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내 이야길 본 거야. 그래. 누구의 바람을 봤지? 카이사르 대공? 테레 지아 백작부인? 토르소 숲 속의 엘 프?"
그가 줄줄 읊었지만 정작 내가 본 사람은 나오질 않았다.
마지막의 마지막에서야 테오도르 는 그 이름을 내뱉었다.
"댄버."
"그래."
"댄버를……. 그 애의 소망을."
테오도르는 아득히 먼 어딘가를 바라보는 눈빛을 했다.
"뭘 원했는지 알 것 같구나."
함부로 말을 꺼낼 수 없어 침묵을 택했다. 댄버가 테오도르에게 어떤 의미를 지녔을지 알지 못하지만.
제3자인 내게도 그날의 비극은 매 우 충격적이었으니까.
"그 게이트 안에서도 나는 비겁하 게 도망쳤나?"
방어 시스템이 구축된 직후. 얼굴 은 제대로 보지 못했으나 테오도르 로 추정되던 인물은…… 그대로 뒤 돌아 나갔다.
" 그랬군."
굳이 대답하지 않았지만. 테오도르 는 내 표정에서 그 대답을 읽은 것 이다.
"그랬군……. 그랬어."
아릿한 고통마저 느껴지는 혼잣말 이었다.
"내가 아는 건 그 게이트 안에서 벌어진 일들뿐이야. 지금…… 그
'인공지능'은 어떻게 됐지?"
"게이트 생성기의 핵심 부품으로 성장했다네."
테오도르는 쓰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꽤 많이 자랐구나. 이젠 10살 정도 되는 어린애처럼 보이니까."
"……자랐다고?"
내가 봤던 그것은 태아의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10살 정도 되는 어 린애처럼 자랐다고? 성장까지 하다 니.
그야말로…… 생명체처럼.
내가 아는 인공지능과 저쪽의 인 공지능은 너무도 다른 개념이라서 이렇게 놀라게 된다.
"왜 파괴하지 않은 거지? 네겐 접 근 권한도 있을 텐데."
"방어 시스템은 갈수록 치밀해졌 고, 그 애는 이제 거의 오로굴드 탑의 주인이라네."
오로굴드의 탑, 아직 그 안에 있단 말인가?
게이트 생성기의 핵심 부품이라 하길래 진짜 부품처럼 기계에 들어 가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오로굴드의 모든 장치들이 그 애 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이 세계에 그 애한테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 이 있을까 싶어..
자조적인 말투였다.
"마왕이라도 오지 않는 이상 말이 야."
그 정도로 견고한 방어라. 테오도 르가 손쓰지 못할 법도 했다.
나는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묻고 싶었던 질문이 있었다. 도무지 묻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것 말이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달리아'에 대해서 알고 있어?"
달리아. 리트의 구원자였으며, 끝 내 성배가 되어 숨을 거둔 그 애 말이다.
스테이지형 게이트가 실제 역사를 반영한 것이라면…….
'달리아는 성녀가 되어 활동했겠 지.'
우리가 신학교를 쳐부수지 않았더 라면 그렇게 급하게 실험을 하지 않았을 테니까.
안정적으로 실험에 성공해서 성녀 가 되어.. 천수를 누리진 못했을거다. 이른 나이에 제 생명력을 다 빼앗겨 노인이 되어 죽었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애는 '성녀' 였을 거다. 그 막대했던 신성력이 란.
그야말로 성녀에 걸맞은, 찬란한 빛깔이었으니.
"달리아. 달리아. 그래. 아는 이름 이지. 사이비종교 성녀의 이름 아니 더냐."
그래. 너는 역시 성녀가 되었구나.
"'성녀' 달리아는…… 행복하게 살 았어?"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물었다. 혹시나 싶어서.
"그 종교의 성녀에 대한 기록은 극비라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기적 같은 일들을 행하고, 많은 이 들의 존경을 받았다곤 들었지."
"그 종교는 아직 존재하나?"
"무너졌네."
사이비종교라곤 하나 실제로 성녀 를 배출해냈는데. 무너졌다고?
그 성녀를 배출해내는 방법이 끔 찍하긴 했어도 누구나 탐냈을 텐데.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 격인데 말이다.
"황권에 위협적이었으니까."
"하하……. 그런 이유로."
그런 이유로 사라질 종교였으면서. 고작 그 정도였으면서.
그렇다면 그 이름 아래 스러진 수 많은 아이들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주먹을 꽉 쥐자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며 고통을 남겼다.
"그들에 대한 이야기도 봤던 모양 이지. 잊는 게 좋아. 그 종교와 연 관된 자들 중에 끝이 좋은 이들이 없었으니."
"내 생각에도 그랬을 것 같네."
그곳에 있었던 신부나 수녀들이나 좋은 꼴을 보진 못했을 거다.
'차라리 0과 1로 이루어진, 허구의 인물인 게 나았을 텐데.'
그 애의 얼굴, 말투, 과거. 거기다 가장 간절히 바랐던 소원까지 알고 있는데.
내가 행한 구원이 결국 실존하는 그 애한테는 닿지 못했다는 사실이 퍽 서글펐다.
게이트 안에서는 그들의 소망대로 신학교가 무너지고 인공지능도 파괴되었지만.
그 안에서의 일일 뿐이라면 얼마 나 덧없는가.
"나도 네게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게 있다."
"뭘 2"
"그 게이트에선."
테오도르가 떨리는 눈동자를 하고 서 물었다.
"그 안에선, 댄버가 살았나?"
머릿속에 그의 최후가 떠올랐다.
눈도 채 감지 못해 죽었기에 내가 그 눈을 감겨줬었지.
마지막까지, 죽기 직전까지도. 그 는 인큐베이터 지척에서 떨어지지 못했다.
손아귀에 피가 날 정도로 쇠파이 프를 내려치고, 숨을 쉬지 못해 죽 어가는 와중에도.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였으니.
"아니."
"그 안에서도……
"댄버는 자신의 목숨보다 '그것'의 파괴를 더 우선시했으니까."
"그랬겠지. 그랬을 거야."
게이트의 목적에 댄버의 목숨 여
부는 없었다.
댄버가 마지막까지 자신의 목숨을 염두에 두지 않았고, 오롯이 그 인 공지능의 파괴만을 염원했다는 반 증이었다.
스테이지형 게이트가 무엇을 기반 으로 하는지 알았고, 그 안에 톨룩 의 개입 여부가 극히 적다는 걸 알 았으니 용건은 끝이 났다.
"아쉽구나. 그 게이트엔 내가 들어 갔다면 좋았을 것을."
테오도르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나 는 그의 방을 벗어났다.
* * *
-청사의 이운우 헌터가 다시 한번 활약했습니다. '낙뢰'라는 이명에 걸맞게 강력한 뇌전 마법을 선보인 이번 클리어 영상은 포털 사이트에 서 큰 화제가 되고 있는데요.
식사 시간에 TV에서 이운우에 관 한 뉴스가 흘러나왔다.
자료 화면으로 보여주는 영상은 게이트 안에서 찍힌 것 같았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대단한 번개가 내 리치는 장면이었다.
'이운우……. 이운우와 내 공통점 이 대체 뭘까.'
무엇 때문에 그에게나 나에게나, 겪은 적 없는 기억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와-. 대단하네."
표연원이 작게 감탄했다. 혜원 언 니도 애송이가 제법이라고 평했다.
이운우의 활약상이 요즘 두드러지 게 방영되고 있었다. 청사에서 신경 써서 언론 플레이를 하는 것 같은 데…….
'전서호가 은퇴하려고 각을 재고
있는 건가.'
이것 봐라?
아무리 길드 운영이라지만, 어디서 전쟁 직전에 쏙 빠지려고 한단 말 인가.
'귀한 자원인데. 그럴 수 없지.'
이운우도 전무후무한 천재 마법사 지만, 이운우 전에는 전서호가 있었 다. 그도 어마어마한 신드롬을 일으 켰던 마법사 아닌가.
'마법사 하나하나가 대규모 공성전 에선 그 가치가 돈으로 따지기 어 려울 정도야. 순순히 은퇴하게 둘 순 없지.'
지금은 톨룩에 대한 논의가 다 마 무리되지 않아서 은근슬쩍 은퇴할 수 있겠다만.
본격적인 군사 회의가 시작되면 쉽사리 빠져나가지 못할 거다. 국가 에서도 압박을 줄 테고.
"언니. 다음 회의가 언제라고?"
"어……. 한 달 뒤였나. 지지부진 끌고 있어서 이젠 지겹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특급 정보를 한 가지 더 넘겨줄 때가 된 것 같다. 그러면 시간만 질질 끌던 회의에 한층 속도가 붙겠지.
'테오도르의 존재를 알릴 때가 됐 나?'
언제까지고 나 혼자 독점하고 있 을 순 없긴 하다.
'테오도르가 지구로 온전히 넘어오 는 건 좀 나중 일이지만, 얘기하는 걸 보면 기술은 지금도 개발 중인 것 같았으니까.'
테오도르의 기술이 완성되어, 그가 온전히 지구로 넘어올 수 있게 된 다면. 그땐 회의가 진정으로 유의미 한 결과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 * *
"네? 제가요?"
-네. 최근 몸 상태를 회복하고 다 시 헌터 일에 집중하고 계시다고 들었는데. 혹시 아닌가요?
"아뇨. 맞아요."
불쑥 걸려온 전화는 내가 생각지 도 못했던 제안을 했다.
-아카데미에서 던전에 학생들을 데리고 들어가는 실습을 하려고 하 는데, 아무래도 현직 헌터가 활약하 는 모습을 보면 더 뜻 깊을 것 같아서요.
휴대폰 속 목소리가 조잘조잘 떠 들었다. 소정의 대가를 지불할 순 있으나 기본적으로 재능 기부의 일 환이라는 것부터, 후발주자가 될 학 생들을 위해 꼭 필요한 실습이라는 것까지 말이다.
'이 시기의 국립 아카데미면…… 내가 아는 사람도 다니고 있을 텐 데.'
회귀 전 이맘때는 내가 아직 연화 도 게이트에서 고생하고 있던 시기 다.
이 무렵 아카데미에 입학해서, 내
가 데뷔하고 1년쯤 뒤에 아카데미 를 졸업한 헌터들이 꽤 많다.
그들을 보통 4세대라고 불렀다. 내 게도 귀여운 후배들이었고.
"언제, 어디로 갑니까?"
-네. 2주 뒤에 '무너진 도서관' 던 전으로 갈 예정입니다. 원거리 딜러 위주 학생들과 교사로 구성된 팀이 고, 학생들은 거의 개입하지 않고 교사와 헌터들이 던전을 클리어하 는 방식으로 진행될 겁니다.
그래. 이 애들이 또 시험에 합격해 헌터가 된다면 좋은 전력이 되겠지. 무너진 도서관은 난도도 적당한 던전이니 크게 위험한 일은 없을 것 이다.
"흐음……. 네. 알겠습니다. 저도 가도록 할게요."
-감사합니다. 뜻 깊은 일에 함께 해주셔서. 홍염의 전청운 헌터와 김 기택 헌터 그리고 청사의 안유수, 안유라 헌터까지 다섯 분이 한 팀 을 이루시게 될 겁니다.
전청운에, 안 씨 쌍둥이들까지? 이 거 반가운 얼굴들이 많았다.
'쌍둥이들은 정말 오랜만에 보네.'
그 둘은 쌍둥이라는 특이점과 매 력적인 외모, 더불어 뛰어난 실력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었다.
헌터 업계뿐만 아니라 광고 업계 에서도 러브콜을 많이 보낸다고 들 었다.
'재밌겠어. 연원이한테 좋은 경험 도 될 테고.'
그리 가볍게 생각하고 승낙했는 데…….
"아, 그러세요? 그러니까 그쪽은 잘못한 거 하나도 없으시다?"
"내가 뭘 잘못했지?"
"어이가 없어서 말이 다 안 나오
네! 상종을 하질 말아야지, 진짜. 말을 못 알아먹으니 이길 자신이 없다!"
"누가 할 소린지 모르겠군."
안유라가 쏘아붙이고, 전청운도 밀 리지 않았다.
"유라야, 참아! 참아!"
"전청운 씨, 주변에 보는 눈이 많 습니다!"
그 뒤에선 안유수와 김기택이 둘 을 뜯어말리고 있었다.
"하하……. 여러분. 던전 안에서 다툼이 생기면 서로 의견을 조율하는 게 중요하고……
교사들도 최선을 다해 수습하고 있었다.
전청운과 안 씨 쌍둥이는 그야말 로 최악의 조합이었다.
'맞아……. 회귀 전에도 그랬던 것 같아.'
둘은 전혀 다른 길드였고, 애초에 청사와 홍염은 자주 으르렁거렸으 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길드의 이념이나 대립 때문이 아 니라 저 둘은 그냥 성격이 안 맞는 것 같다.
나는 현직 헌터들에 대한 동경으 로 가득 찼던 학생들의 눈빛이 잿 빛으로 변하는 것을 보면서, 대체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 지 좀 막막해졌다.