 아마 의문의 사고사를 당한 피해자로 뉴스에 나올 것이다.
권성민은 차게 웃었다. 뭐, 어차피 세상은 힘의 논리에 따라 돌아가는 거 아니겠는가.
깨어나자마자 찾아간 곳은 당연하 게도, 테오의 방이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곳에 테
오도르가 있었다. 내가 익히 아는 그 조그마한 모습으로.
"오랜만에 보는구나. 그동안 게이 트에도 들어오질 않았던데."
"일이 좀 있었거든."
병원 신세를 졌단 말은 굳이 꺼내 지 않았다.
"이번에도 내게 할 말이 많아 보 이는구나."
나는 잠시 테오도르를 응시했다. 진녹색 머리카락이 구불구불하고, 하얀 피부에 잘 차려입은 모양새가 퍽 귀족적이었다.
"이번 스테이지형 게이트에서 내 가 뭘 봤는지, 너는 알 텐데."
"아니. 우리도 몰라."
게이트 총괄 책임자가 그걸 모른 다고?
"스테이지형 게이트는 좀 특이한 유형이라…… 필드형과 달리 우리 들이 개입할 수 있는 요소가 매우 적거든."
"그 스테이지형 게이트들…… 톨 룩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거지."
나는 확신 어린 어조로 말했다. 테 오도 숨길 생각은 아니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아냈구나. 맞아. 우리의 역 사에서 비롯된 이야기들이지."
역시나.
그렇다면 내가 회귀 전과 후에 그 수많은 스테이지형 게이트에서 겪 은 일들이…… 죄다, 죄다 사실이었 단 말인가.
"정확한 원리는 알지 못하네. 막연 히 누군가가 간절히 바랐던 일, 그 사념체에 반응해서 만들어진다는 가설만 있을 뿐이지."
테오도르는 그 뒤에 자신들은 필 드형을 만들려 했으나 드문 확률로스테이지형이 되어버린다는 말을 덧붙였다.
더불어 자신들은 그렇게 만들어진 스테이지형 게이트에 아무런 영향 도 끼칠 수 없다는 것까지.
"그럼 연화도 게이트 안에 있던 네 안배도?"
"원래는 작은 필드형 게이트를 만 들어 그 안에 안배를 넣어주려 했 지. 근데 스테이지형이 되어버린 건 내 의도가 아니었어!"
톨룩 측도 정확한 원인을 파악하 진 못하는 것 같다. 아마도…… 뭔 가를 간절히 바라며 죽은 자들의사념체가 영향을 미친 것 같지만.
'연화도 게이트에서 주요 인물은 달리아였어. 그렇다면 그건…… 달 리아의 소망이었을까.'
아이들이 죽지 않고 그 신학교에 서 도망치기를. 달리아는 누구보다 간절하게 바랐던 것일까.
"그 안에서 무얼 봤지?"
테오가 물었다.
'이계의 배신자가 제 세계를 배신 한 이유가 무엇인지, 그 내막을 봤 지.'
그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겨
우 삼켜냈다. 내 침묵에서 테오도르 는 무언가 읽어낸 것 같았다.
"날 봤구나."
푸른 눈동자가 을곧게 날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